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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희 Oct 29. 2020

Chocolate 초콜릿 (2)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젊은 시절 술을 입에도 못 댔다는 아빠는 정육점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 손님들이 남긴 술과 고기를 조금씩 집어먹던 것을 계기로 밥 먹을 때마다 소주를 맥주잔 반 컵 정도 따라 마시는 습관을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엄마는 아빠랑 둘이 있을 땐 별 말을 안 하다가도, 옆에 자식들이 있으면 '네 아빠는 확실히 알코올 중독이다.'라며 하소연을 하신다. 그럼 아빠는 '내가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냐, 헛소리를 하냐, 집을 못 찾아들어오냐’라고 반박하며 내 말이 틀리냐는 표정으로 자식의 눈치를 쓰윽 보신다.


20년째 같은 패턴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장녀인 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20대의 나는 막연한 페미니즘에 빠져 무조건 엄마 편을 들었고, 30대에는 피곤한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 쓰윽 자리를 피했다. 40대가 된 나는 아빠의 소주잔을 채워주고 말없이 건배를 하는 것으로 75세가 넘어서까지 엄마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아빠의 인생을 위로한다.


작년 이맘때, 아빠 엄마가 면세점에서 소주 두 박스를 사들고 호주에 오셨다. 상당기간 술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나는 효심에 불타 밤마다 아빠의 술친구가 되어드렸다. 술을 못 마시는 사위는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트는 디제이 역할을 하고, 엄마는 모처럼 자식 내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했는지 급기야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건배를 할 만큼 너그러운 면모를 보이셨다.


가족들의 음주 참여에 기분이 한 껏 달아오른 아빠는 최백호의 명곡 ‘애비’를 들으며 평소에 하지 않던 속에 있던 말을 간간히 내뱉으셨다.


"얼마 전에 티브이에 ***가 나와서 얘기하는데, 어렸을 때 학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써내라고 하면 보통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사람을 쓰잖아. 근데 ***는 꼭 자기 아버지 이름을 써냈대. 허허허"

"아빠, 나도 존경하는 인물 써내라고 하면 꼭 아빠라고 썼어."

"뭐?...."

내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아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담배 한 대 피고 오겠다며 일어서는 아빠의 눈에 반짝 물방울이 맺히는 것 같기도 했다.


평생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고 살면 남자의 자존감은 이렇게 벼랑 끝으로 떨어진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빠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진심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였다. 엄마가 부동산을 드나들며 집을 사 모을 때도, 한 순간에 재산을 다 말아먹고 절망에 빠졌을 때도 아빠는 늘 한결같이 성실하게 택시 운전을 했다. 어떤 날은 밤에 나가고, 어떤 날은 아침에 나가는 교대 근무 탓에 자는 모습을 볼 때가 많았지만, 저녁 시간에 퇴근하는 날이면 잊지 않고 까만 비닐봉지에 센베이 과자나 시장 통닭, 가끔은 귀한 바나나를 사 들고 와 자식들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아빠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편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할 말은 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곱게 택시 운전만 하지 않고, 택시 회사에 노조를 결성해 위원장 일을 했고, 돈을 돌려주지 못할 게 뻔한 친구에게 퇴직금을 몽땅 빌려주어 엄마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기도 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한 만큼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서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기복을 가끔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쏟아붓기도 했는데, 아빠는 그런 엄마의 잔소리와 신경질을 대부분 허허 웃으며 받아넘겼다. 엄마가 아빠를 묘사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속 터진다'였지만, 그런 속 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엄마같이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과 이날 이태껏 가정을 지키고 살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그런 아빠를 나는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느꼈다.


남자 친구의 엄마가 다짜고짜 집에 전화를 해서 우아하고 고상한 목소리로 "댁의 딸이 우리 아들을 만나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 앞으로 못 만나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날.


아빠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 Y를 만나지 말라고 혼을 내지도 않았다. 그냥 "Y라는 애 엄마라는 사람에게 전화 왔었다."라고 하며,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풀이 죽어 보였다. ‘우리 딸, 따뜻한 물 펑펑 나오는 집에서 살게 해줘야 할 텐데...'라고 말할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Y에게 물었다.

"어제 너희 엄마가 우리 집에 전화하셨었대."

"아! 진짜~ 왜 또 전화까지 했어."

"너희 엄마가 우리 아빠한테 무슨 말했는지 알아?"

"모르지...... 근데 얼마 전에 엄마가 뭘 물어보긴 했거든."

"뭐를?"

"너희 아빠 뭐 하시냐고."

"그래서?"

"택시 운전하신다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좀 하더라고. 아 짜증 나...”

"....."


더 이상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표정을 생각하면 굳이 내 귀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네 집은 뭐 얼마나 대단해서 그딴 소리를 하냐고 따지기도 뭐했다. Y의 엄마는 번화가 대로변 5층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초대형으로 내걸고 정신과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게 순전히 판타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뻔한 막장 드라마에서나 봄직한 일이 일어난다. 한창 공부해야 할 때이니 이성 교제를 하지 말라고 했으면 그러려니 하고 몰래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직업을 문제 삼으며 '그런 집안 자식과 어울리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너무 촌스럽고 신파스러운 사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놀라운 것은 Y 엄마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들이 지금 세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는 집의 평수와 자가인지 전세인지를 물어보며 친구를 사귀는 아이들이, 누구에게 그런 질문을 배웠겠는가?


장국영 닮은 Y와 더 이상 사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지만, 사랑하는 아빠에게 가해진 모욕감을 감수할 만큼 절절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엄마를 둔 것이 그 애 잘못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강력히 항의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Y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멀어져 갔다.


Y 엄마의 처사는 부당한 것이었다. 열일곱 살의 나는 그 부당함에 분노했지만, 아빠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또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아빠는 뭐하시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지나친 반감을 갖게 됐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그냥 회사 다니세요."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빠가 개인택시를 팔고, 식당을 운영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는데 이런저런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중에도 아빠의 택시운전 이력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자이언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택시 드라이버라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다니는 당당함이 부러워서이기도 하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아빠 이야기를 쓰는 것을 잠깐 망설였을 정도로 그 날의 수치스러운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리는데에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에 이렇게 길고 지리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사실을 Y 엄마는 알까?


내년이면 내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다. 여자 친구를 데려오면 그게 누가됐든 기쁘게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통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사실 고등학생쯤 되면 아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사생활에 자꾸 기웃거리지 않는 엄마일 것이다. 그러니 다 큰 아들에게는 관심을 끄고, 아빠에게 전화나 한 통 드려야겠다. 그리고, 곧 한국에 가면 다시한번 거나한 술자리를 마련해 아빠를 향한 존경심을  찐하게 한 판 표현해보리라.


(초콜릿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이 초콜릿 2편을 마무리지었네요. 풋풋하고 달달한 고교 시절 사랑이야기로 시작한 것 같은데.... 인생과 글은 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 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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