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지금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된 큰 아들이 세 살 남짓할 때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다.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다닐 목수 학교의 1년 치 등록금만 떨렁 들고 유학 겸 이민을 간 지 1년 차에 접어드는 때였다.
학교를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남편이 벌어오는 돈과 작은 교민 신문사에서 일하던 내 급여를 합치면 세금을 공제하고 주당 900불 정도를 벌던 시절이었다. 그중 집 렌트비 400불, 풀타임으로 보내던 어린이집 원비 250불을 내고 나면 250불 정도를 일주일 생활비로 쓸 수 있었다. 식비는 물론 핸드폰비와 각종 공과금도 그 안에서 해결해야 했으니 외식은커녕 마트에서 장 볼 때도 맛이나 품질이 아닌 가장 저렴한 것으로만 골라 담아야 했던 그야말로 긴축 재정의 시기였다.
그래도, 고기와 우유, 계란 등 기본적인 식재료가 저렴하니 외식을 하거나 한국 마트를 자주 가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살만했다. 박스 와인을 마시고, 중국 마트에서 산 배추로 김치를 담그고, 지인이 낚시로 잡은 생선을 직접 회로 떠서 먹기도 하며 크게 돈 들이지 않고 삶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나갔다. 퇴근 후나 주말엔 공원과 도서관 바닷가 등을 산책하거나 돗자리를 펴 놓고 대부분의 여가를 보냈다. 덕분에 살림은 빠듯하지만 생활은 여유로웠다. 다들 가족 단위로 움직이고 생활하는 문화다 보니 남편과의 관계도 순조로웠다.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뉴질랜드에선 목조 주택을 짓는 사람을 빌더라고 한다. 일주일에 두 번 빌더 학교를 다니고 나머지 요일은 현장에서 일을 하며 실무를 익히는데, 당시 남편이 일하던 현장엔 결혼하지 않은 싱글들이 많았다. 일이 끝나면 해가 지기 전에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유부남들과는 달리 이들은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맥주를 마시거나,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야간 골프 내기를 하고, 주말에는 클럽을 돌며 파티를 했다.
남편은 이들과 어울리는 횟수를 점점 늘려갔다. 현지인들과 친하게 지내면 영어 연습도 되고 그들이 특별히 몹쓸 짓을 하며 노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 모여 맥주를 마셨는데, 곰발바닥 게임을 알려주자, 깔깔대며 두 시간이 넘게 곰발바닥 소발바닥을 한 일이 있다. (한국의 전통 게임문화는 그때부터 세계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가!) 암튼, 그 모습만 봐도 그들이 순박하다고 믿었기에 남편이 늦게까지 동료들과 어울리다 들어와도 탈선을 우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늘 걱정은 돈을 너무 많이 쓰면 어쩌나? 기분파인 남편이 바에서 맥주를 한 잔씩 돌리면 어쩌나? 이번 주에 쌀 사야 하는데, 술 먹고 택시 타고 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된다더니 걱정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다. 그날따라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돌아오던 남편이 새벽 3시에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 것이다.
"나... 너무 취해서.... 운전 못 하겠어. 차 세워두고 택시 타고 갈게..."
"거기가 어딘데?"
