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 시간, 나날은 오래가지 않는다. 신이 우리를 행복하도록 가만 내 버려두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꾸 불행 쪽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나쁜 버릇 때문에 그렇다.
세상을 빤히 쳐다보고 관찰하던 아주 어린 나이엔 평정심(균형 잡힌 시선으로 고요히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게 있었다. 배고프거나 춥거나 공포스러우면 울고, 안전함을 느끼면 금세 웃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저 사람은 왜 그럴까? 또 그러면 어떡하지? 후회하고 염려하느라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다.”(성경책 말씀)
자라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평정심을 잃는다. 크고 작은 경쟁의 과정을 통해 매사에 조급하고 불안해지며 상황을 부정적으로 확대 해석하기 시작한다.
식당 주인이 불친절한 것도, 아이가 어쩌다 한 번 문을 쾅 닫은 것도, 남편 또는 아내가 내 말에 대꾸하지 않는 것도, 옆 차 운전자가 운전을 고약하게 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무시 또는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사소한 일로 기분이 상하고, 좋았던 기분을 망치고, 심지어는 싸움을 한다. 내가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 확신하며 일을 크게 만든다.
상대방의 무례와 실수, 나쁜 습성들을 그저 관찰하고 바라보는데서 끝내면, 남의 문제가 내 불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저렇구나.' '무슨 일인지 몰라도 기분이 나쁜가 보구나.' '고약한 습관을 가졌구나.'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당신이 매사에 짜증을 내고 쉽게 화가 난다면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상대방에게 공격당했다고 분해하고, 평화롭던 하루를 저 사람 때문에 망쳤어라고 탓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 습관화 된 것이다.
잃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건강, 웃음, 따뜻한 집, 냉장고에 꽉 찬 계란과 신선한 과일 같은 것들. 가진 것에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누릴 수 있다면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사는 것도 불가능한 꿈은 아닐 텐데. 슬프게도 우리는 자꾸만 내 안의 행복을 외면하고 불행을 끌어들인다. 전쟁을 겪고 나서야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평화를 얻으면 또다시 투덜대기 시작한다. 시지푸스의 돌처럼 고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사는 게 지긋지긋한 게
남이 아닌 모두 내 탓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삶은 크게 방향을 틀 것이다.
행복할 이유는 어디에나 있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도, 병석에 누워 똥 수발시키는 것보다 낫네 생각하고 (법륜스님 말씀), 먹을 것이 없지만, 깨끗한 물이 있어서 감사하다. 차가 부서졌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 아이가 핸드폰을 하루 4시간씩 보지만, 건강한 눈이 있어서 감사하다. 여행을 못 가지만 나 자신과 더 친해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자. 내 우주의 주파수를 감사에 맞추면 삶이 저절로 행복해진다.
20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