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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Aug 22. 2024

먼저 떠나겠습니다.

이별을 장식하는 법

샌프란시스코 여행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쩌면 곧 다가올 이별을 알기에, 있을 때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어학원에 도착하면 곧바로 교실로 직행했지만, 이제는 30분 정도 일찍 출발할 여유도 생겼다. 도착하면 그를 찾는 게 일종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먼저 도착한 그가 다른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으면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가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그가 나를 먼저 발견하면 항상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살짝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연애에 있어서 항상 수동적이었던 내가 이렇게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놀라웠다. 어쩌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선뜻 행동에 옮기는 것이 어색했거나 아직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리드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꼭 완벽한 짝을 찾겠다는 다짐을 하고 온 건 아니지만, 국제연애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히 컸기에 기회가 된다면 잡고 싶었다. 물론 그를 만나기 전까지 수업이나 파티를 통해 몇몇 남학생들과 교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대화의 주제가 피상적이어서 깊은 정서적 교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와 잘 맞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비록 둘 사이의 언어 장벽이 완전히 허물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만나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외국인이라면 오죽할까. 더군다나 어느 한쪽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상태에서 유일한 소통 수단이 영어밖에 없다면 그 중요성이 더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해내고 있는 우리가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고, 앞으로 영어 공부에 더 힘써야겠다는 강한 동기도 생겼다.


무엇보다 마음 한구석에서 곪아가던 외로움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오늘 네 옷 너무 잘 어울렸어 ‘


방과 후 기숙사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모처럼 평소 즐겨 입던 캐주얼한 스타일을 벗어나 처음으로 슬랙스에 크롭재킷을 매치해 세미 정장느낌으로 매치해 보았는데 그가 보자마자 육성으로 감탄을 내뿜었었다. 서로 추구하는 패션 스타일도 비슷하다는 점에서, 또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이라 어깨가 으쓱해졌다.


’ 사실 나도 비슷한 옷 있거든? 캐주얼한 정장 같은. 내건 그레이색이야.‘


‘사진 보내봐’


그가 보낸 사진엔 회색의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흰색 스트라이프가 새겨진 오버핏사이즈의 투피스였다. 보자마자 ‘조 블랙의 사랑’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키는 옷이었다.


’내일 입고 갈까?’


‘응 꼭 입고 와, 입은 모습 보고 싶어.‘


’ 너도 한번 더 입고 와, 커플룩으로 맞춰보자, 어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수업이 끝난 후 버스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렸다. 건너편에서 그레이색 캐주얼 정장을 입은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 채 손을 흔들었다. 그가 조금씩 내게 가까워질수록 설렘도 조금씩 증폭되었다. 지금 당장 내 얼굴을 거울로 볼 순 없지만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표정일 것이다.


“어때?”


“근사한걸”


“완전 잘 어울려”


“비즈니스 커플 느낌 나나 우리?”


옷을 매치해 입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풍길 수 있다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여자가 원하는 것은 ‘공식적인 것’이다. 서른이고 마흔이고 어느 시기에 연애를 하더라도 “우리 커플이에요 “라고 못 박게 해주는 확실한 증표가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흔하지 않은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한국인에겐 그렇다. 곧 이별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공식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잠시나마 그런 커플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옆에 있던 유키가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었다.


“둘이 서봐 빨리.”


막상 나란히 서니 괜한 민망함에 제대로 된 포즈를 취하기가 어려워 대부분의 사진이 빵 터진 모습, 입 가리고 웃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래도 절대 억지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와 기분이 좋았다.


“유키 너도 일로와 같이 찍자.” 내가 손짓했다.


옆에 있던 친구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유키가 가운데에 섰다.


“가족사진이네” 유키만 혼자 캐주얼한 의상을 입은 덕에 더더욱 가족사진 같은 느낌이 강했다.


“마치 부모님과 딸 같아.”


중간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간신히 카메라에 집중했다. 그것이 우리 삼인방의 공식적인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었다.



“릴리, 나 오늘이 마지막이야”


LA여행 후 그녀가 코로나로 격리에 들어가면서, 나 또한 일본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꽤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기에 먼저 연락을 취했다.


릴리와 시모네를 포함한 샌프란 멤버들은 일주일 뒤 퇴소예정이다. 나와 같은 일자에 입학한 릴리도 내일 떠나는 것이 맞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일주일 더 머무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잠시 망설였다.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거라는 걸 알았기에, 일단은 남아서 재정 상황이나 여러 가지를 충분히 고민해 본 뒤 결정하려 했다. 하지만 질질 끌기보다는 약간의 여운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이 시끌벅적한 산타바바라 버블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진짜? 벌써? 그럼 오늘 같이 파티 가야겠네. “


이미 그녀의 캘린더엔 오늘도 어김없이 파티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쎄, 모르겠다 그건. 어쨌든 인사할 수 있음 인사하자.”



