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살이가 그리 꿈만 같지 않은 이유
산타바바라에서의 어학연수를 마친 후 오랜 시간 알고 지낸 목사님 댁에서 미국 한달살이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교포이시며,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목회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오셨다. 그때 교회에서 사모님을 만나 결혼하셨고, 첫째를 낳자마자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목사님과 교제할 당시, 사모님은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나운서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사님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넘어가 목회를 할 예정이었으며 그 안에 꼭 결혼을 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다. 분명 두 분 사이에 많은 논의가 오갔을 것이고 목사님도 자신의 계획을 꾸준히 어필하며 사모님을 설득했을 것이다. 결국 사모님은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택하셨다.
이유가 어찌 됐든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결혼과 미국 생활이라는 큰 결심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목사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고, 본인도 언젠가는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더 컸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머무는 목사님 댁은 미국의 전형적인 단층 주택에 차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와 작은 마당이 딸려있었다. 내부는 욕실 두 개, 방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중 방 세 개는 에어비앤비처럼 다른 교회 청년들에게 렌트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총 한 달간의 숙박 기간을 잡고 350불의 렌트비로 합의가 되어 있었으나, 오랜 시간 알아온 남다른 사이이기도 해서 300불로 깎아주셨다.
방의 크기는 어학원 기숙사보다 훨씬 넓었다. 넉넉한 사이즈의 옷장과 120cm 정도 되는 긴 책상, 그리고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도 매트를 깔아놓고 팔다리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충분히 남았다.
‘똑똑’
사모님께서 방문을 두드리셨다.
“우리 지금 저녁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
오래간만에 맡는 김치찌개 냄새에 먹기 전부터 침이 고였다. 나름 한식 없이도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보니 한국인에게는 역시 한식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렌트비에 식대는 포함이 되지 않아 끼니는 따로 해결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집밥도 차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환영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식탁에는 여섯 살 난 아들과 세 살 된 딸, 그리고 사모님의 여동생이 함께 앉아 있었다. 여동생은 이곳에서 방학을 보내려고 왔다고 한다. 첫 미국 방문이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관광할 생각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언니를 도우며 조카들을 돌보느라 베이비시터로 전락한 듯 보였다. 여섯 살, 한창 말썽을 부릴 나이의 아들과 어린 딸을 동시에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사모님께서 한숨 돌리실 수 있을 것이다.
“와 너무 맛있는데요? 요리를 배우셨어요? “
“자연스레 늘게 되더라고, 하다 보니까. “
역시 환경이 사람을 바꾸어 놓나 보다. 요리에 요자도 관심 없는 나와 달리 벌써 기본적인 요리 실력을 갖추며 완벽한 주부의 길로 들어선 모습이 놀라웠다.
“근데 외롭지 않으세요? 목사님도 하루 종일 나가 계시고, 저녁때까지 아이 둘을 혼자 돌보셔야 하는데…”
“처음엔 외로웠지. 근데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다 보니까 그마저도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래도 가끔 부모님이 보러 오시기도 하고, 교회 모임이 있으면 나가서 바람 쐬고 오려고 하고 그래.”
이곳에 오자마자 면허를 취득하셨다고 한다. 아이들 어린이집 등하원을 위해서, 또 남편이 부재중일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운전면허는 필수라고 한다.
식사 내내 아이들을 먹이느라 제대로 숟가락을 집을 틈이 없는 모습을 보며 육아는 정말 보통 난이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는 집은 역할분담이 필수인 듯하다. 한 사람이 먼저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아이를 케어하는 동안 남은 한 사람이 후다닥 식사를 하는 등 서로의 호흡이 맞아야 한다.
“어학원은 어땠어? 주변관광 많이 했어? “
“네. 그래도 서부는 한 번씩 다 훑고 온 것 같아요. 그래도 사모님은 오래 사셨으니 많이 다녀보셨겠네요? “
“난 가본 곳이 거의 없어. 며칠 전 동생이랑 애들 데리고 디즈니랜드 다녀온 게 다야. 그마저도 아들이 보채서 일찍 와버렸지. “
이곳에 온 지 5년이 넘었기에 어느 정도 영어 실력도 늘고, 주변 관광도 많이 해보셨을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여행은커녕 하루하루가 전쟁이라 앉아서 공부할 틈도 없어 보였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언니”가 아닌 사모님으로 불러야 하는 현실에서 둘 사이에 왠지 모를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물론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겠지만 이제는 한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 둘을 둔 엄마라는 사실에 마치 큰 어른을 대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국살이’, 말로만 들었을 땐 꿈만 같았다.
그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강한 동기부여를 얻어 나도 언젠간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국 어느 나라건 삶의 터전을 잡고 나면 한국이나 외국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한때 해외살이를 꿈꾸었던 사람으로서 시민권자와의 결혼이 다른 옵션들에 비해 훨씬 수월할 것이라 여겼지만 이 또한 굉장히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본인만의 일이 있고 회화 실력도 어느 정도 받쳐준다면 좀 더 수월하겠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애서 오직 배우자 하나 믿고 따라오기엔 감당해야 할 짐들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삶에 주체가 빼앗긴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한 달은 미국살이, 결혼에 대한 환상보단 오히려 현실적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엿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겉으론 빛나보이는 모든 것들이 막상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