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 찾아온 슬럼프

걱정 말아요 그대, 지금은 나에게

by 레이지제스트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은 같은 속도인데

나의 상대적 시간의 흐름은 가속이 제대로 붙었다.


나이 듦을 편하게 받아들이며 잘 익고 싶은데

점점 말라가는 것 같은 40대 말.

기대했던 안정적 여유는 누릴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시간과 경험은 분명 쌓인다.

동시에 쌓이길 기대하는 건 갖가지 노하우와 지혜.


인생은 제로섬(zero-sum) 게임과 같다고 했으니 동시에 잃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슬금슬금 빠져나간 근육량과 체력.

그리고 시력과 감정조절력?


분명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아닌가요?


악착같이 노력하며 살진 않았지만 꾸준히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50을 코앞에 둔 지금 나의 시간들은 모래성이 무너진 상태인 것 같다.

노하우와 지혜는 어디로 갔을까?


의도했던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일을 운 좋게 시작했다.

급여, 직위, 일, 근무시간.... 등 중요한 모든 조건들을 제쳐두고 가장 1순위였던 "walking distance"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직장에 입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걸 해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 절대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고

20 여전 전의 급여 수준으로 다시 떨여졌고

10년 넘게 일하며 쌓은 경력은 초기화, 다시 신입이고

근무시간도 풀타임에 시기별로 야근을 해야 한다고 괜찮겠냐고 했다.

....

다 괜찮다고 했다.

받아들였다.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곳이니까.




이게 된다고?

개인 사업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시간 투자마저 하기 어려운, 뭐라도 해서 벌어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위기의 상황에 옆에 있는 사람과 의견을 나누기도, 걱정을 나누기도, 해결책을 찾기도 어렵다는 걸 인지하면서 돌덩이만 하루하루 마음에 쌓여갔다.

다시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력서 쓰기, 취업사이트 투어하기.


탄탄한 제2의 인생의 길을 개척하리라 야심 차게 박차고 퇴사하며 시작했던 나의 40대는,

잔잔한 수많은 도전들로 채워졌지만 결과는 내지 못하고

결국 내쫓기듯 다시 취업시장으로 내몰렸고

오라는 곳이 없어 찬바람 속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를 내가 잡은 것이다.

그 신기함과 뿌듯함에 한 달은 대졸 신입이 된 거처럼 해맑고 씩씩하게 출퇴근을 했다.

이대로 쭉 갈거라 기대하며~


한 달의 매직인가, 저주인가.

회사생활은 3, 7, 9의 위기가 아니었던가.

난 1부터 시작하네.


한 달이 지나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을 빨리 습득한다고 자부했던 나이지만 체력, 집중력, 소화력이 떨어진 현재의 주소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걸까.

일을 빨리 알려주려는 의도인 건 알지만 나를 탓하는 듯한 얘기를 듣고 넘기는 것이 안 된다.

자신의 실수를 알지 못하고 내 실수부터 지적하는 걸... 이 나이에도 '그럴 수 있지~'가 안되다니.


뿌듯함은 사라졌고,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건지에 대한 한탄이 폭설과 함께 내 마음을 덮어버렸다.


그렇게 질퍽거리고 있을 때, 전인권 님이 부르시는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었다.

TV에서 우연히 봤으니 보고 들었다고 해야겠지.


전체적인 가사의 의미와 의도는 내 상황과 다르겠지만,

사랑을 노래하고 싶지 않지만,

이 가사들이 위로해 주었다.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힘겨운 듯 아닌 듯 가만히 앉아 꾹꾹 눌러 담아 한음 한음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음 한음 눌러 담으며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말해야 할 거 같은 힘을 얻었다.


슬럼프 또한 반등을 하기 위한 디딤이 될 것이다.

슬럼프도 위로도 어디서 갑자기 훅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0'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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