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종착지, 샌디에이고
나의 미국 생활 2부 OC에서의 여정에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해 준 인물은 세인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달 살이의 종착지는 그가 사는 샌디에이고였다.
예정대로라면 체류 기간이 이주 더 남아 있었지만 목사님 내외분과의 무언의 갈등 때문에 결국 한 주 더 앞당겨 돌아가기로 했다. 세인트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가 내게 제안한 것은 2박 3일간의 샌디에이고 여행. 이로서 미 서부 주요 도시는 거의 다 도장 깨기를 해보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같이 사는 친구한테 귀국 날 공항에 데려다줄 수 있는지 한번 물어봐.”
그가 첫날은 픽업을 해주기로 했지만 일 때문에 공항까지는 데려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글쎄.. 안 데려다줄 것 같아.”
사실 그에겐 오래 알고 지낸 친구네에서 머물 것이라고 둘러댔을 뿐 목사 부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겪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세인트는 당연히 우리가 친한 친구 사이인 줄 굳게 믿고 있다.
“그게 무슨 친구야? 같이 사는 친구가 공항도 안 데려다준다고? 말이 안 되는데? 그래도 물어는 봐 봐.”
“그래 알겠어.”
대답은 했지만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개차반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공항 드롭까지 물어보는 것은 염치없기도 하고 내 남은 자존심 한 톨마저 내던져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약속 당일 밤 9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인사조차 안 하는 사이가 되어버려 더 이상 그들은 내 동선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문 소리가 들리면 알아서 외출하는 줄 알겠지. 이젠 그들이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가에 세인트의 차가 홀로 라이트를 켠 채 서 있었다.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당연한 걸. 그나마 밤에 출발해서 안 막혔다.”
“다시 또 두 시간 내리밟아야 되는 거 알지?”
"못할 게 뭐야? 가는 길에 저녁도 먹고 들어가자. 애플비(Apple bee's) 어때?
"좋지, 안 그래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둘째 날 아침, 분주히 출근준비를 하는 그의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Morning”
따뜻한 아침햇살이 거실에 들어서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집은 레지던스 형태의 아파트먼트다. 헬스장, 풀, 루프탑 등 웬만한 어매니티는 다 갖추고 있어 혼자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내부는 방 한 개와 주방 겸 거실의 구조에 욕실에는 욕조도 딸려있다. 무엇보다 거실뷰가 풀을 마주 보는 구조라 개방감이 좋았다.
그의 출근길을 따라 나도 외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마냥 집에서 그를 기다리자니 심심할 것 같아 혼자 쇼핑이라도 나가보고자 했다.
“문을 안 잠가?”
도어록이 아닌 열쇠형태의 현관문을 그냥 닫고 가버리려는 그에게 물었다.
“응, 안 잠그고 다니는데? 내가 안에 있을 땐 잠그지만.”
살면서 문을 안 잠그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곳의 보안을 믿는 건지 아니면 남자라서 그런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집 아닌데 뭐 어때.’라는 안일한 생각에 그냥 지나쳤던 부분이 나중에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당연히 문이 열러 있을 줄 알고 레버를 당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뭐지?'
갑자기 방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세인트다.
“뭐야, 일이 벌써 끝났어?”
“아니.”
“그럼?”
“때려치웠어.”
“무슨 말이야? 뭔 일 있었어?”
그는 일하는 내내 사장과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불공정한 계약조건이나 근무환경을 운운하며 전부터 불만을 품고 있다 홧김에 관두겠다고 하고 나왔다고 한다.
“뭐 치고받고 싸운 건 아니지?”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쉽게 관두는 건지, 근무 기간이 어떻게 되는지 등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무엇보다 육체적 싸움으로 번진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그런 건 아니야.”
“됐어 그럼.”
“나 개 데리고 산책 좀 다녀올게.”
"그래. 다녀와."
그가 나간 후 난 방에 들어가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철커덕
그가 집을 나선 지 한 15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현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 두고 갔나?’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잠깐 들른 거라고 생각한 나는 다시 눈을 붙였다.
