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 1
남편과 나는 20대에 클럽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내가 사장이었고, 남편은 밴드 보컬이자 서빙 알바생이었다. 술집 사장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나는 거의 매일 근무 중에 술을 마셨고, 장사가 끝난 후에도 알바생들과 어울려 포장마차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술이 센 편이라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해 실수를 저지를 뻔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뒤치다꺼리를 해 주던 그가 지금의 내 남편이다.
남편은 술을 못 마신다. 선천적으로 해독능력이 부족해 맥주 한 잔만 마셔도 만취 상태가 된다. 그런 사람이 술자리에서 누가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고 끝까지 남는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던 시절. 술친구가 필요할 때 연락하면 언제나 달려와주던 고마운 사람. 술도 안 마시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내 말을 들어주고, 호탕한 웃음으로 기분을 밝게 해 주던 사람. 기쁨도 괴로움도 함께 해 주는 그와 나는 연인이 되었고,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혼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나는 더 이상 그 남자의 친구가 아니었다. 언제나 달려가고 끝까지 남는 그 남자에게 위로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하염없이 이를 갈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기다리는 자의 입장이 되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나도 나가서 밤을 새우고 놀 수 있었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모든 드라마는 아이가 세상에 온 후 시작되었다. 24시간 깨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며 도통 깊은 잠에 빠져들지 않는 아이. 수유 브라의 한쪽 훅을 늘 풀어놓고 잠이 부족한 상태로 살다 보면 자존감도 이해심도 몽땅 사라져 버린다. 남편은 왜 이 시간에 곁에 없는가. 나의 삶은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했는데 왜 이 남자의 삶은 그대로인가.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내가 오늘은 너를 꼭 죽이고야 말리라.
마누라의 살기를 느꼈는지 남편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꼭 타오르던 분노가 재가 되어 체념과 우울감에 빠져있을 무렵 집에 들어온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배경 삼아 젖을 물리며 아무것도 모르고 나에게 매달려있는 아이의 천사 같은 눈과 입과 코를 바라보던 순간. 그 복잡했던 심경은 참 오래도록 남아서 나를 괴롭혀왔다. 내가 나를 결혼의 희생자로 포지셔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다. 남편과 함께 아이를 목욕시키며 까르르 웃던 순간. 유모차를 밀며 세 식구가 함께 한강 둔치를 걷던 순간. 아이가 처음으로 몸을 뒤집고, 기고, 책상다리를 잡고 일어설 때 ‘와!!! 얘 좀 봐.’하던 가슴 벅찬 순간. 사진으로 남겨진 순간의 기억들은 항상 웃는 모습이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왜 나는 그 모든 행복을 잊고, 원망으로 가득 차 분노하던 순간의 기억들만 붙잡고 살아온 것일까?
그 후로 오랜 세월, 나는 남편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드는 습관을 이어나갔다.
멜로드라마 속 비련의 여인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 밤. 웅크리고 앉아 오만가지 상상을 한다. 그는 분명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게 벌써 두 시간 전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되는 대로 내뱉은 남편의 임기응변에 또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
모든 친구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남아있는 게 의리인 줄 아는 인간. 한심하다. 어쩌면, 옛날에 자기를 좋아했다던 여자 동창이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건 아닐까? 예전엔 별로였다고 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마음이 끌린 건가? 옛사랑과 만나는 자리니 그 여자는 잔뜩 꾸미고 나왔겠지? 머리를 예쁘게 세팅하고, 향수도 뿌렸겠지? 남편은 왜 인공적인 향기를 좋아하는 걸까? 머리 아프게. 단순한 인간. 그 여우 같은 년이 엄청 취한 척하면서 집에 바래다 달라고 한 건 아닐까? 택시 안에서 취한 척하며 슬쩍 머리를 기대고, 그러다가 키스를? 아… 열받아. 도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전화기를 들었다가 화가 치밀어 (그래도 한 줄기 이성은 남아 깨지지 않도록 침대 위에) 온 힘을 다해 집어던진다. 하지만 울화가 치미는 감정이 한 번 새어 나오기 시작하니, 수압을 못 견디는 수도꼭지의 연결 부위처럼 치지직하고 분노의 물살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자존심이고 뭐고 소용없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통화버튼을 누른다. 벨이 울린다. 벨 소리가 대여섯 번 울리다가 뚝 끊긴다. 어쭈? 끊은 거야?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른다. 또 끊긴다.
이쯤 되면 여자 동창이랑 함께 있는 게 분명하다. 내 전화를 일부러 끄는 걸 그 여자도 알고 있을까? 그냥 받으라고 하며 깔깔대고 웃는 건 아닐까? 아,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남편은 내가 늦게 와도 별로 기다리지 않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안달복달하는 걸까? 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나한테 애정이 없어진 것 같다. 나는 애정이 남아 있나? 모르겠다. 설레는 감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불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던 말던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난번에 새벽 두 시에 들어왔는데 천하태평으로 잠을 자고 있지. 우리는 도대체 왜 같이 사는 걸까? 아이 때문에? 이렇게 맨날 싸우고 냉랭하게 살 거면 차라리 헤어지는 게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닐까? 아이는 꼭 내가 키우고 싶다. 재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남자가 내 아이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지금 남편보다 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분노와 근심으로 점철된 마음은 달리고 달려 한 편의 드라마를 쓴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집에 들어온 남편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평상시의 부인이 아니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세상에 버림받은 채 홀로 아이를 돌보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그 상황을 알리 없는 남편은 어리둥절하다. 좀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잘 못을 했나. 약속한 시간보다 한두 시간 늦은 것이 저렇게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일인가? 대성통곡을 하며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듯 신세 한탄을 할 일인가?
갑자기 남편도 억울해진다.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할 만큼 잘 못한 거야? 나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당신이 뭘 하는데? 조금이라도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봐!” 억울함은 분노로, 분노는 원망으로, 원망은 비난으로 이어지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
부부의 세계에 발을 담근 지 어언 20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자면 이렇다.
사람 좋아하는 남편이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 두 시에 귀가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잘 못은 아내에게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만큼 단호하지 못했던 것. 그뿐이다. 그 상황을 내가 짐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도 있지. 실컷 놀게 하자. 다음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내가 나가서 놀아야지.’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는 대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괴로움을 자아냈다.
나는 늘 원인 제공자를 탓했다. “당신이 그러지만 않았어도!” 라며 내 불행을 남편 탓으로 돌렸다. 당신이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니 상처받은 내 마음을 위안해 줄 사람은 당신이라고 말했다. 사죄와 위안은 커녕 적반하장으로 분노하는 남편에게 뻔뻔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상황을 바라보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언제나 괴로움의 길을 택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온 남편에게 감사하는 대신, 악을 쓰며 나가라고 외쳐대던 것도 나였고, 진짜 나가버린 남편이 떠난 자리에서 목놓아 울던 서러움도 다 내가 자아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