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20대 초반, 대학 동기의 이웃이라는 나보다 서너 살 많았을 남자의 질문이었다. 내 동기는 엄청나게 바쁘게 사는 친구였다. 성취하고자 하는 꿈도 매우 크고 화려했으며, 전공, 외국어, 알바, 연애까지 모두 잘 해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이웃 남자도 비슷한 부류였다. 자신의 꿈과 그걸 이루기 위해 밟고 있는 과정들을 듣노라니 흡사 한 권의 자기 계발서가 사람이 되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브리핑이 끝나자 그는 내게도 흥미를 내비쳤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것에 확신이 없는 내가(몰랐다. 알았어도 인정하기 어려운, 너무 소수자 그에겐 무기력한 젊음으로 비춰진 것 같다. 'UN에서 인턴 하기' 혹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하기' 같은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랑 되게 다르네요..." 말을 줄이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떠오른다. 별 것 아닌 것 같던 이 일화가 그 후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엄청나게 듣게 될 잔소리의 원형이었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취업 후엔 연봉협상이나 이직, 애인의 스팩 같은 화제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었고, 30대에 들어서서는 결혼과 육아 앞에서 작아져야 했다. 일률적인 가치를 좇는 자기 계발에 관한 화제가 넘쳐나는 시대를 힘겹게 헤쳐온? 나는 이제야 대답할 말을 찾은 것 같다. 진정한 자기 계발은 직업의 성취나 결혼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매일의 정교하고 단단한 일상이야말로 자기 계발의 조건이자 완성이다.
요즘 일상이 퍽 마음에 든다.
평일엔 저녁 방송 전까지 온전한 내 시간. 최소한 3월까지는 낮에 진행하는 책 강의도 없다. 오전 9시쯤 일어나 그 날 날씨나 몸 컨디션에 따라 차를 골라 마신 다음 간소한 브런치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파스타를 중심으로 국물이 당기는 날엔 떡국, 간혹 고기와 채소구이, 빵 집에 다녀온 다음 날이라면 거친 빵에 달걀과 치즈를 올려 한 끼를 차리기도 한다.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한 그릇에 담기는 요리여야 한다는 것. 반찬을 주르륵 내놓고 이것저것 맛보고 치우는 한국식 상차림도 훌륭하지만 내 생활방식과 맞지 않는다. 가장 자주 해 먹는 건 파스타인데 내겐 이만큼 사랑스러운 메뉴도 없다. 우선, 만들기 쉽고 어떤 재료든 대부분 가능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가 가능해 질리지도 않는다.
보통날의 파스타들
만들고 먹고 치우는 데 30분이면 족한 브런치를 끝내면 망설이는 마음이 자라기 전에 자외선 차단제부터 바르고 곧장 숲으로 간다. 내가 사는 아파트 출입구부터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숲으로 향한 계단이 있다. 얕지만 꽤 넓은 숲이라 요리조리 헤매다 하루 한번 걷기 알맞은 50분 코스를 만들었다. 타박타박 흙길부터 소나무가 폭 에워싼 음지, 탁 트인 하늘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젖혀지는 양지, 숨이 차 오르는 가벼운 오르막이 있다. 새들이 늘 시끄럽고 종종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도 볼 수 있다. 마지막 오르막을 거의 오를 때쯤 가장 기분이 고조된다. 걷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알면서도 매번, '오늘만 오르막을 건너뛸까?' 하는 소심한 유혹에 시달리기 때문. 하루 단 50분이지만 나와 깊이 만나 내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하는 질 높은 시간이다.
다양한 숲의 표정들, 대론 다정하고 때론 외롭거나 무자비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숲에서 올려다보면 언제나 멋진 하늘
산책 후엔 천천히 샤워를 하는데 샤워 후엔 늘 조금 노곤해진다. 그 기분이 싫지 않아 깜빡 졸기도 하지만 보통은 바로 카페로 가서 그날 방송 준비를 하거나 개인작업을 한다. 자체 휴가인 날엔 저녁까지 책만 보기도. 그런 날은 다이어리에 커다란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는다.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그때 고요함 속에서 떠오른 강렬한 영감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기록, 일상이 정교 해지는 기술
이렇게 단순한 하루하루가 졸졸졸 흘러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열렬한 활동이 있다면 내 삶을 기록하는 일이다. 몇 년째 사용 중인 몰스킨 다이어리에 일상의 순간들을 꼼꼼히 기록한다. 물론 콘텐츠는 제한적이며 반복적이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하루를 흔하고 천하다 투정하며 버리지 않고 아끼고 기억하는 동안 일상의 기술이 정교해지고 잔잔한 근육이 붙는다. 모든 순간이 새롭게 조명된다.
일상이 단순해지면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잘 보이니 마음을 놓칠 일이 없다. 자연히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게 진정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만한 것들을 고민하고 그 밖의 것들엔 덜 신경 쓴다. 자기 계발이란 다수가 추종하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을 찾고 걸어가는 힘을 기르는 것,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기 계발의 의미다.
단단한 일상에서 꽃이 피어난다.
일상이라는 기반에 자기만의 씨앗을 심고 가꾸면 어느 날 씨앗이 머금은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날도 올 것이다. 나는 그 꽃이 무엇인지 모르며 선택할 수도 없다. 그저 오늘도 하루라는 흙을 고르고 그 위에 정성껏 물을 준다. 언젠가 피어날 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아, 20대 초반 그 남자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마음 편히 살고 싶어요.'였다. 미숙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저 대답 안에는 나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그 이유에 부합하는 일을 하면서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만족감도 성취해야 하니 마음 편히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그도 아는 나이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