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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Aug 08. 2024

샌프란에서의 첫날밤

지프, 로드트립, 성공적? pt 2.

나는 방 배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입하기도 애매한 위치였다. 혼자 한국인인 것도 모자라 당일 대타로 급하게 합류한 탓에 이미 그들이 세워놓은 계획에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물론 내심 그와 단둘이 방을 쓰고 싶은 바람은 없지 않았지만, 10명이 3개의 방을 나눠 가져야 하는 상황에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체크인 후 입실까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결국 나와 시로, 시쿠가 한 방, 유키와 짝남, 미유 커플까지 4명이 한 방, 이탈리아 친구들 세 명이 남은 방에 묵게 되었다.


룸 컨디션은 생각보다 좋았다. 욕조가 딸린 여유로운 사이즈의 화장실, 요리를 할 수 있는 싱크대와 인덕션, 식탁까지 갖추고 있는 레지던스 타입의 방이었다. 무엇보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 건 트윈베드가 놓여 있다는 것.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까스로 벗어난 셈이다.


옆 유키 방을 놀러 가니 그곳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더블베드 하나가 떡하니 놓여 있어 네 명이서 옹기종기 끼어서 자거나 한 명은 간이소파 신세를 지게 생겼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 같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의 날씨는 다소 쌀쌀했다. 로스앤젤레스처럼 일 년 내내 온화하고 맑은 날씨만을 기대하고 오기는 힘든 곳이다. 더불어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버금갈 정도로 정리가 안 된 지저분한 길거리와 곳곳에 서성거리는 노숙자들 까지 더해져 치안이 좋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다. 단체라서 망정이지 친구와 단둘이 왔으면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고로 장소보단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한 법. 비록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지만,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용서되는 기분이었다. 이동할 때마다 우리는 짝꿍처럼 단둘이 붙어 다녔다. 다수가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저마다 친한 친구 옆에 붙어서 걷게 되듯, 일정 내내 우리는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의 안내에 따라 미리 알아봐 놓은 한 중식집에 들어섰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사장은 카운터에 한쪽 팔을 기댄 채 종업원과 수다를 떨다 우리가 들어서니 아무 말 없이 메뉴판을 들고 편한데 앉으라는 듯 한쪽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중식당 특유의 원형테이블에 다 같이 둘러앉아 얼굴을 맞대고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메뉴만큼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시아신이 절반이 넘는 상황인 만큼 호불호가 덜한 음식을 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각자 메뉴판을 보고 이것저것 고르는 사이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펜을 들고 와 주문이 시작될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그건 양이 적어서 두 개는 시켜야 돼요. “ ”그건 지금 재료가 떨어져서 안 돼요. “


주문을 받는 내내 사장의 개입이 잦아 일부는 몇 번이고 메뉴를 변경해야 하는 약간의 수고스러움이 있었다.


식사 내내 타케시의 표정이 연신 굳어져 있었다. 음식보다는 식당의 서비스를 탐탁지 않아 하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기름에 불 붙이듯 옆에서 농담을 치며 큰 소리로 웃는 시로가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원체 이탈리아인들이 대체로 목소리도 크고 리액션도 활발한 편에 속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번만큼은 시모네도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살려보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동임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둘이 룸메이트라는 점을 비추어볼 때 더더욱 그 사실을 스즈키가 모를 리 없다. 그저 남자 일행들 중 유독 목소리가 큰 편이라 두드러지는 것뿐 그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심지어 식당 안은 우리 빼곤 아무도 없었기에 남에게 피해를 줄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넌 좀 입을 닫았으면 좋겠어.”


타케시가 시로를 향해 쏘아붙였다.


음식을 먹던 중 모두의 시선이 두 명에게 꽂혔고 몇 초간의 불편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시로도 당황했는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스즈키를 바라보다 멋쩍은 듯 말을 멈추었다.


“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


혹시 싸움으로 번질까 옆에 앉은 파비오가 상황을 중재하려고 애썼다.


물론 주의를 줄 순 있지만 모든 말은 전달방식의 차이이거늘 꼭 그렇게 매정한 말투로 다그쳐야 했을까, 괜히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식사를 마친 후 계산을 하기 위해 저마다 테이블 위에 현금을 꺼내 놓았다. 타케시가 한데 모은 후 카운터로 가져가 결제를 마쳤다. 모두 일어나 가게를 나서려던 그때, 여사장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우리를 막아섰다.


