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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Sep 29. 2024

혼자 가도 둘이 되는 곳, 라스베이거스

나 홀로 베가스 여행을 계획하게 된 데에 자신감을 북돋아 준 의외의 인물이 있다. 바로 한인 렌터카 업체 사장님


운전 연수를 마치자마자 다운타운에 위치한 한 렌터카 업체를 찾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보니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고작 3일 연수받은 실력으로 여기저기 운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걸 차를 빌린 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결국 렌터카는 이틀 동안 시동 한 번 걸려보지 못하고 차고지행이었지만 다행히 OC에서 다운타운 LA까지는 문제없이 주행한 덕에 차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로 반납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렌터카 사장님이 카풀을 해주셨다. 가는 내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내가 어학연수생이라는 걸 듣고 관광은 많이 해봤냐고 물으셨다. 코로나 때문에 액티비티가 많이 취소되어 샌프란시스코에 가본 게 전부라고 하자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서부에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제가 혼자라서요. 친구들도 다 돌아갔고요.”


“베가스 같은 곳은 괜찮을걸요? 가는 김에 그랜드캐년 투어까지 묶어서 가도 좋고요. 제가 사이트 몇 군데 알려드릴게요”


“혼자 가도 괜찮을까요?”


“고객님은 혼자 가셔도 충분히 재밌게 놀다 오실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 문장에 담긴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왠지 모를 긍정적인 기운을 얻었다. 사실 혼자 못 가는 것보다는 혼자 갈 용기가 없었던 것에 더 가까웠다. 다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나 홀로 거니는 상상을 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이 망설여졌을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상관없다.”라고 말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히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흥 중의 즉흥으로 떠난 베가스 여행은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끼워졌다. 연착으로 악명 높은 미국 국내선의 시스템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이륙 예정이었던 유나이티드는 1시 30분이 되어도 2시가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항공기 문제로 탑승이 지연된다는 소식 외에 별다른 정보가 없자 점점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침 7시부터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물밖에 없던 터라 점점 허기가 져 내친김에 밥이라도 먹고 올까 고민했지만 언제 비행기가 정상화될지 몰라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오후 3시, “Now Boarding”이라는 사인이 뜨며 탑승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든 승객이 착석했음에도 불구 비행기는 엔진 소리만 낼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좁디좁은 이코노미석에 1시간을 꼬박 앉아 있었을 즈음 모든 승객은 하차하라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기장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관제탑에서 이륙 허가가 나지 않고 있으니 별도의 안내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4시를 향해가는 시곗바늘을 보니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일정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미리 예약해 둔 100불짜리 헬기 투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후 9시 픽업 예정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7시에는 도착해야 했다.


혹시 몰라 날씨 앱을 확인해 보니 안내와는 다르게 베가스는 해가 쨍쨍하다는 정보가 나와 혼란이 가중되었다. 유나이티드 고객센터에 전화라도 걸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환불은 가능한지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나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거기서 거기일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승객들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별다른 소란 없이 얌전히 기다리는 승객들의 모습에 나 또한 그 분위기에 서서히 묻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약 3시간 동안 3번의 탑승과 하차를 반복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재탑승을 했을 때 시간은 이미 오후 7시를 향해갔다.


승객들이 모두 착석한 후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기체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땅에서 떨어지기 전까진 아직 모른다며 일단 가만히 있자는 옆사람의 말에 마음속으로 격하게 공감하며 창밖을 주시했다.


잠시 후 드디어 비행기가 빠른 속도를 내며 이륙을 시작했다.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 지자 곳곳에서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유쾌한 미국인들 덕에 노여움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뗏을때 내다본 창 밖 풍경은 숨이 멎을 듯이 황홀했다. 스트립의 야경은 말 그대로 눈부신 불빛의 향연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에 수천수만 개의 조명이 타오르듯 켜져 있었다. 그간의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후 9시 30분, 해리 리드 국제공항. 라스베이거스라는 이름답게 공항부터 반짝거리는 슬롯머신이 여러 대 놓아져 있었고 전방엔 welcome to las vegas 사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헬기투어에 낭비된 100불로 쓰라렸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이젠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뱃속이 꼬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출구로 나오자마자 훅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와.. 역시 사막지역은 다르구나.’


로스앤젤레스와의 더위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기가 무겁고 뜨거웠다.


“Link hotel please.”


게이트 앞엔 여러 대의 택시가 세워져 있었다. 굳이 일일이 주소를 말할 필요 없이 호텔이름만 대면 다 알아듣고 찾아가시는 듯했다.




