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희 Sep 02. 2020

고독이 선물한 금술


브런치를 끊겠다고 선언이나 하지 말 것을. 고작 13일 만에 쓰윽 나타나 3일째 글을 올리고 있는 나란 인간을 도대체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부디 아무도 나의 경망스러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남편과 2~3일에 한 번 꼴로 긴 통화를 한다. 남편은 어제 제주에 두 번째 태풍이 오고 있어 여기저기 단도리를 하느라 뙤약볕 아래서 고생이 많다고, 삼십 분이 넘게 자화자찬을 해댔다.

​생색내는 인간을 그냥 넘어가지 않던 예전의 나라면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소방시설 관련해서는 알아봤어?"라며 안 했을 것이 뻔한 다른 일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기를 죽여놔야 직성이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팬대믹을 겪으며 세상일에 최대한 관대해지기로 결심했기에, "대단하네. 얼마나 고생이 많아.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잘 챙겨 먹어야 해." 하며, 수화기 너머로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지었다.

​너그러운 리액션으로 서로의 고생을 치하하다 보니, 대화는 점점 신성한 방향으로 흘러 결국 '코로나 사태가 우리 가족의 역사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관한 고찰을 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가정의 화목함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더 원수가 되었다는 집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기간 동안 가족 없이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법을 연습했다.

​헤어져 지내는 동안 남편도 나도 근육이 붙고, 군살이 빠져가고 있다. 매일 운동을 하고, 인스턴트가 아닌 진짜 음식을 먹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아끼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남편은 요즘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내뱉는다고 한다. 땀 흘려 일하고 시원한 물에 샤워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너무 더운 시간을 피해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시간을 정해 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 감사하고, 맛있는 삼계탕이나 초밥을 저렴하게 사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고 한다. 조기 축구를 하며 거북목 증상이 나아졌고, 망치를 잡고 일하며 오십견이 사라져서 감사하단다.

'이 인간이, 많이 외롭구나.'
마음이 울컥했다.

​하지만, 혼자 지내는 시간이 쓰고 좋은 약이 되었구나 싶다. 내 잔소리와 감시가 없으면 자기 관리도 못하고 엉망으로 살 것 같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초기 한 두 달은 라면을 먹고, 당구장을 드나드는 시기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일탈이야 이해할 만한 사안이니 모르는 척하고 있었더니, 결국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잘 사는 듯하다.

<남편도 나도,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꽤 단단한 어른이다.>라는 믿음이 싹텄다. 이를 통해 얻게 된 안도감은 앞으로 우리 부부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잔소리는 훨씬 덜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제대한 군인처럼 한 달만에 군기가 빠져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11월에 아이들이 각각 9학년, 4학년을 마치면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다. 가격 협상도 없이 대충 집을 팔았고, 신중하게 고른 가구와 가전, 자동차와 살림살이들도 헐값에 팔아치울 것이다.


집도 물건도 이렇듯 살 때는 백년만년 끼고 살 것처럼 고르고 고르지만, 떠나야 할 때는 다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한국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몇 달 지내다가, 영국으로 갈 것이다.

남편이 많이 그립다.


하지만 정작 내가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되는 순간은 뿔소라와 방어회, 고사리 무침을 앞에 두고 제주 막걸리를 막  따르는 순간을 상상할 때라는 것.


아무리 애틋해도 우리는 살만큼 산 부부니까.

<풍요로웠던 제주의 삶을 회상하며, 미소 짓는 밤>


- 리즈 -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해 대니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