터벅터벅터벅
‘후우-’
가볍고 빠른 발자국 소리, 얕은 숨소리…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이 부릅 떠졌다. 가위에 눌린 마냥 옆으로 돌아누운 그 상태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누구야? 누군데 대체?’
혹시라도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이불속에서 입을 틀어막은 나는 귀를 쫑긋 세운채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Where are you?”
여자다.
그가 아니라 여자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대충 짐작해도 세인트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된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쩌지? 가서 말을 걸어야 되나? 그냥 계속 자는 척할까?‘ '제발 방으로는 들어오지 말아라 제발..'
마음의 메아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발자국 소리는 침실로 가까워졌다.
'아 제발…'
철컥
“Hello?”
X 됐다.
“Um, Hi! umm…”
캐주얼한 요가복 차림을 한 금발의 여성이 내 앞에 서있었다.
난 막 잠에서 깬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아.. 저 세인트 친구예요. 그.. 한 달 전 산타바바라에서 만나서 친해졌는데 한국에 돌아가기 전 얼굴볼 겸 잠깐 와 있는 거예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 홀로 이실직고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혹여나 오래된 연인사이로 오해받을까 총력을 다해 친구라고 선을 그었다. 정말 별 사이가 아닌데 별 사이로 오해받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저는 전애인이에요. 옷 가지러 집에 들르겠다 했더니 다짜고짜 오지 말란 얘기밖에 안 하니까 왜 그러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무언가가 있는 듯 양손을 허리에 짚은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그러는데 전 여기 여행 와있는 중에 잠깐 들른 거예요. 며칠뒤 한국으로 돌아가고요.”
“잘 됐네요. 전 그도 헤어진 상태예요. 지금 이 집도 동거하면서 공동명의로 한 집인데 지금 본인 혼자 차지하고 있는 거고요.”
그녀의 말로 비추어 봤을 때 이 집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듯한 상황 같았다. 게다가 둘 사이에 아직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꽤 많아 보였다. 그 와중에 집에 낯선 여자까지 있으니 환장할 노릇일 터 그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나는 동안 저를 너무 막 대해서.. 다혈질인 데다 화났을 때 공격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계를 끝냈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태까지 내게 보여준 행동으로 봐 선 그런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이 또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단정할 수도 없었다. 본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법 사람은 처음엔 누구에게나 다 친절하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근거도 없을뿐더러 진실은 둘만 알고 있을 뿐이다.
쿵쿵쿵
“Open the door.”
그 사이에 도착한 세인트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Where's my stuff?"
“Open the door!.”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나는 슬며시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대놓고 찍을 순 없지만 음성이라도 담기게끔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이 둘의 관계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결백할 수 있도록 증거를 남겨둬야 했다.
끝내 그녀가 문을 열자 세인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I told you not to come.”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 그녀가 일방적으로 찾아온 듯하다. 하필 그가 산책을 나간 틈에 도착했으니 타이밍도 아주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나는 반 이상 닫힌 방문 사이로 그들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싸우는 와중에도 그의 옆에 있는 개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그녀의 모습이 참 아이러니한 포인트였다. 개도 그녀를 반기는 걸로 봐서 오랫동안 봐왔던 사이임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제는 뭐? 애플비?
어젯밤 애플비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던 중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음을 깨닫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헤어진 사이이면서 일거수일투족은 다 알리고 또 짐은 안 돌려주고 무슨 이런 상황이 다 있단 말인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
“싫어, 내 짐부터 내놔.”
"다 가져갔잖아, 무슨 소리야?"
자신의 물건을 받기 전까진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겠다고 버티는 그녀와 어떻게든 밖에서 얘기하려는 세인트, 나는 혹여나 폭력으로 번질까 조마조마하며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려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세인트가 아무리 끌어당겨도 끝까지 문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주머니에서 차 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본 세인트가 귀신같이 바로 낚아챈 후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리려 했지만 그녀는 몸부림치며 저항했고 끝끝내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이젠 제 차 키마저 가져가 버렸네요."
"..."
"웬만하면 저 사람과 깊은 관계로 번지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내게 또 한 번 경고를 주었다.