시로: “어떻게 할까, 내가 거기로 갈까?”


나: “응, 와줘.”


파티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지막 날의 피날레는 그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이미 파티는 충분히 즐겼고, 더 이상 끌리지 않았다. 작별 파티라고 해서 꼭 술이 곁들여진 단체 모임으로 성대하게 마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조용히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 5분 뒤 도착.‘


부랴부랴 방을 정리하던 중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에 빠졌다. 꾸민 듯 안 꾸민 듯하면서 편한 옷을 입고 싶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블루 스트라이프 패턴의 셔츠와 반바지 투피스를 골랐다. 루즈하면서도 활동성이 좋고, 후줄근한 느낌이 없어 근거리 외출에도 제격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가로등 불빛만이 밝히는 저 멀리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가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빨리 오려고 엄청 밟았어.”


“어서 와.”


나름의 무드를 연출하고자 캔들에 불을 붙였다. 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무드등 정도의 밝기가 방 안을 따뜻하게 감쌌다. 3평 남짓한 작은 방에 앉을자리는 싱글사이즈 침대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개인실이라는 점이 서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도 홈스테이 생활 중이라,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고 했다.


“무슨 배낭을 메고 왔어?”


“그래도 하룻밤 묵을 건데 이것저것 챙겨 왔지. 세면도구랑…”


주섬주섬 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마치 여자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바리바리 싸들고 온 모습 같았다,


“아까 유키한테 연락 왔었어. 웬일로 오늘 클럽에 가고 싶다고 같이 갈 수 있냐고 묻더라. 심지어 릴리도 파티 가자고 했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난리도 아니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딱히… 네 의견 듣고 유키한테 답장하려고 했어.”


“난 별로. 그런 곳 별로 안 좋아해.”


술도 잘 안 마시는 그가 시끌벅적한 곳을 좋아할 리 없었다. 생각보다 정적인 그의 성향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못 간다고 해야겠다.”


“산책 겸 나갔다 올까? 달달한 게 당기네.” 그가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입이 좀 심심했어.”


매번 파티에 가기 위해 여럿 친구들과 거닐던 밤거리를 그와 단둘이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You look so cute!!!”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 안에서 뒷좌석에 탄 어느 여성이 우릴 향해 소리쳤다.


“봐, 너 예쁘다잖아.”


“내가 맞을까? 너일 수도 있잖아. “


“아냐, 너야 너보고 소리쳤어.”


“그래 나라고 치자.”


기숙사 근처 15분 거리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들어갔다. 과자와 초콜릿 등 간식을 고르다가, 뭐라도 마실 것을 곁들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한잔 할 생각이 있냐 물어보고자 다가갔지만 주류코너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스낵코너만 기웃거리는 그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래, 맨 정신으로 한번 버텨보지 뭐.‘




우리는 밤새 서로의 어린 시절, 꿈, 앞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지 등 끊임없는 질문의 질문을 거듭하며 대화의 끈을 길게 붙잡았다.


영어는 휘발성이 강하다. 모든 외국어가 그렇다. 모국어로 대화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이상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대화를 스토리지에 영구적으로 보관해 두었다가 원할 때마다 꺼내 듣고 싶을 만큼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랜 시간 통화하던 사람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꾹 참았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인연에 과하게 감정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래에, 그리고 나의 미래에 우리가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그때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 단짝친구였다.


여태 시차 때문에 메신저만 주고받던 중 처음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깜짝 놀라 후다닥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뭐 하고 있냐, 보고 싶어.”


한 달 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에 목이 메일 것 같았다. 이보다 반가운 전화는 없을 것이다.


- “야, 내가 더 보고 싶어.. 잘 있지? 지금 한국은 몇 시지?”


“지금 오후 6시 넘었어. 거긴 밤이겠네, 뭐 하고 있냐 “


- “나 지금 걔랑 있어. 그 며칠 전에 사진 보낸 애 알지?”


“뭐야, 사귀어?


- “사귀는 건 아니고 나 내일.. “


시로가 그새 심심해졌는지 내 등을 간질거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며 통화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쯤에서 끊기로 했다. 알 수 없는 외국어를 계속 듣고 있는 그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내가 내일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적막이 흘렀다.


그는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더니 양팔을 크게 벌렸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붙잡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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