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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Nov 11. 2019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까?

인간관계에 정답은 없다지만

늦은 밤, 페이스북에 들락거리다 아마도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내게 도달했을 글을 한 편 보았다. 제목은 “당신에게 친구가 없는 이유”. ‘헉... 어떻게 알았지?’ 뜨끔해하며 클릭해 읽어보니 신통하게도 얼마쯤 나와 겹치는 얘기였다.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거나 나오라는 제안에 내키지 않아 한다는 부분이 나였다. ‘그래 내가 친구에게 살갑게 연락하거나 자주 만나고 일 벌이는 타입은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글을 읽어갈수록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글은 친구를 잘 만나지 않거나 없음을 인간관계가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급기야 개선해야 할 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글 하나를 밤이 깊도록 오래 곱씹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진 친구에 대한 믿음이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많아야 좋다'거나 ‘친구가 많다=인간관계가 좋다.’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 반대편엔 친구가 적은 사람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사회생활, 더 나아가 인격에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친구가 많은 사람들의 관점일 뿐 정작 친구가 많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친구가 많길 바랄 거라는 추측이 가장 당황스럽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그중 한 친구는 몇 년째 메신저로 안부만 주고받기도 한다. 요즘은 동호회 활동도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오래된 선후배 모임도 몇 개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 불만이 없다. 이것이 내게 맞기 때문이다. 나도 30대 초까지 친한 친구는 매주 한 번 이상 만나고 주말엔 부지런히 모임에 쫓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모임을 갖고 돌아오는 길엔 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뿌듯함보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버스에서 멍한 눈빛으로 버스 창 밖을 보는 시간이 늘어갔고 한 번씩 ‘이거 너무 피곤하잖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생활만 복잡해지는 걸?’ 의문이 들었다. 모르는 사이일 땐 나에 대해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일면식이 생긴 후로 나에 대해 마음껏 오해하거나 거짓을 퍼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친구 많음=좋은 인간관계=유능한 사회인’이라는 등식의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누군가를 만나 끝없는 넋두리에 함께 빠져들거나, 상대의 남아도는 에너지를 받아줄 도구가 되어 기를 빨리거나 서로를 염탐하며 의미 없는 방어적 농담만 주고받는 대화에 신물 나 그만 만나려다가도 소심한 걱정이 뒤따랐다. ‘만약 인간관계를 잘 풀어내지 못하는 게 내 탓이라면?’ '이러다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 건 아닐까?’ 얄팍하게는 ‘결혼식에 초대할 친구가 없어지는 건 아닌가.’부터 ‘나이 들어서는 친구밖에 남는 게 없다던데’ 같은 걱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닌 척해봐야 결국 나는 나로 돌아오는 법.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지나니 기를 쓰고 모이던 또래 모임도 자연스레 뜸해졌고 홀로 보내는 주말이 늘어갈수록 나는 이런 고요한 시간이 내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이번에도 해답은 역시 내게 있었다. 사람들로 둘러싸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향 받음으로써 기운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사람들에서 떨어져 나만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돌보아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도 있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친구가 많지 않고 화려한 인맥도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조금 더 내보자면, 양질의 큰 에너지로 많은 사람을 감당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존경스러운 인싸도 많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 많은 친구가 필요한 사람 중엔 오히려 외로움을 다루지 못하거나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걸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거나 잘 나가는 지인의 사회적 위치가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구가 많고 적고, 모임이 많고 적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내게 맞는 관계 방식은 무엇인지, 그 방식 안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지를 돌아볼 일이다. 친구 없는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을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새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하거나 새로운 사람이 많은 자리에 억지로 나가지는 않는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어쩐지 필요할 것 같아, 혹은 거절할 명분도 딱히 없어서 맺은 관계는 내 경우 경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내 방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나답지 않게 행동해야 하거나 오해로 인해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관계는 한쪽의 노력은커녕 상대가 함께 노력해도 완벽히 컨트롤하기 어려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고 소멸하기도 하는 독립된 무언가라는 생각도 든다. 서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딱히 어느 쪽의 확연한 잘못 없이도 종종 어그러지고 깨지는 게 관계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관계에 대해 기울이는 노력은 이것뿐이다. 억지로 누군가를 만나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맑은 마음으로 진심을 건네고 그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는 것. 설령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그렇다. 관계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거나 앞날을 예단하지 않고 상대를 대할 것. 잘 지내보겠다거나 멀리하겠다거나 되도록 판단을 배제하고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시간과 함께 변하는 관계를 지켜보는 것이다. 관계를 잘 돌보는 것만큼 잘 정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어쩐지 만날 수록 불편한 사람이 있다. 서로를 어설프게 알고 오해하는 것보다 '잘 모르는 사이'로 남는 게 나은 관계도 있다. 서로 알아가고 맞춰가도록 노력할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지 구분하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열심히 내 마음에 묻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어디 간단한 원칙 몇 개로 정돈되는 문제던가.  내게 관계는 유독 어려운 숙제다. 언제 어디서부터 생겨났을지 모를 미묘한 틈으로 인해 결국 하나의 관계가 틀어지는 걸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나에 대한 상대의 의심과 오해에 치를 떨면서도 상대를 향한 편견을 보지 못하는 게 나다. 일정 거리 안에서 서로에게 소속감을 느끼며 영향을 주고받고 싶다는 열망과 거리를 지키고 싶다는 고집이 늘 부딪히는 게 나다. 여전히 많은 밤 또다시 망쳐버린 관계, 부서진 관계에 자책하기도 한다.


요즘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을 꼽으라면 가족과 오래된 친구 한 명 외에 일 때문에 정기적으로 만나는 몇몇 동료뿐이다. 우리는 만나면 즐겁게 안부를 묻고 떠들며 없는 사람 흉도 본다. 자주 따로 만나진 않지만 우리 중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힘이 되어줄 거라는 걸 안다. 우리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인연이 곱게 오래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곁의 사람 앞에서 조심스럽다. 어쩌면 관계로 인해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은 소심한 사람의 방어 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친구가 많을수록 좋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으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나와 닮아 마음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이 아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어 자리를 언제나 비워두려 한다.   

    

(*보다 정돈된 글을 책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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