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별/데이트일지
산타바바라를 떠난 지 2주가 다되어가던 즈음,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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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최대한 가보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여건이 안 돼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괜스레 서운해졌다.
‘괜찮아,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오후 1시'
때마침 사모님의 여동생도 내일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간도 얼추 맞겠다 잘됐다 싶어 목사님께 가는 길에 태워다 줄 수 있는지 여쭈어보기로 했다.
출국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한 시간 넘게 준비를 했다. 화장도 평소보다 공 들여하고 미리 입을 옷도 꺼내어 놓는 등 이왕이면 마지막 순간에도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사모님 여동생을 배웅한 후 한 시간 정도 공항을 배회하다 얼추 그의 도착시간이 가까워졌다.
공항을 한 바퀴 돌던 중 저 멀리 체크인 카운터 줄에서 금발 머리에 익숙한 야구점퍼를 입은 남성 한 명이 보였다. 잠깐 스쳐도 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먼저 연락해 볼까도 했지만 내심 그가 먼저 연락해 주길 바라며 먼발치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분 뒤 그에게서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숨을 한번 크게 고른 뒤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아직도 뭐가 그리 떨리는지, 마지막이라는 점과 동시에 몇 주간 못 본 공백에서 오는 어색함이 뒤섞인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Hey.”
그는 두 팔 벌려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품속에 안긴 몇 초가 영원 같았다.
“LA 못 가서 미안해.”
“괜찮아, 이해해. 이제 돌아가면 뭐 하게?”
“좀 쉬다가 다시 일로 복귀해야지. 쉬는 동안 이탈리아 음식 좀 맘껏 먹게.”
미국에 지내면서 음식이 안 맞아 많이 야위었다고 한다. 잠도 잘 못 잤는지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넌 언제까지 있게?”
“글쎄, 한 달 정돈 더 있지 않을까? 정해진건 없어. 돈 떨어지면 가는 거지 뭐.”
“그래 나처럼.”
서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타지 생활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깨달았고 또 깨달아가는 중이기에 보이지 않은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아쉬움에 일어나서도 몇 분간 서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 없이 너무 재밌게 놀지 말고, 아니, 재밌게 놀아야 되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말고. 우리.. 다시 볼 수 있겠지?”
“크리스마스, 약속했잖아. 노력해 볼게.”
마지막으로 가볍게 끌어안은 뒤 그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 그가 한 번 더 뒤돌아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계속 있다간 미련이 남을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푸르고 높아 보였다. 며칠을 혼자 지냈는데, 아니 앞으로 혼자 지내게 될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고작 한두 시간 같이 있었다고 그새 공허함이 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문득 세상에 익숙한 이별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미국인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은 스쳐 지나갈 법한 인연도 그냥 스쳐가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대체로 정은 많지만 개인주의가 강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이는 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면 미국인들은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일단 교류하고 본다. 누군가를 사귀면 그 사람을 통해 두 명, 세 명, 수많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 매우 신선했다. 인간관계에서 다소 폐쇄적이었던 내 관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베가스에서의 둘째 날, 지난주 주말 클럽에서 만난 대만계 미국인 Jay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베가스에 있다고 하니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하긴 일주일 간격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있으니 이제는 나도 내 다음 행선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지난주 클럽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 에밀리 기억나?”
“당연하지.”
“내일 걔네 집에서 생일파티할 예정인데 너도 같이 갔으면 해서. 에밀리가 너 소주랑 테킬라 좋아하냐는데?”
“와, 다 기억하네? 가야지 무조건. 나 내일 돌아가. ”
“몇 시에 도착해?”
“오후 세 시 정도?”
“그럼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
클럽에서 몇 시간 논 게 전부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흔쾌히 초대해 준 그의 친구들이 고마우면서도 신기했다. 나는 항상 내 서클에 변화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누군가 불쑥 끼어드는 것, 혹은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일방적으로 데려와 억지로 친해지려는 자리를 만드는 행위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편한 것은 물론 기존의 멀쩡하던 우정마저 금이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LAX 5번 터미널 앞에 흰색 혼다 스포츠카 한 대가 서 있었다.