“Where’s tip? You should pay it.”


우리를 가로막으며 당당하게 팁을 요구하는 모습에 모두들 당황한 채 서로 눈치만 주고받고 있었다. 내기 전엔 절대 내보내지 않을 것 같은 뉘앙스에 타케시가 마지못해 몇 달러를 건네자 그제야 뒤돌아섰다.


“내가 이래서 여기를 안 오려는 거야.”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타케시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돌아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식당에서의 일을 굳이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무안했을까 마음에 조금이라도 기분을 풀어주고자 일상적인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걷는 내내 우리 둘 사이의 오디오는 비어질 틈이 없이 꽉 차있었다. 안 그래도 썸 초반에는 서로에 대해 알아갈 것 투성이라 질문의 질문을 거듭하며 대화의 샘이 마를 겨를 이 없는데 서로 외국인이며 각자의 나라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기에 생활방식, 데이트 문화 등 대화의 주제가 분수처럼 마구 샘솟았다.


“그나저나 넌 잘 먹더라 중식이 입에 잘 맞나 봐?”


- “중식, 일식, 한식 다 좋아해 난. 그리고 차이나타운도 많이 가봤어 이탈리아에서”


“차이나타운은 어딜 가나 있구나.”


-“이탈리아에 사는 중국인이 얼마나 많은데. “


“한국도 마찬가지야. “


- “그래도 난 여기의 분위기가 좋아,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달까, 유럽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분위기.”


“난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 없는데 외국인이 보는 시선이 다른가 봐, 난 오히려 유럽의 건축양식에 더 매료될 것 같던데. “


- “난 항상 아시아권을 여행하는 게 꿈이었어. 사실 일본어도 배우고 있거든, 나중에 어학연수 가보고 싶어서. 근데 널 만나니까 갑자기 한국이란 나라가 굉장히 궁금해지네. “


“오면 놀랄걸? 한국이 어떤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상상하던 것 이상일걸?”


- “누가 알아? 내가 한국으로 방향을 틀지 “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이냐는 무언의 눈빛을 그에게 건넸다. 그냥 한번 던져볼 말 일지라도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미래를 조금은 더 멀리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찰나의 희망을 느꼈다.


“크리스마스, 어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거리의 조명까지 더 해져 두 배는 더 반짝거렸다.


- “크리스마스? 내년?”


“아니, 올해”


- “올해? 네 달도 안 남았는데?”


“알아, 그래도 노력해 볼게. 크리스마스는 꼭 같이 보내고 싶어.”


- “그럼 약속해”


약속을 상징하는 엄지와 약지손가락을 편 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Copy”


손바닥을 펴보라는 사인을 보내자 그는 의아해했다. 활짝 펼쳐진 그의 손바닥을 내 손으로 맞댄 채 쓸어내렸다.


- “카피가 뭐야?”


“한국인들은 이렇게 해. 맹세의 표시를 거듭하는 거지. “


- “신선하네, 기억해 둘게.”


가다 중간중간 멈춰 길거리의 풍경을 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을 밝히는 붉고 어두스름한 간판들이 마치 홍콩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가 카메라를 들어 어딘가를 찍고 있으면 나는 그의 뒷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대놓고 포즈를 취하는 사진 보다 찰나의 순간을 담을 때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다

출처:내 갤러리


시쿠는 우리 둘을 의식한 듯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옆방으로 가 다른 이들과 어울렸다. 그의 배려덕에 한결 여유롭게 화장실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본의 아니게 눈치를 준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잘 준비를 마치고 눕자 그제야 시쿠가 들어왔다.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 비록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표정이라도 밝으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시쿠까지 잘 준비를 마치고 눕자 시로가 불을 껐다.


“Good night”


몸은 피곤한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슬며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서로 어둠 속에서 눈을 맞춘 채 못다 핀 이야기의 꽃을 피워갔다. 혹시라도 시쿠에게 방해가 될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야기 도중 빵 터질 때면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막느라 애를 먹었다.


안 되겠던지 그는 슬며시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뒤덮었다.


오직 둘만을 위한 얇은 보호막이 처진 기분과 동시에 서로의 숨결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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