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시내 한복판이나 동네 한가운데에 공동묘지가 있다. 골드코스트 시가 운영하는 공동묘지는 여덟 개, 도서관은 열두 개인데 묘지의 입지를 선정할 때도 도서관 못지않게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나 싶다.
공동묘지가 담력 훈련할 때나 찾는 대표적인 혐오시설인 한국과 달리, 이 도시에는 공동묘지가 큰 마트 옆에 있기도 하고, 주택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기도 하다.
한국에선 기피대상이지만 호주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중에는 공동묘지와 더불어 고압선과 철탑도 있다. 꽤 비싼 타운하우스가 있는 동네 상공을 고압선이 유유히 지나가는가 하면, 일 년 학비가 2만 불 (유학생은 4만 불)이 넘는 유서 깊은 사립학교 운동장에 철탑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오늘 작은 아들과 마트를 다녀오다가, 평소 지나다니던 공동묘지에 잠깐 차를 세우고 산책을 했다. 좀 걷고 싶은데, 그냥 걷자고 하면 싫다고 할 게 뻔해서 아들 입장에서 흥미를 느낄 만한 곳을 생각해본 것이다.
차로 지나다닐 때 늘 알록달록 꽃들이 놓여 있어서, 역시 묘지가 동네 한가운데 있으니 가족들이 좀 더 자주 찾아오나 보구나 했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니 대부분은 다 조화였다. 하긴, 아무리 돌아가신 분께 애틋한 마음을 가졌더라도, 생화가 시들지 않을 정도로 자주 들를 수는 없는 일이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종종 동네 묘지에 가서 묘비문을 읽곤 한다는 친구의 별난 취미가 생각나, 찬찬히 걸으며 묘비에 쓰인 글들을 읽어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해. Pardon me for not getting up"이나 조지 버나드 쇼의 "너무 오래 살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같은 재기 넘치는 묘비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xxx의 사랑하는 남편, xxx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장의사가 추천하는 디폴드로 정해진 문장에 이름만 끼워 넣은 것 같이 천편일률적이었다.
웬만하면 남들 눈에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퀸즐랜드 인들의 수줍은 정서가 묘비문에 조차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이렇게 관을 땅에 묻는 방식의 묘지도 있고, 화장 후 유골함을 묻고 그 위에 작은 묘비석만 놓는 형태도 있다. 유골함 없이 위패만 벽에 붙이는 형태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유골은 어떻게 처리가 되는 건지 궁금했다.
위 사진 속의 묘지들은 대부분 돌아가신 지 10년 이하로 관리가 잘 된 편에 속한다. 비록 조화지만 꽃들이 제 자리에 꽂혀있고, 묘비석의 상태도 꽤 말끔하다.
10년이 지나 20년이 되어가는 뒷 줄의 무덤들은 점점 이렇게 황량해져 간다.
그리고, 이렇게 세월과 함께 잊혀가는 무덤들도 많이 있다. 언젠가 묘지 전체에 불이라도 났었는지 돌이 까맣게 그을려있고, 묘비문의 연도 수로 미루어 고인의 자손들도 이미 어딘가에 뿔뿔이 묻혀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런 광경을 보니 죽어서도 사람들이 찾아볼 가치가 있는 유명인이 되지 않을 바에야,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무덤은 처음부터 없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다.
가장 슬펐던 것은 1994년에 태어나 2006년에 생을 마감한, 열두 살에 나이가 멈춘 아이의 묘지였다. 아이의 웃는 얼굴 사진이 붙어있는 묘비문에는 (역시) 누구누구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동생이자 손주였으며 영원이 기억될 거라고 쓰여 있었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묘지의 상태를 보니 이 아이도 어쩔 수 없이 잊혀져가는구나 싶었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도 이렇게 만들어 줄 거예요?"
아들이 물었다.
"서율아, 너보다 엄마가 먼저 죽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니?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유언을 할게. 엄마가 죽으면 무덤은 만들지 말고, 화장을 한 다음에 가루는 산에다 뿌려"
"그럼 뼈는 어떻게 해요?"
"화장을 한 후에 뼈를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 거야."
"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유골을 아무 산에나 막 뿌리면 안 되지 않나 싶다. 그래서 방금 인터넷에 찾아보니 (한국 기준) 지정되지 않은 강이나 산에 유골을 뿌리는 것은 불법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엄마의 유언에 따라 뒷산에 유골을 뿌렸는데 동네 주민에게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불려 가는 처지가 되면 안 될 일이다.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죽어서까지 자식들을 곤란하게 할 뻔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 이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해서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
유골의 처리 문제와는 별개로 아이들이 묘비석이나 위패만이라도 설치하고자 할 경우를 대비해, 따분하지 않은 묘비문도 미리 한 줄 써놔야겠다.
이를테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남아있는 가족들이 너무 창피해하려나?
- 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