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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Aug 15. 2024

금문교, 파스타, 오픈카

지프, 로드트립, 성공적? pt 3

Day 2


이른 아침, 아침 인사차 유키의 방에 들어섰다. 준비가 덜 되었는지 아직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고 있는 유키는 밤새 잠을 설쳤는지 눈 밑이 퀭 해 있었다. 침대 하나에 4명이서 어떻게 잤는지,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묻어두기로 했다.


하나둘씩 방에서 나온 친구들이 복도에 모였다. 전날보다 어째서인지 묘하게 싸한 기류가 맴돌았다. 상황이 도저히 감 잡히지 않아, 번갈아 가며 친구들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시로, 잠깐 얘기 좀 하자.”


잔뜩 구겨진 얼굴로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나온 스즈키가 시로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모두가 놀라 들썩거릴 정도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간 뒤, 스즈키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궁금해진 남자아이들은 문 앞에 귀를 대고 내부 소리에 귀 기울였다.


저녁 식사 이후 줄곧 그는 나와 머물렀기에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을 리가 없고, 스즈키가 저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것은 둘 사이에 이미 깊은 감정의 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룻밤 사이에 날 선 대립이 생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대체, 뭔데?”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내가 그 원인의 일부이기에 알고 있어도 나한테 차마 말해줄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대타로 들어온 게 누군가에겐 못마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워낙 


20분 정도 후, 스즈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문 앞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시로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곁에 몇 명의 친구들이 달라붙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스즈키는 갑자기 급발진하듯 문 앞에 서 있는 시로를 향해 뛰어들더니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문을 쾅 닫아버렸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제지할 겨를도 없이 시로에게 달려들며 옆에 있던 친구들을 밀쳐냈다.


파비오가 문을 열어보려 애썼지만, 굳게 잠겨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육탄전으로 번질까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문 앞에 귀를 대고 있던 남자들은 일단 몸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인을 보내며 모두를 안심시켰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스즈키가 문을 열고 나왔다. 뒤를 따라 나온 시로는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얼굴을 감추려 뒤돌아 섰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듯했다.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으려 눈을 가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남자의 눈물을 그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이런 그의 연약함이 내 마음을 더욱 요동치게 만들었다. 자신의 내면, 그 내면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강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스즈키, 사과해 일단.”


어떤 이유에서건 그런 공격적인 태도는 불필요했다며 모두가 다그쳤다. 첫인상부터 썩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았던 게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신하게 되었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채 분노하면 몸부터 나가고 보는 스즈키의 모습에 정이 떨어졌다.


다들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스즈키는 터벅터벅 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사과했다. 시로는 괜찮다는 듯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자, 우리 이제 출발해도 되지?”


“제발 좀 출발하자. 오늘 일정이 빠듯해.”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본격적으로 2일 차 일정을 시작했다.




연중 화창한 날씨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의외로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겉옷을 챙기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할 정도로 쌀쌀한 날씨에, 한여름에도 춥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근처에서 야구 경기가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점심을 사들고 함께 가기로 했다. 로컬 느낌이 가득한 샌드위치집에 들어서서 각자 한 줄에 서서 차례로 주문을 했다. 내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는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는 나의 옷깃을 살짝 잡아 자신의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이끌었다.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껴안는 것처럼 노골적인 행동 없이 이렇게 은근한 스킨십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평일의 야구 경기장은 한산했고, 필드에는 몇몇 선수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야구 좋아해?”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룰도 몰라. 중학교 때 배웠는데도. 넌?”


“룰은 대충 아는데, 특별히 좋아하진 않아.”


“아까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앙금 없이 깔끔하게 화해한 거야?”


“사과했으면 됐지. 더군다나 룸메이트 사이라 매일 볼 얼굴인데 풀긴 풀어야지.”


“왜 그런 거야, 대체?”


“어제 중국집에서 내가 큰 소리로 웃은 게 그렇게 거슬렸나 봐. 그걸로 걸고넘어지던데.”


“그게 전부라고? 설마.”


“사실 너한테 개인적인 감정이 있기보단,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데려와서 언짢았나 봐. 이미 10명이 맞춰져 있고 차에는 5명씩만 탈 수 있는데, 아무 상의 없이 합류시켜서.”


“그럴 줄 알았어. 차마 나한테 얘기는 못하고 너한테 화풀이했네.”


“반발을 감수하더라도 널 데려가고 싶었어. 물론 일방적이었던 건 맞지만, 운 좋게 한 명이 빠지는 덕분에 어찌 됐든 인원은 맞춰졌잖아.” 


"웃기지 않아? 어떻게 갑자기 공석이 생기냐. 우연도 그런 우연은 없을 거야."


