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크리스마스 이야기
우리 동네에는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아이가 있다. 남의 집에 가서 마음대로 물건을 만지고, 못 하게 하면 갑자기 성난 늑대처럼 돌변해 으르렁대는 아이.
대니얼.
그래도 몇 달 전까지는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다니는가 싶더니, 요즘에는 늘 혼자 우리 집을 찾아와 벨을 누른다.
찾아온 아이를 돌려보낼 수 없어 별 다른 일이 없으면 들어와 놀게 하는데, 집에 다른 동네 꼬마들이 놀러 왔다가 대니얼이 와 있는 걸 알면 ‘엄마가 대니얼과 놀지 말라고 했다’며 발길을 돌린다.
아이들 문제에 털털하고 관대한 제이콥 엄마는 물론, 소문난 장난꾸러기인 티토후 엄마까지 대니얼과 어울리지 말 것을 지시했나 보다.
워낙 다루기 힘든 아이라 그 엄마들의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서율이조차 대니얼이 찾아오면 휴우 한숨을 쉬며 ‘쟤랑 안 놀고 싶은데...’ 한다.
피곤한 날이면 나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우리마저 외면하면 저 어린것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싶어서 결국 문을 열어주고 서율이를 설득한다.
대니얼은 부모와 떨어져 산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집에 사회복지사가 와서 교대로 아이를 돌본다. 아이의 정서상태, 언행으로 미루어 가정폭력 등의 이유로 부모가 아이로부터 격리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짐작해볼 뿐이다.
제이콥 엄마에게 얘기를 들어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여덟 살 아이도 자존심이 있을 테니 모르는 척하고, 집에 올 때마다 “부모님께 여기 온다고 말씀드렸니?” 하고 물었는데, 그때마다 "My Dad Said O.K. He knows I'm here"라고 해서 아빠가 집에 돌아오셨나? 아님 내가 잘 못 알았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남자가 집에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놀던 대니얼을 부르더니 아이를 면전에 두고 “나는 부모가 아니라 케어러다. 이 아이는 원래 남의 집에 못 놀러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제한하고 있다.” 라며 눈도 안 마주치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대니얼 입가에 잔뜩 묻어 있었는데, 함부로 음식을 주면 안 되는 거였나 보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것이 호주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예의인데 굉장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저렇게 싸늘한 사람이 사회 복지사라니..... 이 아이는 사랑해 줄 사람이 전혀 없겠구나 싶어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앞으로 아이가 집에 오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겠다. 하지만 미리 허락을 받는다면 30분 정도 내에서 허락을 해 줄 수는 없겠는가?" 물으니, 그는 대니얼을 흘낏 보며 "남의 집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꼭 미리 얘기를 하고 가면 허락해주겠다."라고 한다. 그 말 한마디에 대니얼은 뛸 듯이 기뻐하며 냉랭한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 후 아이는 더 자주 드나들었다. 서율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만들어 놓은 레고를 부수어 어질러 놓고, 컴퓨터에 앉아 게임을 하고, 서율이는 말싸움을 해도 이길 수가 없으니 억울해서 울고..... 그런다고 나까지 아이를 내칠 수는 없으니, 하나하나 아이를 가르치는 수밖에 없다.
잘 못 된 행동은 조용히 단호하게 제지하기.
좋은 행동을 하면 크게 칭찬하기.
우리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는지, 아이는 투덜투덜 대면서도 내 말을 곧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남겨두고 사건이 벌어졌다.
외출을 하려고 하는 참에 대니얼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 나가야 하니 다음에 놀자." 하니 그럼 1분만 들어왔다가, 우리가 나갈 때 함께 나가겠단다. 문을 열어주고 서율이가 옷 갈아입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려있는 슈가 케인을 보더니 하나 달란다.
- 사탕은 안 돼.
- 왜 안돼요?
- 슈가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시던데?
- 하루에 한 개 정도는 괜찮아요.
- 하지만, 네 케어러에게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해. 내 마음대로 줄 수가 없어.
이 대목에서 아이의 눈빛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사탕을 제지당해서 그런 건지, 자신의 말을 안 믿어줘서 그런 건지, 내가 '부모'가 아닌 '케어러'라고 대 놓고 말한 것이 상처가 된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 이유 모두가 섞여서 화가 치솟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갑자기 늑대 소년처럼 돌변했다.
- 사탕 먹을 거야.
- 안 돼.
- 먹을 거라고. 당신이 뭔데? 내 맘이야. 왜 못 먹게 해?
