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남편만 그런 건 아니에요.

보통 남편의 아내로 사는 법. 프롤로그

by 레이지마마

이혼을 요구할 만한 결정적인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거 아닌 일이 발단이 되어 늘 같은 주제로 싸우다 보면, 이 사람과 나는 애초부터 잘 못 된 인연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더 늦기 전에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대로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랑 잘 맞는 남자를 만나서 다시 여자로 사랑받고 싶다.


남편에 대한 원망을 동력으로 새로운 삶을 설계하다 보면, 늘 멈칫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아이들은 어쩌나? 아이들에겐 아빠가 필요한데. 대충 자리를 메꿔줄 아빠가 아니라, 자식이라면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진짜 아빠. 내 아이를 나 만큼 사랑하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아들을 목마 태우고 환하게 웃던 남편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른다. 순간 눈물이 차 오르고,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온다. 흥! 하지만 방금 전 그 남자는 어땠는가? 그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아이들과 나만 남겨두고 문을 쾅 닫고 나가지 않았는가? 흥! 흥! 흥! 아빠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없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맨날 싸우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 행복한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렇다면, 남편과 헤어진 후의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 혼자 씩씩하게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다하며, 여전히 아이들에게 웃어줄 수 있을까? 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나는 또 한 번 새 출발의 의지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만다. 그렇게까지 남편이 큰 잘 못을 저지른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불같은 사랑은 아니더라도, 밥 먹을 때 웃으며 대화하는 부부가 되고 싶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노력하지 않는 걸까? 왜 맨날 나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걸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법륜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듣는다. 살기 위해, 또 한 번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내 남편은 괜찮은 남자다. 알코올 중독이 아닌 것만 해도 어디인가? 도박을 하지 않는 것 만해도 어디인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걸 100% 장담해?) 그렇다면, 애를 낳아 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속 모르는 자들은 묻는다. (주로 미혼들이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해?”

"그럼 어떻게? 결혼을 해 버렸는데, 아이도 낳아 버렸는데, 살아야지. 기왕 살 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지! "





이 글에 공감하신다면, 당신은 보통의 남편과 보통의 결혼 생활을 하고 계시는 보통의 기혼녀다. 알코올 중독, 도박중독, 폭력과 사기 등 확실한 이혼 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애매하게 속 썩이는 남편. 나는 이들을 보통 남편이라 부르겠다. 당신은 아마 자기 남편이 평균 이하라고 생각해 왔을지 모른다. 평균 이하를 넘어 최악이라고 주장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도 같이 사는 게 이혼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 아닌가?


다른 남편들도 정말 내 남편과 같은 지 긴가민가하시는 분들을 위해, 보통 남편들의 대표적인 특징을 열거해보겠다. 볼펜을 들고 몇 개쯤 해당되는지 체크해보셔도 좋다.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해 놓은 일에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한다.

아이들 좀 봐달라고 하면 핸드폰을 쥐어준 채 자고 있다.

피곤해 죽겠다면서 스크린 골프는 열심히 치러 다닌다.

아이에게 툭하면 버럭버럭 화를 낸다. 심지어, 아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협박한다.

오은영 박사의 영상 링크를 보내줘도 보지 않는다.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쉰다.

친구 부인들에겐 그렇게 살가울 수 없으면서, 내가 모처럼 차려입고 나서도 소 닭 보듯 한다. 심지어 꾸물거린다고 짜증을 낸다.

상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바람을 피운 전력이 있다.

별거 아닌 일로 삐지고, 싸우면 먼저 화해하는 법이 없다.

내가 화를 내면 그 핑계로 집을 나가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연락이 두절된다.

자기 목소리 큰 줄은 모르고 싸울 때마다 내 눈빛이 살벌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는 화병이 날 지경인데,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밥 먹을 때 다양한 소리를 낸다.

잘 때 다양한 소리를 낸다.

안 씻고 잔다.

소파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소파에서 먹고 잔다.

시댁에 살갑게 해 주길 은근히 바라면서 장인 장모님께는 전화 한 통 먼저 하는 법이 없다.

밤 12시 이전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

내가 원할 때는 늘 등을 돌리고 자다가, 새벽 두 시에 술 냄새를 풍기며 달려든다.

나 몰래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다.

나 몰래 빚을 진다.

집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다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살갑게 군다.

남들 앞에서는 딴 사람이 된다.

남들에겐 척척 밥도 잘 사주면서, 나랑 외식하는 건 아까워한다.

담배 피우는 거 뻔히 아는데, 몰래 숨어서 핀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서 안 들어온다.

곤란한 얘기는 애들 통해서 한다. ‘엄마한테, 아빠 피곤해서 조금만 더 잔다고 해.’

사소한 일에 집착한다. 예를 들면, 네비 안 켜고 운전하기.

닭다리를 놓고 아이와 신경전을 벌인다.

장담하건대 대부분의 남편은 위에 열거한 내용의 50% 이상에 해당될 것이다. 전부 다에 체크하신 분도 계실 것이다. 당신의 남편이 50% 이하에 해당된다면 축복받은 삶이라 생각하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매일 저녁 남편의 발을 씻겨주시라. 50% 이상, 전부 다에 해당된다고 할지라도 헤어지기보다 마음을 고쳐먹고 잘 살아 보실 것을 추천드린다. 이 정도는 보통 남편들의 특징인 만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비슷한 사람을 만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거의 전부 다에 해당하던 한국의 보통 남편과 (예의상 '거의'라는 단어를 붙여줬지만, '전부'에 방점을 찍고 읽으셔도 무방함) 치열하게 살아온 나는 곧 결혼 20주년을 맞는다. 우리 부부는 결혼과 동시에 사업도 함께 했기에 대부분의 날들을 24시간 붙어서 지냈다. 녹록지 않은 살림을 꾸리며,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상황은 철천지 원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지금 나는 남편과 매우 사이가 좋고, 매일매일 행복하다. 머리가 희끗해진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쓰지 않을뿐더러, 포옹이나 뽀뽀 같은 스킨십도 자주 한다.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음이 힘들 때 시시콜콜한 감정을 터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가끔 부부싸움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남편을 내 행복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행복은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2023년 2월 22일. 결혼 20주년을 기념하여 헤어지지 않고 살아온 아내의 자격으로 그간의 경험과 깨달음을 글로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확 헤어질 수도 없을 만큼 애매하게 속을 썩이는 이 시대 보통의 남편과 근근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과거의 나'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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