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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Jan 05. 2019

영화 [컨택트]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지금 이순간을 살라.

이 영화에서 내 눈길을 끄는 건 미지의 외계인이나 그들이 가진 거대한 지혜,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신기한 언어체계가 아니었다. 꿈인지 회상인지 모르게 한 번씩 등장하는 주인공 루이즈와 어린 딸 한나의 평범한 한때였다. 호숫가에서의 산책, 한나가 루이즈를 위해 그려준 그림, 햇살 아래를 달리며 까르륵 웃는 한나와 그녀의 손을 잡는 루이즈... 유독 두 사람 장면은 색감이나 배경음악이 좀 슬프게 연출된 면이 있는데 영화를 다 본 후엔 이유를 알 수 있다.


루이즈와 딸 Hannah, 한나의 이름은 시작과 끝이 없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주요 내용이 나옵니다. 앞으로 영화 보실 분은 그냥 지나가 주세요)


어느 날 외계에서 미지의 적 혹은 손님(헵타포드)이 지구 곳곳에 찾아온다. 각 나라는 외계인의 등장에 서로 다른 대응방법을 주장하며 날을 세운다. 외계인이 아닌 지구인끼리 먼저 전쟁이 날 판. 언어학자 루이즈는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위해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그들을 만나러 간다. 불려 간 곳엔 이안이라는 물리학자가 동료로 먼저 와 있었다.(훗날 이안은 루이즈의 남편이자 딸의 아버지가 된다.)  루이즈는 헵타포드와 접촉하며 그들의 언어체계를 익혀간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우리 언어와 달리 시작과 끝이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가 '나는 1980년에 태어났고 성장해 사랑스러운 자식을 낳았으며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헵타포드에겐 이 모든 사실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3천 년 뒤 일어날 일을 알고 지구에 찾아온 것으로 설정된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는 시작과 끝, 시제의 구분이 필수적인 말이나 문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영화에선 동그란 원 모양의 먹물을 내뿜는 것처럼 표현된다.


헵타포드의 언어, 문자가 아니다


여기서 영화는 가설을 하나 끌어오는데 '언어체계가  사고와 의식체계를 지배한다'는 것.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혀 갈수록 루이즈는 과거, 현재, 미래까지 통합해 인식하는 그들의 사고체계까지 습득한다. 영화 중간중간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던 딸과의 따뜻한 한때, 그리고 병에 걸린 딸의 죽음은 회상이나 악몽이 아니었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게 된 루이즈의 진화된 인식체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루이즈는 이 능력을 활용해 지구에서 일어난 위기, 동서양 주요국 간의 분쟁과 마찰을 해결한다. (이 과정은 여기서 다루려는 내용이 아니니 생략하기로.) 헵타포드는 루이즈를 통해 이 선물을 주고자 지구에 온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성취하는 것은 결국 일상뿐이다.  


위기가 지나갔고, 루이즈에게 남은 건 단순히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헵타포드가 준 선물은 예지력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같은 고통이 반복되더라도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 사상을 이야기했는데, 더불어 나는 대단히 동양사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헵타포드적인 사고체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건 원래 현재뿐이다. 현재가 지나간 것이 과거이고 미래란 아직 당도하지 않은 현재일 뿐. 현재는 대부분 일상으로 이뤄진다. 우리가 살아가고 성취하는 것은 결국 일상뿐이다. 더 쪼개면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남는다.


때로 어떤 순간은 영원으로 남는다.


루이즈는 이안과의 사이에서 낳을 미래의 딸이 죽는다는 걸 알지만 이안의 프러포즈를 저항 없이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인다. 루이즈는 과연 딸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선택한 걸까? 다시 영화 속 루이즈와 딸의 일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영화 초반부터 루이즈가 뭔가 슬픈 일을 겪(었)으리라는 사실을 느낌으로 알고 있다. 영화 말미 그것이 딸을 잃는 슬픔이란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돌아보면 딸과의 시간엔 기쁨도 많았다. 딸을 잃는 슬픔 안에 딸로 인한 기쁨이 포함되는 게 아니라 딸이라는 존재의 축복 안에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철저히 현재에 존재하고 현재만을 살라는 일상의 명령과도 같다.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존재한다. 어떤 만남이든 그 끝은 이별이고 삶은 끝나며 우리 자신도 언젠가 사라진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누군가 만나고 사랑하고 살며 존재를 증명하고자 애쓸까? 루이즈에게 딸의 존재는 너무 일찍 떠나간 한때의 괴로운 기억으로 그쳤을까? 나는 때로 어떤 순간은 영원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안다. 딸의 상실이라는 고통 또한 영원하더라도 루이즈는 딸이라는 존재가 가진 슬픔과 기쁨을 기꺼이 수용했다. 가히 초인답다. 루이즈의 선택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들도 어쩌면 이미 루이즈와 같은 선택을 한 걸지 모른다. 루이즈에게 딸이 주어졌고 루이즈가 그걸 받아들이듯, 우리에게도 삶이 주어졌고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고 산다. 과거가 어땠고 미래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이 순간의 작은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

루이즈 딸의 이름은 HANNAH, 헵타포트의 언어처럼 시작과 끝이 없이 이어진다. 과거와 미래에 의미 두지 않고 현재에만 머물게 된 루이즈가 지어준 이름일까. 영화 <컨택트>가 내게 가르쳐준 강력한 일상의 기술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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