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기를 거부하는 여자
이곳에 오면서 나의 캘린더는 공백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로스앤젤레스에서 벗어난 외곽이라 주변은 온통 주거지였으며 차가 있지 않는 이상 근교 여행조차 불가능했다. 따라서 매일 나갈 일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집콕행이었다.
그렇게 내가 내린 첫 번째 무모한 도전은 운전 연수다. 한국에서도 운전대를 오래 잡아본 적 없어 장롱면허 신세를 면하지 못했기에, 이곳에 온 김에 경험 삼아 운전을 배워보는 것도 색다른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연수비를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지만.
이리저리 온라인 카페를 오가며 OC에서 운전 연수를 하고 있는 한 한인 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연수 목적을 묻자 면허 취득이 아닌, 그저 장롱면허 탈출에 초점을 맞추고 운전 감각을 되찾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이틀 뒤 첫 연수 일정을 잡고, 총 3일간의 연수 일정이 시작되었다.
DAY 1
아침 9시, 강사님께서 흰색 기아 차량을 몰고 집 앞에 도착하셨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분이었다. 이곳에서 20년 이상 강사 생활을 사고 계신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 룸미러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강사님도 영락없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었다.
“운전 안 한지 오래됐다고 했죠?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그는 미국의 스톱 사인, 좌회전 신호 읽는 법, 주정차 규칙 등 한국과의 차이점을 예로 들며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운전은 실전이니 배우면서 감을 익히기로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돈 뒤 바로 자리를 바꾸어 탔다. 눈높이에 맞게 등받이를 조절하고 사이드미러를 수정한 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여기는 차가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알겠죠?”
“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을 천천히 떼었다. 긴장감에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에 힘을 서서히 뺐다. 주거 지역이라 스톱 사인이 유난히 많았다. 근처에 보행자나 차량이 없어도 사인이 보이면 멈춘 후 3초 정도 후 출발하는 습관을 먼저 길들였다.
그다음은 코너링 연습. 우회전보다 좌회전이 살짝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고 집중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감으로 핸들을 돌리다 갑자기 의식적으로 임하려니 코너링을 시작하는 지점을 지나치게 크게 혹은 너무 좁게 도는 실수를 했다. 그래도 주변에 차가 없으니 어느 정도 부담은 덜어낼 수 있었다.
“감이 없진 않네요. 몇 번만 더 배우면 금방 익힐 것 같아요.”
“정말요?”
가끔씩 들려오는 선생님의 칭찬이 자신감을 북돋웠다. “감각이 전혀 없다.”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될 것 같다.” 등의 최악의 코멘트를 면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Day 2
둘째 날은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주행에 들어갔다. 스파르타식이지만 초단기 연수인 만큼 배울 수 있을 때 최대한 경험을 많이 쌓아야 했다. 그래도 고속도로 주행을 시킨다는 것은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한 실력이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니 더 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불타올랐다.
“헌팅턴 비치 가봤어요?”
“아니요.”
“그럼 오늘은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할게요. 나중에 렌트하면 친구들하고 꼭 가보세요.”
고속도로 입성 기념 캘리포니아의 3대 비치라고 불리는 헌팅턴 비치, 뉴포트 비치, 라구나 비치까지 세 곳을 둘러보는 코스를 계획했다. 단순히 운전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관광객인 점을 배려해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알려주시는 강사님의 배려심이 돋보였다.
“속도 좀 더 내도 돼요. 너무 느리게 달려도 고속도로에서는 위험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레이크에 있던 발을 떼고 엑셀을 지그시 밟았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1차로가 추월차선이에요. 빨리 가는 차량들에게 양보하는 차선이죠. 평소에는 2, 3차로에서 주행하다가 추월할 때만 좌측으로 들어가면 돼요.”
중간중간 강사님이 차선 변경 지시를 내리셨다. 깜빡이를 켜고 사이드 미러로 뒤차를 확인한 뒤 서서히 라인을 타며 차선을 변경하는 연습을 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의 긴장이 풀리고 잡생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30마일에도 지레 겁먹던 내가 이제는 50마일 이상으로 달려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훗날 자차를 끌고 월마트에 장 보러 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더 이상 뜨거운 태양볕아래 땀 삐질삐질 흘리며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고작 20분 거리 남짓한 곳을 가자고 왕복 60불 가까이 소비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기 보이는 절벽은 뭐예요?”
오른쪽으로 펼쳐진 바위와 절벽이 있는 독특한 해변 경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도 모르게 계속 오른편으로 눈길이 갔다.
“저기가 바로 라구나 비치에요. 이젠 주변도 돌아볼 여유가 생겼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사진 찍는 시간도 드릴 겸 이쯤에서 잠깐 쉬었다 갈까요?”
혼자였다면 절대 와볼 생각조차 못했을 곳을 연수를 통해, 그것도 내가 직접 운전해서 왔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뿌듯함 밀려왔다. 연중 따스한 기온에 차만 있다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해변들로 둘러싸인 LA의 삶에 대한 동경이 갈수록 커졌다.
D-3
캘리포니아답지 않게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연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비 오는 날에도 운전대를 잡아볼 기회를 주는 것이 놀라웠다.
“오늘은 비가 오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오히려 이런 날은 차가 많지 않아서 운전하기 좋은 날이죠.”
오늘도 마찬가지로 고속도로를 탔다. 사실상 OC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넘어가려면 고속도로는 피할 수가 없다. 굳이 빠른 길을 놔두고 이리저리 삥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기회에 에 고속도로에 대한 두려움을 최대한 떨쳐내야 했다.
비 오는 날 이른 아침 도로의 모습은 마치 전세 낸 듯 매우 한산했다. 괜히 내 옆을 지나가는 차들을 눈치 볼 필요도, 차선 변경할 타이밍을 잡으려고 힐끔힐끔거릴 필요도 없었다. 왠지 어제보다 좀 더 자신 있게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간의 연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오늘이 될 것이다. 짧지만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장면, 바로 비 오는 날 롱비치 해안을 따라 운전하던 순간이다. 이름처럼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을 달리자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자꾸 왼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강사님.. 너무 멋있어요."
"그렇죠? 비 오는 날이 훨씬 운치 있죠? 그래도 앞을 보면서 운전해야 돼요 자꾸 옆을 보면 안 돼."
빗방울로 가득한 창 너머로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짙은 회색빛 파도가 세차게 출렁였다. 차 안의 따뜻함과 빗속의 정적이 어우러져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느낌.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혼자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이 마치 자동차 광고 속 한 장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