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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Jul 27. 2020

옆 집 아빠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에 비해 감정의 기복이 얕고, 그래서 아이를 혼낼 때도 좀 더 조곤조곤 이성적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대주의적 편견이며, 어디든 사람 나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한 호주인 아빠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호주는 땅이 커서 집간의 간격도 한국에 비해 널찍널찍하지만, 주택가가 워낙 조용한 데다 단열이나 방음 상태가 안 좋아서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옆 집에 그대로 다 들린다. 이사 오기 전에 골드코스트 답사 목적으로 조용한 동네의 가정집 방 하나를 빌려 묵은 적이 있다. 그 집 침실 창문 너머로 아침저녁 들려오던 이웃집 아저씨의 고함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여자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걸로 봐서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집인 것 같았다. 2박 3일 동안 들려온 대화라고는 아빠의 일방적인 명령과 대여섯 살로 추정되는 아이의 울음소리뿐이었다. "하지 마!" "가서 네 물건 집어!" 그만 울어!" "울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아이가 얼마나 뭘 잘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아빠는 분명 자기 성질을 못 이겨 힘없는 아이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집에 머무는 내내 아이의 웃음소리나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듣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나서 "애가 아니라, 당신이 문제야! 좀 그만해."라고 담장 너머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호주인 동료 뎁에게 "저렇게 지속적으로 아이를 윽박지르는 것은 아동학대에 해당이 안 돼? 신고하면 안 될까?" 물었다. 멋모르고 나섰다가 아이가 더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나를 진정시키며 뎁은 자기 부모 얘기를 해 줬다.


뎁의 부모님은 자식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랑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남에게는 한없이 베풀고 좋은 평판에 연연하면서 딸에게는 얼마나 냉정하고 차가운지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넨 적도, 제대로 안아준 적도 없었다고 한다. 이미 60세가 넘은 뎁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니, 어릴 때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시간만으로는 아물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 결함이 없는 부모는 없는 것 같다.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어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부모, 내가 괜히 너를 나았지라는 말을 농담처럼 스스럼없이 하는 부모, 절대 칭찬해 주지 않는 부모, 강하게 키우는 것과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의 경계를 모르는 부모, 내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기준이 없이 아이를 훈육하는 부모, 과잉보호로 아이를 인형처럼 키우는 부모, 내가 못 이룬 꿈을 아이가 대신해주기 바라며 아이의 인생에 끝없이 참견하는 부모.


정말 미숙한 점 투성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전반적으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나에게 칭찬과 애정 표현을 아낌없이 했고, 스스로 앞가림을 못하게 할 만큼 자식을 풍족하게 키우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남을 늘 배려하며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들도 가끔은 크게 싸웠고 고성이 오갈 때면 나는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불안에 떨었다. 20년 전 만 해도 '사랑의 매'라는 말이 통하던 때라서 총채라 불리던 먼지떨이로 두들겨 맡고, 맨발로 쫓겨나 집 앞에 한 시간씩 서 있기도 했다.


그렇게 때려놓고는 밤이 되면 꼭 자고 있는 내 팔과 다리에 연고를 발라준다. 나는 자는 척 눈을 계속 감고 엄마의 코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엄마가 속상해서 우시는구나. 역시, 엄마는 나를 사랑해. 다 나 잘되라고 때린 거야."


자신을 때린 엄마를 변호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사랑의 매라는 말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어른들이 만든 핑계에 불과하다. 우아하게 회초리로 때렸다면 좀 나았을까? 손에 잡히는 대로 막대기를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어린 나이였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잘되라고 가르치기 위해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화난 감정을 만만한 나에게 퍼붓는 것일 뿐이라는 걸. 실컷 화를 내고 나서 이성을 되찾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아이의 상처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나는 드라마의 각본처럼 짜여진 어른들의 변명에 내 생각을 구겨 넣었다.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엄마는 나를 사랑하셔.


요즘은 아동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 수준이 훨씬 엄격해서 예전만큼 아이를 때리거나 홀딱 벗겨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을 다 버려버린다고 협박하는 등, 아이 앞에서 절대 강자인 부모들이 행하는 갖가지 방법의 폭력은 여전하다.


아이를 대책 없이 방치하거나, 쉴 새 없이 짜증을 내는 방식으로 정신적 학대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것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 행동인지 몰라서 그러기도 하고,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부모 자신의 정신이 유약해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해 실수하기도 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이를 낳고 사랑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 교육보다 부모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동 심리를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이 있고,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는 방법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이나 전문가 강의 영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꼭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책이나 영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어릴 때도 다 이러고 컸어' 하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주던 부모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아이에게 불완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심리와 소통하는 법에 대해 알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무지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부모의 무지, 치유받지 못 한 상처와 그로 인해 아이들에게 대물림되는 정서적, 물리적 폭력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가 되었다면, 내가 아이의 롤모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 의무가 있다. 부모가 행복하지 않거나 자신의 삶에 안정을 찾지 못하면서, 내 아이가 행복하게 크길 바라는 것은 마늘을 심어놓고 사과가 열리기 바라는 것과 같다.


절대 내가 받은 상처를 내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말자. 화초를 하나 기르는데도 정성이 필요한데, 사람을 키우는 일은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인가.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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