- 소리 지르지 말고 조용히 말해. 네. 보호자의 허락 없이 내 맘대로 사탕을 줄 수 없어.
- 난 보호자가 없어. 그놈의 퍼킹 케어러는 맨날 바뀐다고.
- 욕하지 말고 말해. 어쨌든 난 그 케어러와 약속했어.
- 케어러마다 다 다르다고. 그리고 사탕 하나쯤은 괜찮아. 아예 못 먹게 하는 게 어디 있어?
- 좋아. 그럼 너희 집에 가서 지금 있는 케어러에게 함께 허락받고 먹자.
- 절대 우리 집에 오지 마.
- 그럼 사탕 내려놓고 나가자. 우리 지금 외출해야 해
- 노. 노. 노. 노. 노. 노.
- 나가기 싫으면 여기서 기다려. 내가 케어러를 만나서 얘기하고 올게.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아이가 사탕을 들고 앞질러 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대니얼 집 앞마당에 이어폰을 끼고 누워있다가 대니얼의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간다.
벨을 눌러 불러낸 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이가 슈가를 얼마나 엄격하게 제한받고 있는지, 그 이유가 뭔지, 케어러가 계속 바뀐다고 들었는데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 있는지? 물었다. 우리 집에 대니얼이 자주 놀러 오니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나에게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케어러로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잔디에 누워 음악이나 듣고 있었던 것이 뜨끔했는지 허둥지둥 자기변명에만 급급했다.
대니얼은 옆에 서서, 내 옆에 따라온 서율이에게 내 집에서 나가라는 둥. 멍청하게 뭘 쳐다보냐는 둥 갖은 악담을 퍼부었댔다.
그런 아이를 제지하고 가르치기보다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며 '정말 구제불능이지 않나요?'라고 나에게 동조를 구하는 듯 썩소를 날리는 사회복지사라는 사람. 그는 내 이야기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대니얼에게 들으라는 듯이 "이런 행동을 하니 앞으로는 당신 집에 못 가게 하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들으란 듯이 얘기했다.
"대니얼은 지금 화가 났고, 화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에요. 전 대니얼이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가겠다고 결심만 한다면 우리 집에 오는 걸 환영해요."
다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너무 아파서, 계속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서율이와 함께 대니얼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갔다.
"대니얼은 여덟 살인데 사랑해줄 엄마 아빠가 없어. 얼마나 슬프고 외로울지 상상할 수 있겠어? 서율이가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괜히 화를 내는 건, 그 아이 마음에 독이 쌓여서 그래. 대니얼 마음에 독이 없어지려면 우리가 많이 사랑해주고 믿어줘야 해."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서율이가 아빠와 함께 대니얼네 집에 선물을 주러 갔다.
킥보드.
동네 아이들 다 타고 돌아다니는데, 혼자만 맨발로 뛰어다니는 대니얼에게 언젠가 꼭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마침 크리스마스라 잘 됐다.
남편 말로는 아이가 선물을 받자마자 바로 포장을 풀러 킥보드를 확인하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순식간에 직접 조립까지 하더니 "정말 소리도 없이 잘 나간다."를 연발하며 우리 집까지 타고 왔단다. 서율이와 남편보다 먼저 도착한 대니얼이 흥분한 얼굴로 잠깐 잊은 게 있다며 집에 다시 돌아가더니 자기 장난감을 한 개 들고 와 서율이에게 건넨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 대니얼? 너는 산타클로스를 믿니?
- 아니요. 산타클로스가 어디 있어요. 다 부모들이 선물 주는 거잖아요. 나는 케어러가 줄 것처럼 해놓고 안 줬어요.
그러자 서율이가
- 산타는 정말 있어.
하면서, 산타에게 받은 편지를 대니얼에게 보여주었다.
편지를 떠듬떠듬 읽던 대니얼이, '산타를 믿지 않아서 선물을 못 받는 아이들이 많다.'는 대목에서 눈이 동그래지고 입을 쩍 벌어졌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난 이제부터 산타를 믿기로 했어요. 마음을 바꿨어요!" 한다.
아..... 늑대소년처럼 악을 써대던 아이에게, 저렇게 천사 같은 웃음이 있었다니.
이 아이가 조금만 운이 좋았더라면, 사랑해줄 부모가 옆에 있었더라면, 최소한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보호자를 만나 사랑과 관심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건강한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충분히 있는데.
옆에서 빤히 보면서도,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마음이 불편하다.
아이들은 모두 천사다.
그 천사들이 자라면서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 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