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여행자 Jul 15. 2020

프리랜서로 살며 배운 시간 관리의 비밀  

누군가를 처음 만나 프리랜서라고 소개하면, 그리고 아무튼 밥은 굶지 않는다고 부연하면 대부분의 사려 깊은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가끔은 한치의 망설임 없는 표정으로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럴 땐 진지하게 묻고 싶어 진다. 정말인가요? 어떤 점이 부러우세요? 대개는 자유라는 단어를 포함한 답이 돌아오는데 그것은 불확실과 불안정이라는 그림자의 밝은 면일뿐이라고 굳이 설명하지는 않는다.


대학 졸업학기 무렵 방송국에서 막내 방송작가에 해당하는 자료조사 요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방송작가가 제대로 된 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 하던 시절이었다. 말만 프리지 막내 땐 (최소) 나인 투 식스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작가 선후배 간의 위계도 강해 프리랜서로서의 삶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여력이 없었다. 장점을 활용하기는커녕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 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러다 경력이 쌓이고 입지를 다지면서 차츰 나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 혹은 1인 기업으로 인식해나가기 시작한 것 같다. 돌아보니 프리랜서로 살며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진상 상사로부터의 자유나 비성수기에 훌쩍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이 아니라 직장이라는 울타리 없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 자신을 발견하고 키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직장인처럼 정해진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프리랜서에게 이 과정은 곧 시간 관리와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직장인이 업무 시간 외에 혹은 틈틈이 시간을 짜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프리랜서는 일과 쉼을 구분하여 짜임새 있게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나로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움과 맞닥뜨린다.


직장인에게도 자기 계발은 절박한 과제다. 비정규직 일자리와 조기 퇴직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 속에, 지금 몸 담고 있는 직장에 몸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워라벨이 건강한 가치로 떠오르는 시대 아닌가. 퇴근 후 혹은 퇴직이나 계약 해지 후 개인의 삶이 중요해지니 직장인과 자기 계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듯하다. 그래선지 자기 계발과 시간관리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갖는 고민이며 그만큼 이런저런 정보도 넘쳐난다. 매일의 일과를 분 단위로 기록해 얼마나 시간을 허투루 쓰는지 깨닫고 각성하라는 회초리부터 휴대폰 어플 등을 이용해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집중하라는 조언,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면 삶이 바뀔 거라는 주장도 있다. 다들 귀 기울일만한 이야기로 보인다.


러나 내겐 이 중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살면서 시간을 가장 밀도 있고 가치 있게 쓴 시절은 언제였을까. 밀도 있고 가치 있는 시간이 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가는 시간이 아까워 붙잡고 싶은 순간이 아닐까. 떠올려본다. 어라, 의외로 어린 시절이다. 날마다 하늘이 붉어질 무렵이면 어디선가 나타나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점심 먹고 나와 얼마 놀지도 못 한 것 같은데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라니. 그렇다. 신나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시간의 질이 높아진다.

이십 대 중반 무렵 중국어 공부에 빠졌던 기억도 난다. 갑자기 중국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자격시험을 앞둬서도 아니었다. 고등학생 이후로 손 놓았던 중국어가 아까워 다시 시작한 공부가 너무 재밌어서 출근하지 않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렸다. 성조를 익히고 단어를 외우고 자막 없이 중드를 보고... 중국어 공부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몇 개월쯤 중국어에 빠져있을 동안 내게 24시간은 아침 점심 저녁도 업무와 여가도 아닌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과 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나뉠 정도였다.


지금은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무아지경에 빠질 만큼 몰입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많은 시간을 이렇게 헐렁하게 보내도 되는 걸까 의심하며 보낸다. 다만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순간은 있다. 마음이 분주한 오전의 산책 시간, 그리고 읽거나 쓸 때다.

시간 관리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요즘 내가 기울이는 노력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시간을 그 일들로 채우고자 노력한다. 내겐 새벽에 일어나 기적을 꿈꾸거나 의지를 부르짖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잘 맞았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찾고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조금씩 확장되기도 한다. 내가 방송 구성작가에서 읽고 쓰기에 대해 말하는 대중 강사로, 내 글을 쓰는 에세이 작가로 영역을 조금씩 넓힐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것 아니었을까.

나의 읽고 쓰기가 누군가에겐 운동일 수도 또 누군가에겐 그림 그리기일 수도 있다. 내 언니처럼 회사에 있는 시간이 그렇게 재밌다는 특수한 경우도 있을 테고. 중요한 사실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스스로 그것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으면 의지를 부르짖지 않아도 시간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시간의 질이 자연스레 높아진다. 아껴 쓰게 되고 음미하게 된다.

때로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꺼이 견딜 수 있게 된다. 생업의 시간에 공을 들여야 당장 원고료가 나오지 않는 글을 마음 놓고 쓸 수 있다. 지금 닥친 숙제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자연스레 맞물린다.


시간 관리를 고민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 내게 어울리는 일을 찾는 것이 먼저라는 걸 몰라 헤매는 동안 나는 애꿎게도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다그치고 외국어, 골프, 악기를 배워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밤늦게까지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헤매거나 자주 늦잠을 자버리지만 시간을 낭비했다며 자책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기로 정해놓은 시간에 직장인 친구의, 퇴근 후 맥주 한잔하자는 카톡 한 번에 홀랑홀랑 넘어가 곧장 책장을 덮어버리면서도 말이다. 내 시간이 어느 방향을 향해 가는지 지금의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비빔밥을 먹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