"뭐 어차피 저도 내일이면 떠날 사람이라.."
"Open the door."
세인트가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Give me my car keys.”
“Open the door.”
“Drop the car keys.”
그녀는 자신의 차키를 내놓기 전까진 절대 문을 열지 않겠다고 대항했다.
“문 앞에 내 차키랑 짐 내려놓으면 열겠다고.”
'툭'
몇 초 후 세인트가 무언가 바닥에 내려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Walk away, walk away."
그녀는 자신이 키를 먼저 집을 수 있게 물러나라 한 뒤 잠금 레버를 돌렸다.
“Ok, just be careful”
그녀는 다시 한번 내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곤 나가버렸다.
한바탕 쓰나미가 몰고 간 듯 혼이 쏙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의 말대로 정말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혼란의 종착지는 오늘밤 거취다. 우리 집이 가깝기만 했어도 문제가 안되었겠지만 여기는 자그마치 샌디에이고다. 심지어 시각은 밤 9시를 향해갔다.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고민을 하던 중 세인트가 돌아왔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내가 어떻게 오늘밤 어떻게 발 뻗고 자겠어?”
“넌 지금 오늘 처음 본 여자 말을 믿는 거야? 한 달 전부터 알아온 내가 아닌?”
틀린 말은 아니다. 제삼자 입장에서 한쪽 말만 듣고 단정 내릴 순 없는 일이다.
“걔가 한 말은 다 지어낸 얘기야, 이 집도 나 혼자 살고 있던 집인데 본인이 일방적으로 드나들면서 눌러앉았던 거라고.”
사실 누구의 말이 사실이건 내겐 그렇게 중요치 않다. 지금 당장 내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게 문제일 뿐 어차피 이 또한 내일 떠나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래, 알겠어.”
“배고프지? 내가 저녁 만들어줄게.”
식사 후 세인트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목사님께 공항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그의 말이 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앞으로 볼일 없는 얼굴, 물어나 보자.'라는 쪽으로 생각이 점점 기울어졌다.
‘목사님 저 모레 아침에 떠나는데 혹시 공항에 바래다주실 수 있나요?
몇 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잠깐만, 일정 좀 확인해 보고.’
정말 일정이 있어서 확인한다는 뜻일까 아님 와이프에게 허락을 맡겠다는 걸까, 현재 내 직감으로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미안, 안될 것 같아.'
그럼 그렇지.
그의 답장을 확인하자마자 휴대폰을 끄고는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다 몇 분 후 울리는 벨소리
할머니였다.
거의 한 달 만에 듣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순간 목이 메일 것 같았다. 내 현재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다짜고짜 안부부터 물어보셨다. 나와 조부모님의 관계는 부모만큼이나 각별하다. 할머니손에 자란 세월을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어느 나라 할머니나 그렇듯, 손주가 그런 일을 겪고 있다 하면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다른 건 몰라도 나만 쏙 빼놓고 본인들끼리 밥을 먹는 게..”
이제야 본심이 튀어나왔다. 투명인간 취급보다 더 한 것이 음식 가지고 사람 차별 하는 것이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이제야 처음 깨닫게 되었다. 깨달을 필요도, 애초에 겪지 않아야 할 일을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당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빨리 와 그냥, 뭐 하러 오래 있어 거기에? 할머니가 돈 보내줄게 비행기값에 보태.”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사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고마워 할머니, 보고 싶어, 곧 갈게.”
전화를 하는 중 세인트가 슬며시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얘길 하는지 그는 전혀 알아들을 길이 없지만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임을 감지했는지 애써 기분을 풀어주고자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심야 드라이브는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심의 불빛이 창밖을 스치듯 지나가고 길가의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며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항상 이 순간이 다가오면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이 파노마라마처럼 스쳐간다.
“난 가끔 노래나 라디오가 아닌 고요 속에서 달리는 드라이브가 좋더라고.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나 바람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달리다 보면 여러 잡생각들이 점점 희미해져.”
