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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13. 2020

흥정하지 않는 삶의 즐거움

2년 전에 구입한 자동차의 킬로수가 43,200이 되었다.


엔진오일 교환이나 필터 교환 등 정기적인 관리를 꼼꼼히 하든, 모른 척 미루고 미루다 차에서 타는 냄새가 나고,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고, 엔진룸에 불이 붙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든 본인 자유지만 (나는 실제로 불이 나기 일보 직전까지 차를 몰아본 적이 있다.) 매 10,000킬로미터마다 정기점검을 받고 로그북 (점검일지)을 작성해두어야 차를 중고로 팔 때 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큰 맘을 먹고 공식 서비스 센터에 점검을 맡겼다.


이 세상 모든 공식 서비스 센터가 그렇듯 엔진 오일 교환 및 기본 점검에 소요되는 비용은 동네 평판 좋은 자동차 정비소에 맡기는 것에 비해 1.5배 정도 비싸다. 엔진 오일만 갈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오일 필터와 연료 필터인가 뭔가도 갈고 (나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곳 저곳을 점검해야 한다고 한다. 40,000킬로 주기에 꼭 점검해야 할 필수 항목들이 들어가 있으므로 서비스 내용을 임의로 가감할 수 없고, 비용은 382 달러라고 했다. 자동차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필수 점검 서비스 항목에는 세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절하지만 왠지 실실 쪼갠다고 표현하고 싶은 미소를 띤 담당자는 나를 본 순간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정비소 직원이 손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다름 아닌 호구를 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받으려는 차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창 밖을 가리키며 "저기 문 앞에 보이는 흰 차"라고 말한 것부터가 나의 큰 실책이었다.


세차는 안 해도 되니까, 정말 꼭 필요한 서비스만 받으면 안 되냐고 묻자 그는 실실 쪼개던 미소를 멈추고 엄숙하게 말했다. "4만 킬로에 받았어야 하는 서비스인데 고객님은 이미 43,000킬로를 탔어요. 서비스는 꼭 모두 받아야 합니다. 뺄 것이 없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세차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심지어 저는 손 세차장을 운영하고 있다고요'라고 반문하며 한 바탕 소란을 피우고 싶었지만 나이가 드니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지 나는 오늘도 쉽게 사는 길을 택했다.


"좋아요 좋아. 대신 제가 다음 달쯤 차를 팔 예정인데 안전 점검 확인증을 발급해 주실 수는 있지요?" (호주에선 중고차를 팔려면 최근 2개월 내에 받은 Road Worthy - 안전 점검 증서가 있어야 한다.)


"물론이죠. 비용은 86달러입니다."


뭐라고? 총체적인 안전 점검 비용으로 382달러를 내는데, 기본 안전점검 비용으로 86달러를 또 내라고? 아무리 인생을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은 나이지만 이 대목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직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정확하게 하지만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당신 내가 호구로 보여?"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또 한 번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심지어 바보처럼 미소까지 지었다. "네. 알았어요. 대신 늦어도 2시 이전까지는 작업을 끝내 주셔야 해요." 그는 공손한 미소를 띠며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들 픽업을 하셔야 하는군요? 그럼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그전에 꼭 끝내겠습니다. 세차도 깨끗이 반짝반짝해드리고요."


나는 2시 전까지는 끝내주겠다는 말에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차에서 노트북을 챙겨 근처 카페로 왔다.



공식 서비스 센터의 위엄 앞에 꼼짝 못 하는 공식 호구가 된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덕분에 이렇게 카페에 앉아 두툼하고 따뜻한 건포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으며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돈 없고, 혈기 넘치던 시절의 나라면 지금 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분노의 구글 검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정비소마다 후기를 30개씩 읽어보고, 후보로 몇 곳을 지정해 전화를 걸어 서비스의 내용과 가격을 비교 분석하고, 이 번 주중 예약 가능 여부를 알아보고 있을 것이다. 약 70달러 정도를 아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서비스 날짜에 맞춰 개인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2주 전 약속을 뒤로 미루고 당기고 진땀을 빼다가 결국 이 상황과 그런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지쳐서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으로 공식 서비스 센터에 다시 예약을 잡게 될 수도 있다. 공식 서비스 센터의 노련한 직원은 다시 찾아간 나를 속으로 비웃으며, 며칠 만에 주행거리가 44,000킬로를 넘어섰으니 타이어도 갈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순히 차를 맡기고 나온 내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억척을 떨지 않아도 되는 삶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보다 형편이 넉넉해지기도 했지만, 그간 겪어 온 많은 일들로 인해 내 마음이 조금 성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물건 값을 깎느라, 더 많은 서비스를 얻어내느라 실랑이를 해 작은 이익을 얻어내는 것보다, 기꺼운 마음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더 낫다. 그래야 그에 합당한 서비스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 어디선가 호구 취급을 받더라도, 내 마음이 편하면 그 손해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의 보상으로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반대로 부당하게 취한 작은 이익은,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식당에서 까다롭게 군 대가로 공짜 음식을 얻어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열 받은 주방장이 그 음식 안에 더러운 행주를 쓰윽 담갔다 뺐을지 알게 뭔가.


그간 썼던 글들을 종종 읽어보며 생각했다. '자꾸 글에 교훈을 담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자. 주제넘게 충고하는 듯한 글을 쓰지는 말자.' 하지만 오늘도 결국 마지막 문단에 훈화를 해 버렸다. 요즘 아이들 말로 나는 어쩔 수 없는 교훈충인 건가?



호주에 3년 넘게 사는 동안,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 메뉴판과 함께 시원한 물을 먼저 한 잔 주는 카페는 이 곳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카페의 느리디 느린 인터넷 속도를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정도로 느리냐면, 클릭을 한 뒤 화면을 응시하며 커피 두 모금과 토스트 세 입을 다 씹어 넘길 때쯤에야 간신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정도의 속도다.


인터넷이 느린 덕분에 진중하게 글을 끝까지 썼다. 안 그랬으면 중간중간 인스타에 들어가 하트 숫자를 세거나, 신문 기사에 댓글을 다는 등 딴짓을 하느라 글을 끝맺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임시 저장된 글이 총 96 편에 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감사하기까지 하다.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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