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colate을 정확히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 검색해보니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로 연결됐다. 초콜릿, 초콜렛, 초코렛, 초컬릿, 쪼꼬렛 등 사람마다 쓰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정확한 표현은 초콜릿이라고 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우리말 나들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다. 두루뭉술과 두리뭉실의 차이를 알려주고, 삼가하다의 바른 표현은 삼가다라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참으로 유익한 방송이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우리말 나들이'는 '국악 한마당'과 우열을 다툴 만큼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뭘 저렇게까지 정확히 말을 하고 살아야 해?' 하는 반감이 들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리말 나들이를 마주치면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짜증마저 실렸던 기억이다.
그랬던 내가 초콜릿 한 글자를 제대로 쓰기 위해 국립 국어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외래어 표기법을 찾아보게 될 줄이야. 나이가 들면 사람이 쪼잔해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초콜릿을 아주 좋아한다. 엠앤엠즈나 페레로 로쉐처럼 잔재주와 겉멋을 부린 초콜릿은 잘 먹지 않고, 순수한 카카오의 맛을 최대치로 느낄 수 있는 다크 초콜릿만이 진정한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호주에 살아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품질 좋은 95% 다크 초콜릿을 저렴한 가격에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초콜릿 세 조각에 들어있는 설탕 함유량이 0.5g 밖에 되지 않아서 (같은 양의 밀크 초콜릿에는 10g~14g의 설탕이 들어있다.)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고, 한 조각만 먹어도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각성 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이 다크 초콜릿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눈에 보이면 다 먹어치우는 아이들 몰래 감추어 둘 필요가 없어서, 세일할 때 여러 개 사두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오늘 아침엔 6시부터 아들과 챔피언스 리그를 보느라 도시락을 싸는 시간이 분주해져서, 커피를 내리는 대신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도 쌉쌀하고 고소한 맛이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초콜릿 맛의 여운을 음미하며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문득 고등학생 시절 매일 아침 책상 서랍에 초콜릿을 넣어주던 남학생 Y가 떠올랐다. 그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을 다녔다. 특히,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는 당시엔 흔치 않던 남녀 합반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고, 교복 자율화 정책을 고수했으며, 심지어 두발 단속도 하지 않았다. 학교는 전인교육 시범학교라는 기치를 내 걸었지만, 스스로 노예 근성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학교 배정 결과를 받고 '대학 가긴 다 글렀다.'며 한숨을 쉬어댔다.
첫 등교일, 고등학교 1학년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각각 남중, 여중을 다니다 진학한 터라 청춘 남녀가 함께 모인 교실에는 미친듯한 긴장감과 설렘이 감돌았다. 아직 사춘기가 덜 끝난 아이들에게 자존감이란 없다. 우린 오직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남학생들은 다들 서로에게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인상을 썼고, 여자 아이들은 동향 파악을 위해 새침한 표정으로 곁눈질을 해 댔다.
나는 이지적이고 도도한 여학생이라는 첫인상을 주기 위해 설날 용돈으로 장만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조용히 앉아 책을 읽었다. 하지만, 기껏 연출한 도도한 이미지는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한 같은 중학교 출신 여자애가 옆반에서 놀러 와 "오올, 안경 했네. 나도 한 번 써 보자."라고 주책을 부리는 바람에, 렌즈에 도수가 없다는 사실을 들켜버린 것이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쓰고 있던 안경을 확 낚아채간 그녀는 전원주 여사 저리 가라 크게 웃으며 도수도 없는 걸 왜 썼냐고 동네방네 떠들어 댔고, 나는 졸지에 나나 무스꾸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나나 무스꾸리는 1990년 초 뿔테 안경의 선풍적인 유행을 주도한 프랑스의 대표 샹송가수다.)
다행히 절망스러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긴장과 가식으로 얼룩졌던 교실에 진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 여자가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자 아이들은 하나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교실에서 생라면을 부셔 먹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앞 머리에 구르프를 말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 여학생의 수도 속속 늘어갔다.
Y가 내 책상 서랍에 초콜릿을 넣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작은 가나 초콜릿이 20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아이는 500원이나 하는 큰 사이즈의 초콜릿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상에 넣어놨다. 어떤 날은 그 보다 비싼 1,000원짜리 허쉬 초콜릿이 들어있기도 했다. 초콜릿을 자주 사 먹을 형편이 안 되었던 나에게 매일 아침 보내진 익명의 선물은 감동 그 이상이었다. 초콜릿에 영혼을 팔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정성과 재력을 쏟아붓는 남자라면 (웬만하면) 사귀어 보리라 마음먹기에 충분했다.
입이 싼 친구들 덕분에 초콜릿을 넣어놓은 남학생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그의 정체를 안 순간 나의 행복감은 극에 달했다. 등교 첫날부터 가장 많은 여학생들의 곁눈질을 받고, 심지어 옆 반에서까지 몰려와 몰래 훔쳐보게 만들던 Y. 영웅본색 열풍이 전국을 휩쓸던 시절, 장국영이라는 그의 별명에 그 누구도 토를 탈지 않던 미모의 주인공 Y가 나에게 반했다니. 나에게 매일 초콜릿을 선물한 사람이 그였다니.
Y와 공식적인 커플이 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우쭐했다. 자존감이 강해지니 거추장스러운 뿔테 안경도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매일 학교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밤마다 긴 시간 전화기를 붙들고 엄마 몰래 통화를 했다. 그러다 서로가 보고 싶으면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 늦은 밤까지 함께 그네를 타며 시간을 보냈다. 호기심에 시작한 뽀뽀가 키스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신체접촉이 과해지지는 않았다. 한창 정열이 불타오르던 시절이었건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순진하고 절제력 있는 청소년들이 아니었나 싶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며 부랴부랴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아빠가 기분이 잔뜩 상한 표정으로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물으셨다. 긴 말이 오가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약간 짜증스럽게 대답하는 게 상책이다. "친구 좀 만났지. 왜?" 평상시의 아빠라면 사춘기 자녀와는 길게 얘기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거나, "일찍 일찍 좀 다녀라. 지금이 몇 시냐?"하고 대화를 황급히 마무리 지었을 텐데 그 날은 뭔가 다른 낌새가 느껴졌다.
"Y라는 애 만나고 오는 거냐? 걔 엄마라는 사람한테 전화 왔다."
(아, 또 길어졌네요. 시간이 벌써... 나중에 이어서 쓸게요.)
- 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