네가 안 왔다면 어쩔 뻔했는지 상상하기도 싫다."



“와, 창밖 좀 봐봐!”


고요하던 차 안에서 친구들이 창밖을 보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 모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 좌석에 집중했다.


금문교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짙게 낀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옆에 가드레일 하나 없는 절벽을 오르는 것은 그 자체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이었다.


“시로, 천천히 가, 천천히…”


운전 경력이 상당한 시로도 긴장한 듯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아주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렸다. 삐끗하면 이승과 이별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였다. 그의 손에는 무려 네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금문교는 짙은 안갯속에 숨겨져, 마치 비밀을 간직한 듯 꼭대기 부분이 감춰지고 4분의 1만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흐린 날씨가 오히려 교량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주어, 그 나름대로의 운치와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 카메라를 들어 열심히 풍경을 담다가 시로가 우리 여자들의 모습을 찍어주겠다며 자리를 잡아보라 했다. 금문교를 등지고 기차 놀이하듯 우리 셋은 일렬로 앉아 고개를 기울인 채 포즈를 잡았다. 중간중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까지 빠짐없이 담긴 사진에는 그날의 즐거움과 우정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너도 서봐. 시로랑 같이.”


유키가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즈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중, 시로는 나에게 담 위에 걸터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몸을 살짝 기울여 시로에게 기대고, 팔을 허벅지에 걸친 채 브이 포즈를 취했다.


회색빛 흐린 날씨가 묘한 분위기를 더해주며,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그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지막 날 저녁은 파스타 나이트로 장식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인만 네 명이 모였으니, 전통 오리지널 까르보나라를 맛보지 않고 떠나는 건 아쉽다는 시로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미식의 나라에서 온 그들답게, 음식에 대한 진심이 한국인 못지않아 보였고, 요리에 대한 자신감도 있어 믿음이 갔다.


오리지널 까르보나라는 한국식과는 레시피부터 천지차이다. 시판 파스타 소스를 사용하거나 버터와 우유로 만든 소스를 얹는 한국식과 달리, 이탈리아식 까르보나라는 오직 계란과 파마산 치즈만으로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한국식 까르보나라 조리법 영상을 보여주었더니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이런 리액션들은 언제나 흥미롭다.


장을 볼 때 시로가 계란을 두 판이나 집어 들었을 때는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요리를 시작하니 그 양도 모자랄 뻔했다. 알덴테로 쫄깃하게 삶아진 펜네 위로 계란물을 붓고, 그 위에 파마산 치즈가루를 듬뿍 뿌려 정성스럽게 버무렸다. 단순해 보이지만, 계란을 적절하게 풀어내고 꾸덕한 질감을 연출하는 일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각자 개인 접시에 곱게 담긴 파스타를 들고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식탁이 없는 탓에 바닥에 앉거나 침대에 걸터앉아 먹어야 했지만, 그 자체로도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Day 3

마지막 코스로 피어 39로 향했다. 모두 기념품 가게에서 쇼핑 삼매경에 빠진 사이, 시로는 밖에서 누군가와 열띤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랑 저렇게 통화하는 걸까?"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통화 상대가 몹시 궁금해졌다. 그의 격앙된 톤과 길어지는 통화 시간으로 보아 가족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여기 오기 전에 썸녀가 있었대.” 유키가 말했다.

- “아, 그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소 격앙된 톤으로 말하는 걸 보니, 그와 다투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는 나에게 이 사실을 전혀 언급한 적이 없다. 사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6개월 이상 떨어져 타지에서 생활하기로 결심한 그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계에 금이 가기 마련이니까. 비록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나를 만나기 전 그의 삶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남자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산타바바라로 돌아가는 길은 시로와 파비오, 그리고 여자 셋이 한 팀이 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일정 내내 남자 인원이 많은 스즈키 팀이 지프를 몰다가 마지막 날에야 우리가 비로소 탈 수 있게 되어 모두 한껏 신이 난 상태였다.


골든아워의 고속도로는 금빛 햇살이 광활한 논밭을 물들이며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시로, 선루프 올려줘.”


마지막 질주를 창문을 꼭꼭 닫고 가기엔 아쉬웠던 우리는 오픈카의 진가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시로는 곧바로 선루프를 열었다. 무지막지한 바람이 차 안으로 금세 파고들었다. 셋 다 머리를 풀어헤친 덕분에 바람이 사정없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가운데 앉은 미유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처녀귀신처럼 보이는 여자 셋이 스크린에 나타나자 깔깔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곧이어 시로는 옆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져도 상관없었다. 따스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돌려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과 함께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두 눈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는 룸미러를 통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윙크를 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장소, 편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렇게 어학연수의 마지막 일정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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