“I missed you."
그가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다가왔다. 낮에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에밀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 클럽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의 나이와 직업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몇 살이야?”
“40번째 생일이야.”
“... 진짜?”
“설마 믿은 거야, 지금?”
외국인의 나이는 쉽게 감이 오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다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보다는 젊어 보였지만, 헤어스타일이나 목소리, 말투 등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서른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 가끔 들어.”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그래서 진짜 몇 번째 생일인데?”
“29.”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반응이 웃겼는지 계속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 해?"
"Entrepreneur."
"En.. trep.. it's like a tongue-twister"
예전 한창 영어공부할 때 발음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몇 번 연습하다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전직 군인이었어. 그러다 이제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방향을 틀었지."
그가 휴대폰 속 군생활시절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참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좀 더 빨리 갈까? 속도 내는 것 괜찮아?”
“그래.”
여사친도 태웠겠다, 명색이 스포츠칸데 굼벵이 기어가듯 천천히 달리면 멋이 안 살지 않나? 이 정도의 허세는 한 번쯤은 눈감고 봐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옆사람의 살짝 소금 쳐진 리액션도 더해져야 분위기도 살고 그의 기도 살 것이다.
그는 내 왼손을 스틱에 가져다 댄 후 그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그러곤 기어를 변속한 후 클러치를 깊게 밟았다. 부스터 달린 마냥 차가 앞으로 붕 뜨듯이 앞으로 슝 하고 뻗어갔다. 평소 밖에서 이런 스포츠카들의 엔진소리 들을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는데 막상 내가 타보니 사뭇 얘기가 달랐다. 소리가 주는 민감함보단 스피드가 주는 쾌감이 더 강했다. 거기다 울창한 팜트리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LA를 배경으로 하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엠버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역시 한국어 인사를 빼먹지 않는 센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꼭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주방 한가운데는 큰 카운터탑이 있었고, 그 위엔 파란색 일회용 컵들과 카사미고스 테킬라가 놓여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스타일의 테이블 세팅이었다. 제이가 갑자기 네임펜을 가져오더니 컵에 이름을 써 주겠다고 한다.
"Lin or Yelin?"
한번 흘리듯이 말한 내 본명을 기억하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하냐고 물었다.
"Yelin."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왠지 모를 다정함을 느낀다. 그냥 듣기가 좋다. 연애할 때도 애칭보단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곳에 오기 전 영어이름을 만들 때도 딱히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누가 불러도 내 이름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동떨어진 영어이름 보단 진짜 내 본명을 따서 만드는 것이 진짜 나 다운 것이라 생각했다.
제이가 본격적으로 요리 모드에 돌입했다. 오늘은 본인이 셰프라며 앞치마를 꽉 조여 매곤 심혈을 기울여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육즙이 흐르며 반짝이는 스테이크에 구운 마늘향이 더해져 군침을 자극시켰다. 제이가 한 점을 썰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백 마디 말 대신 엄지를 척 내밀었다. 웬만한 레스토랑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그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특이했던 점은 모두 반려견 한 마리씩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오는 인원수대로 늘어나는 강아지들 때문에 집안은 금세 도떼기시장이 되어버렸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동물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너무 경계하거나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척을 하자니 그것도 어색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중 나를 지켜보던 제이가 눈치를 채고 주변에 가드를 쳐 주었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족히 15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모이다 보니 한 곳에 모여 있기보단 각각 흩어져 다양한 스타일로 파티를 즐겼다. 나는 비어퐁 게임을 하다 싫증이 나면 카드 게임 그룹에 끼고 구석에서 위스키를 홀짝홀짝하고 있는 그룹을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가 한 모금 마시는 등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술은 백해무익하지만 확실히 긴장을 완화시키고 친밀감을 만들어 주는 데에는 한몫한다. 물론 이 모든 건 이방인인 나를 마치 한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대해주는 그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미국의 파티 스타일이 참 좋다. 술과 댄스 외 다른 활동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유흥과는 달리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소위 '액티비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파티는 하나의 즐거운 오락시간이 된다.