"마누카우"
"뭐? 안돼! 차라리 길에서 자고 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심성이 착한 나는 차마 그렇게는 말 못 하고 자는 아이를 들쳐 안고 길을 나섰다. 오클랜드 남부인 마누카우에서 다리 건너 북부인 우리 동네까지 오려면 못 해도 택시비가 200불은 나올 텐데. 일주일 생활비를 탕진하도록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카시트에 아이를 태워 남편이 있다던 마누카우 쇼핑몰 맥도널드 앞으로 향하는 길. 코에서는 끊임없이 용가리의 불길 같은 콧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행여 남편이 택시를 타고 올까 봐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하며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
마음을 추스르며 약 40여 분 만에 도착한 현장에서 마주한 장면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술이 매우 약하고, 잘 마시지도 못 하는 남편이 그렇게 개가 된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맥도널드 앞이라고 해서 햄버거 집에서 해장 중인가 했는데 (뉴질랜드 사람들은 숙취를 햄버거나 피자로 푼다.), 정확히 말하면 맥도널드 근처 나이트클럽. 그 앞에 세워진 누군가의 빨간 승용차 본네트 위에서 그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기어가고 있었다. 선팅이 되지 않은 차 안에서는 두 남녀가 거의 헐벗은 자세로 엉켜있고, 남편은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허리를 돌려 교태를 부리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헤이! 마이 와이프!" 하며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분노의 에너지가 솟아올라, 이 인간의 멱살을 한손으로 잡고 패대기를 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뒷자리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이성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남편을 차에 태워 앉히고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억누르느라 크게 호흡을 했다. 감정을 통제하려는 나의 큰 호흡이 남편에게는 자신에 대한 환멸의 한숨으로 느껴졌나 보다. 고속도로 진입로에 신호대기 중인 틈을 타 남편이 기습적으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 차라리 나가 뒈져라!' 하고 집으로 와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차를 돌렸다.
택시 타고 올까 봐.

광활한 쇼핑몰 주차장을 달리는 남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미친개 같았다. 갈지자로 이리저리 뛰며 "여기까지 온 게 뭐 벼슬이야? 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어!"라는 둥 되도 않는 소리를 외쳐댔다. 차라리 차로 툭 쳐 버릴까? 딱 넘어질 만큼만 가볍게 쳐서 쓰러트린 후에 차에 실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찰나, 뒷 좌석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깼다. 어두운 밤, 광장에서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아빠와 그 뒤를 쫓고 있는 엄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미러 속 아이의 놀란 표정은 이내 울먹거림으로 변했다.
"서진아, 괜찮아. 엄마랑 아빠랑 잡기 놀이하는 거야. 아빠 엄청 빨리 달리지? 차 보다 더 빠르네! 어디 한번 우리가 따라잡아 볼까? 유후 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주연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다. 네 살 아들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 잡혀간 유태인 아빠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숨바꼭질 게임이라고 말하며 아들이 그 상황을 공포가 아닌 흥미로운 일로 받아들이도록 애쓰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총살을 당하러 나치에게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숨어서 구멍으로 보고 있는 아들에게 '에이! 나는 아웃이야. 너는 끝까지 잘 숨어서 꼭 1등을 해야 해!'라는 사인을 보내며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아들을 웃게 만든다.
그날 밤. 신나는 표정과 "유후 우~"하는 소리로 서진이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며 나는 늘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린다.
잠에서 깬 아들 덕분에 남편은 아내의 차에 치어 중상을 입는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체력이 다할 때까지 뛰다가 제 풀에 지쳐 주저앉았고 나는 이를 악물고 다가가 "내가 미안해. 힘들텐데 집에가서 푹 자자." 하며 관세음보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어딘지 석연치 않음을 간파한 아들이 겁에 질리지 않게 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에미의 빛나는 모성애를 이 노무 자식이 언젠가는 알아줄까?
다음 날 잠에서 깬 남편은 이 모든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주취상태의 범죄 행위는 감경 사유가 된다고 하지만, 나의 분노 수치는 몇 배로 치솟았다. 어떻게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지? 그렇게 죽어라 달려놓고 어떻게 술이 안 깰 수가 있지? 솔직히 말해! 당신은 이 사건으로 남은 여생을 들들 볶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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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억울하고 화나던 순간들도 비 온 후 먹구름처럼 산산이 흝어져 많은 추억 중에 하나가 된다. 그 후로도 수 차례 궂은날이 있었지만 지나고나면 또 다시 맑은 하늘이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냥저냥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오늘 유튜브에서 우연히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그들의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모처럼 추억을 되새겨본다. 남편의 기억을 되돌려보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