체크인을 하니 시간은 벌써 오후 10시를 훌쩍 넘겨버렸다. 비행기로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무려 7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것이다. 고속버스도 이보다는 적게 걸렸을 것이다. 이 정도의 체력소모면 한시라도 빨리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맞지만 이대로 잠들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베가스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 자면 해가 중천에 떠있는 낮 3시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생수 두병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끼도 안 먹은 탓에 배가 몹시 고팠다. 이래나 저래나 밖에 나가야 되는 건 매한가지니 막판 스퍼트를 내 외출을 하기로 결심했다. 또 명색이 베가스니 후줄근하게 나갈 순 없어 화장을 수정하고 옷도 그럴싸하게 빼입었다. 조그마한 숄더백에는 생필품을 담아 올 토트백을 고이 접어 넣었고 셀카봉도 챙겼다. 혼자라도 할 건 다 해보자는 마인드였다.



베가스 스트립의 첫인상은 거대한 테마파크 느낌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네온사인과 번쩍이는 불빛들, 거대한 호텔과 카지노들이 마치 비현실적인 영화 세트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과장되어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또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듯했다.


급하게 물부터 사고자 들어간 CVS, 스트립 중앙에 위치해 접근성도 좋고 규모도 커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온 김에 간식거리도 몇 개 집어보고자 두리번거리던 중 어떤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농구선수 뺨찰정도로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얼굴은 한잔 걸친 듯 볼이 붉그스름했다.


"Oh, you beautiful."

".. Thank you."


멋쩍은 미소만 건네고 돌아서려던 그때 그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면 한잔 사고 싶은데"


...


"좋아요."


대답을 결정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3초 남짓, 굳이 승낙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심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었을 수도 있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 베가스에서의 첫날을 혼자 쓸쓸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음료진열대로 이끌었다.


"Any recommendations?"


종류가 차고 넘쳐 결정이 어려워지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가리킨 건 Truly.


고심 끝에 워터멜론 레모네이드 맛을 집어 들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항상 느끼지만 술 옵션이 다양할뿐더러 특히 캔으로 된 하드셀처(hardseltzer)의 종류가 무한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맥주는 싫어하고 또 매번 바틀에 든 술은 먹기 부담스러울 때 고르기 딱 좋은 선택지다.



우리는 각자 손에 Truly 한 캔씩을 들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에릭, 베가스에 10년 넘게 거주 중이라 한다. 그 정도 살았으면 별 감흥 없지 않냐고 묻자 그런 편이라 한다. 이제 첫발을 디딘 나는 모든 게 새롭고 차원이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데 십 년 이상 살면 어떤 기분일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중 카지노 얘기가 나왔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자 그는 당장 가자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이끈 곳은 플라밍고 호텔, 핑크색 네온사인에 비친 진짜 플라밍고를 보자 "Wow"가 자동으로 새어 나왔다. 베가스는 호텔마다 이름과 딱 맞아떨어지듯 콘셉트에 충실한 특징이 있다.

출처: 내 갤러리

슬롯머신에 앉았다. 마침 웨이터가 지나가자 그는 마시고 싶은 술이 있냐 물어봤다. 참고로 카지노에선 술이 공짜다. 이 사실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술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니, 한번 들어가면 왜 그렇게 빠져나오기 힘든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 물론, 팁은 줘야 한다. 따지고 보면 완전 공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얼마를 넣을지 망설이자 그가


"Lucky twenty."


행운의 20달러를 믿으라며 손가락으로 숫자 2를 표시했다. 너무 적게 넣어도 건질게 없을터 20불이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점수계산법도 룰도 모르는 나는 그냥 열심히 버튼만 눌러댔는데도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오자 고개가 점점 갸우뚱해졌다.


누적금액은 점점 가파르게 쌓이더니 결국 무려 240달러 상당의 잭팟이 터져버렸다.


자그마치 열 배 이상 불어난 금액에 입이 떡 벌어졌다. 246.3$가 선명하게 적힌 바우처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릭을 쳐다보았다.


"I told you luck twenty."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나, 종일 겪었던 모든 수고가 한 번에 청산되는 느낌이었다. 어쩜 내 인생은 뭐 하나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는지 비관하고 싶을 정도로 예기치 못한 변수의 연속이던 하루가 결국은 돌고 돌아 이런 보상으로 다가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과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두 번다시 슬롯머신 앞에 앉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행운이 두 번이나 찾아오리라는 법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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