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뜨자마자 바닥에서 누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화장실로 가 변기에 앉자마자 찌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통증을 참으며 애써 태연한 얼굴로 방으로 돌아왔다. 시로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옆에서 옷을 차곡차곡 개어주니 캐리어에 공간이 많이 확보되었다.
“고마워.”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퇴실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그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기로 했다.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1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조심히 가고, 도착하면 연락 줘.”
“그래, 넌 언제 떠난다고 했지?”
“다음 주 금요일. 가기 전에 시간 되면 LA에 놀러 갈게. 아니, 최대한 갈 수 있도록 해볼게.”
그는 LA에 사는 친구가 있어 하루 정도 그 친구 집에 머물면서 떠나기 전에 나를 한 번 더 보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현재 재정 상태로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그 말이 작게나마 희망을 주었다. 그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잘 있어. “
짧은 포옹을 나눈 뒤 그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웨스트할리우드. 어학원 입소 전 이틀 정도 짧게 머무는 동안 이곳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운타운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깔끔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한 느낌을 받았다. 나 홀로 여행객에겐 돈보다 안전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마음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곳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짐을 푸는 중에도 아직 아래쪽의 뻐근한 통증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텅텅 빈 냉장고를 채워놓고자 근처 마트로 향했다. 간단히 저녁거리를 산 뒤 곧바로 CVS로 향했다.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없는 나에게는 약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통증이 처음이 아니라 증상만 봐도 급성 방광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곧장 병원으로 가서 소변검사를 받고 항생제를 투여해 바로 통증을 잡았겠지만, 높은 의료비로 악명 높은 이곳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약을 먹고 누운 뒤 지난 한 달간의 여정을 되짚어보았다. 여유로운 어학원 생활을 기대했지만, 평일 내내 이어진 오전 수업에 기숙사에 돌아오면 쉴 틈도 없이 파티에 다니느라 수면 스케줄이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계획에도 없던 로드트립에 떠나는 순간까지 시로와 붙어 있느라 몸의 긴장을 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듯, 나도 모르게 화를 부른 셈이다.
문득 잠에서 깬 새벽 두 시, 찌릿한 통증은 여전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듯했다. 소변을 볼 때 통증이 세 배는 더 심해져 곧바로 일어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뇨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앉아 있기도 누워 있지도 못하겠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고통은 가중되었다.
다음날 아침,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위해 CVS를 다시 찾았다. 아픈 와중에 백신을 맞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 때문에 다시 이곳에 숙소를 잡은 것이기에 취소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접종 후 나타나는 일종의 후유증들이 방광염 증상을 눌러줘 잠시나마 이 고통스러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기대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접종 5시간이 경과하자 몸살 비슷한 오한과 함께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방광염 통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약국 약도 듣지 않는 초유의 상태였다. 당장 이틀 뒤부터 목사님 댁인 OC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오자마자 통증을 고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은 이틀 안에 어떻게든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구글을 켰다.
‘미국에서 방광염 걸렸을 때’
혹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아주 많진 않았지만, 몇 개의 관련 포스팅을 찾을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비대면 진료 과정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놓은 포스팅을 발견했다.
그 후기를 따라 곧장 Goodrx 사이트에 접속해 증상명인 UTI를 입력했다. 설문지를 작성하고 신분 확인 절차가 끝나자 담당 의사가 배정되었다. 며칠간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하니 방광염 진단을 내리고 항생제를 처방해 주겠다고 한다. 약을 수령할 약국을 선택해야 하는데 하필 주말, 그것도 한밤중이라 당장 수령이 불가능했다. 오늘 밤은 포기하고 내일 가장 빠른 시간에 수령할 수 있는 근처 약국을 선택했다. 사실 방문가능 여부를 미리 전화로 확인하고 가는 것이 맞지만 이미 밤 9시를 넘긴 시각이라 불가능했다. 정상영업만 하는 곳이라면 문제없을 거란 생각에 그대로 진행했다.
다음날 아침,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잤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4시간 뒤 체크아웃을 해야 했기에 그전에 약부터 받아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약국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멀쩡한 상태라면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한여름에 아픈 몸을 이끌고 걷는 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힘에 부쳤다.
“Hello”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에서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약사가 나왔다. 처방전을 수령하러 왔다며 휴대폰을 보여주자, 그는 안경을 쓰고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늘 들어온 처방전이 없는데요.”
순간 내가 잘못 찾아왔나 싶어 지도를 켜서 확인해 보았다.
“여기 주소 아닌가요?”
예약 내역에 있는 약국 주소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저희는 이 약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요. 다시 확인해 보세요.”
분명 처방전이 발급되었다는 메시지와 주소도 정확히 입력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혹시 주말에 신청해서 누락된 걸까? 어쩜 내 인생은 이렇게 무엇하나 한 번에 되는 일이 없을까? 눈앞이 깜깜해졌다.
호텔로 돌아와 다시 담당 의사에게 채팅을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방전을 다시 보내주겠다며 다른 약국을 선택하라고 했다. 이번에는 엊그제 백신을 맞은 CVS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좀 전 약국보단 규모도 훨씬 크기에 적어도 물량이 없어서 퇴짜 맞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도보로 15분 남짓 걸려 도착한 CVS.
‘Pick up’이라고 쓰인 데스크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예약 내역을 건넸다. 확인해보겠다고 한 뒤 돌아온 직원의 손에는 역시나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저희 약국이 맞아요? Lin 이름으로 내려온 처방약이 없는데요?”
- “한 시간 전에 신청했거든요. 준비가 됐다고 해서 온 건데…”
결국 또다시 빈손으로 약국을 빠져나왔다. 모든 상황이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20분 남짓한 거리를 또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주 끔찍했다.
호텔로 복귀하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질 틈도 없이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제는 응급실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건 자연 치유될 병이 아니다. 이쯤 되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백 불이 청구되건 삼백 불이 청구되건 일단 사람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내 손가락은 서서히 다이얼을 향해 뻗어갔다.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CVS Pharmacy: Your prescription is ready for pickup at CVS Pharmacy, 1234 Main St. Order #567890
좀 전에 방문한 약국에서 약이 준비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이렇게 매번 벼랑 끝에서 구조되는 내 삶이 참 신기했다.
왕복 1시간을 걸어 다니느라 체력이 바닥난 나는 결국 우버를 불렀다. 고작 15분 거리였지만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사는 나를 보더니 뒤에서 갈색 봉투를 들고 나왔다. 영수증에는 내 영문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한번 더 모바일 내역과 대조해 본 뒤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약국을 빠져나왔다.
돌아오자마자 봉투를 열어보니 주황색 통에 대략 10회분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미드에서 종종 등장하는 욕실 내 메디슨 캐비닛에 수놓아져 있는 약통들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물과 함께 한 알을 삼킨 뒤 급히 짐을 챙겼다.
약효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왜 우리가 아플 때 병원을 가고, 의사 처방약을 먹어야 낫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시중에서 파는 약과는 효과가 확연히 달랐다. 가는 내내 여전히 열이 계속 오르는 듯했지만,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택시에 탑승하자 몸의 힘이 서서히 빠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