산타바바라 파티에서 세인트는 내가 OC로 넘어온 이후 만난 첫 남자이자 가장 자주 만난 남자다. 보통 현지인과 관광객의 만남, 특히 나처럼 체류기간이 짧은 사람과는 한번 내지 많으면 두 번이 최대치지만 그와는 총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샌디에이고에 거주한다. 내가 있는 곳 까진 차로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소요된다. 그 거리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심지어 일을 하는 중에 짬을 내는 것도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만남의 극초기 단계이기에 가능한 것도 없지 않아 있다.
"Hard to back and forth, huh?"
"Nah, you're worth it."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는 작은 인사를 건네면 그는 항상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화답했다. 계속해서 약속을 잡으려고 하고 새로운 곳을 구경시켜주고 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겐 그저 일상적인 데이트에 불과할진 몰라도 나에겐 외로움을 달래주는 치유제와도 같았다. "린아 놀자~"하고 날 밖으로 불러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이곳에선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
그와의 첫 데이트는 웨스트 할리우드. 이번엔 그의 친구들도 동행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즐길 엄두가 안 났던 웨스트 할리우드의 밤문화를 함께 즐길 사람이 생겨 기대감이 가득했다.
약속 당일 밤 11시, 난데없이 외출복으로 방문을 열고 나오는 내 모습에 목사님이 말을 걸었다.
"야, 어디가 너?"
"저 오늘 친구랑 약속 있어서요.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집 앞으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린아, 내 번호 없지? 저장해."
사모님의 말투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대단하다 너도. 오자마자 벌써 불러내는 친구도 있고."
"잘 다녀올게요."
겁이 원체 없던 사람이었던 건지 이곳에 오니 겁이 없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외로움 앞에선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하는 두려움보단 오늘 밤마저 방구석에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게 몇 배는 더 괴로울 것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집 앞마당, 차 한 대가 홀로 라이트를 켠 채 서 있었다. 세인트가 운전석에서 내려 천천히 다가왔다.
"Hey, how are you?"
세인트가 렌트한 지프는 매트블랙 색상에 탱크차처럼 거대한 몸집을 자랑했다. 무광이 주는 거칠고 남성적인 느낌에 압도되었을뿐더러 존재감이 강한 네 개의 바퀴는 웬만한 비포장도로도 거뜬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그는 출발과 동시에 엑셀을 깊게 밟으며 미친 듯이 속도를 올렸다. 본래 운전 스타일인지, 아니면 여자가 옆에 타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미지만큼이나 운전 실력도 과감하고 거침없었다. 평소 안전에 대한 불안증을 달고 살던 나로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당장 속도를 줄이라고 다그쳤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국이라는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일 수도 혹은 그저 그의 대담함에 몸을 맡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찾은 웨스트할리우드. 나이트라이프를 즐기기에 최적화된 곳답게 거리에 즐비한 펍, 라운지에서 쿵쿵 터질듯한 음악소리가 울러 퍼져 나왔다. 마치 주말의 홍대나 강남을 연상시키듯 술에 취해 인도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사람들, 시비가 붙은 사람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까지 더해져 아수라장이었다. 유흥이 발달한 곳의 모습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약 두 시간가량 여러 펍을 전전하다 숙소로 복귀했다. 세인트가 예약해 놓은 에어비앤비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방 3개의 화장실 2개, 대형주방과 자쿠지가 딸린 마당까지 완벽한 콤보였다. 그가 전부터 놓치면 후회할 거라고 왜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찬양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인트가 먹다 남은 테킬라 병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자쿠지 위에 있던 덮개를 걷어내자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서늘한 밤공기와 뜨거운 물이 만나는 순간 짙은 김이 퍼져나갔다.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남은 테킬라를 한 입에 털어 넣고는 곧바로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후끈하다고 느낀 로스앤젤레스의 밤공기도 자쿠지 안의 따뜻함 앞에선 차갑게 느껴졌다. 물속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별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