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가볍게, 그래서 이직도 가볍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나는,
전문적으로 취업 시장에 들어가겠다는, 매우 합리적인 이유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어쩌다 전공이 된 통계학, 그래 제대로 해보자 결심했다가
확고한 의지가 아닌 탓에 등록금 핑계를 대며 포기했고
해외로 나가는 구실을 만들어 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 임시로 일할 직장, 인생 첫 직장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워라밸 추구미의 시작
임시로 1-2년 있을 직장인데 치열하게 경쟁해서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경쟁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 인정한다.
학교 취업지원센터 게시판에 올라온 공고들을 보면서 많이 지원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골라서 지원했다.
내가 선택받기 위한 전략.
외국계 회사 한국 지사로 시작하는 업체인 줄 알았다.
영어도 어느 정도 해야 할 테고, 작은 사무실이니 사람들이 지원 안 할 테고... 나도 어차피 잠시 있을 거니까.
경험 쌓고 영어 활용하고 유학자금 모으고. 딱이었다.
그렇게 작은 외국계 기업 마케팅팀으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면접에서 약속했던 근무시간, 회사 분위기 좋아 보였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시간 보장"이 지켜지지 않았다.
처음 한 달은 괜찮았다. 하지만 두 달째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일 야근에 술 좋아하는 대표를 보며 불신을 배웠다.
"오늘 좀 늦게까지 있어야겠어."
"내일 프레젠테이션 있어서..."
"이번 주만 좀 힘들 것 같아."
처음에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신입이니까, 배워야 하니까.
하지만 매일 야근이 계속되고, 주말에도 연락이 오고, 휴가도 눈치 보며 써야 했다.
"이런 게 직장생활인가? 면접에서 말한 건 다 거짓말이었나?"
결국 1년도 채우지 않고 첫 퇴사를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서 유학 가기 전까지만 있으면 되는데, 첫 직장 근무기간이 6개월이라니.
첫 퇴사로 확실히 입증된 워라밸(Work-Life Balance) 가치관은 내 인생에서 25년 가까이 시소 타기를 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안에 심어진 이 기준이 모든 선택의 출발점이 되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이직의 시작
첫 직장 퇴사 6개월 만에 다시 학교 취업지원센터 공고를 보고 모교의 대학원 행정실 계약직에 지원했다.
다른 학과 교수님들 4-5분과의 면접이라니.
유학 계획도 솔직히 말씀드렸는데 졸업생으로 가점을 받은 걸까, 채용이 되었다.
급여는 더 적었다. 첫 직장의 70% 정도밖에 안 됐다.
하지만 근무시간이 짧고 집에서 가까운 "최고의 위치"라는 조건 때문에 선택했다.
"여기서는 정말 시간 보장이 될 거야. 대학교 행정실이니까 칼퇴근이 가능할 거고, 방학 때는 여유로울 거야."
실제로 그랬다. 9시 출근, 5시 퇴근. 점심시간도 여유롭고, 업무량도 적당했다.
다른 학과지만 첨에 내가 진학하고 싶었던 컴퓨터학과 대학원 행정실, 얼마나 좋은가.
학술대회 준비를 교수님들, 학생들과 하면서 전공 간접 경험도 하고 나에게는 못 이룬 것을 맛보기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모교였기 때문에 어색함이 없어서 편했다.
여기서 이벤트를 하면서 일을 배우고 내가 어떤 일에 적성이 맞는지도 알 수 있었다.
유학 준비를 위해 돈보다는 시간을 선택했는데, 워라밸을 제대로 경험하고 만족했던 시간이었다.
이때의 경험이 나의 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이미 내 커리어는 일반적이지 않은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