그는 이내 앞 좌석 창문을 내리기 시작했다. 틈이 넓어질수록 바람이 더욱 세차게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바깥 소음도 점점 커졌다. 그는 반쯤 내려진 창틀에 팔을 살짝 걸치고 턱을 기대었다. 한여름의 밤공기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딱 적당한 온도였다. 잠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바람에 몸을 맡겼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야. 그 단순해 보이는 능력 하나가 얼마나 많은 기회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데, 넌 정말 대단해.”
그의 말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울렸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 나 자신을 노출시키며 값진 경험치를 쌓고 있음에도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간 해온 모든 노력과 선택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평생을 배워도 모자란 것이 바로 외국어 공부다. 나름 1년이면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겠거니 하고 왔지만 막상 현지인들과 부딪혀 보니 아직도 갈고닦아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여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앞으로 더욱더 성장할 나 자신을 기대하며 펜을 더 꽉 붙잡야겠다고 다짐했다.
삼십 분을 달려 도착한 영화관. 우리나라처럼 건물의 한 층에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가 영화관으로 쓰여서 마치 컨벤션 센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부는 레트로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마치 '기묘한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80년대 세트장 같은 느낌이었다. 살면서 영화관에서 카메라를 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만큼 내 눈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영화가 시작한 지 몇 분 채 되지도 않아 우리 둘은 금세 곯아떨어져 버렸다. 폭풍이 몰아친 하루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데다 영화마저 온통 영어로 도배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한 자장가는 없었다.
샌디에서의 마지막날, 첫 번째 목적지는 선셋 클리프.
거칠게 깎인 절벽 아래로 광활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힘차게 튀어 올랐다. 누가 남자 아니랄까 봐 그는 파도를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다며 아래로 내려갔다.
“세인트 여기 봐봐!”
파도가 맞닿는 방사제 끝에 홀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켰다.
걸음을 옮기니 한 곳에선 야외 결혼식장이 세팅되어 있었다.
“와 여기서도 웨딩을 하는구나?”
“복선 아니야 이거?”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뱉었다.
때마침 날씨까지 완벽해 참 날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랑신부와 하객 모두에게 잊지 못할 아름다운 웨딩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다음 목적지는 발보아 파크.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축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마치 유럽의 한 귀퉁이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허기가 진 우리는 슬슬 메뉴선정에 시동을 걸었다.
“Pizza?"
“Hell yes”
그는 고민도 없이 파파존스를 선택했다.
“Super stuffed ok? Super stuffed”
그는 꼭 Super sufffed로 시켜야 한다며 강조했다. 슈퍼스터프는 치즈크러스트처럼 피자 끄트머리에 치즈가 채워져 있는 옵션이다.
“파인애플은?”
“어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서 하냐?”
나도 모르게 손뼉이 절로 쳐졌다. 이렇게 나와 피자취향이 동일한 사람은 처음 본다. 개인적으로 씬피자 보단 두터운 피자를, 크러스트엔 꼭 치즈가 추가된 스타일을 좋아한다. 거기다 하와이안 피자라면 금상첨화.
우리는 주문을 한 뒤 테이크아웃을 위해 차를 타고 매장으로 향했다. 길가에 차를 세운 후 그가 후딱 가서 받아오겠다고 한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알겠지? 누가 문 두들겨도 열어주지 말고.”
“알겠어.”
자리를 잠시 비우는 그 찰나에도 내게 신신당부를 하는 거 봐선 실제로 그럴 말한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긴 한 가 보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다.
우리는 피자를 들고 발보아 파크 내 벤치로 향했다. 박스를 여니 따끈따끈한 온기와 풍미가 가득 퍼졌다.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이 합격. 도우 속 콕콕 박혀있는 파인애플에 육안으로도 흘러 넘 칠 듯한 치즈양이 침샘을 자극했다. 허기짐 때문인지 장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먹어본 피자 중 단연 넘버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흡입했으면 서로 맛있다는 말 한마디 던질 겨를도 없이 오로지 피자에만 집중했다.
몇 분 후 깔끔히 싹 비워진 피자 박스, 평소 라지 사이즈는 기껏해야 두 조각이 최대라고 나 자신을 과소평가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황홀한 식사였다.
발보아 파크는 각각 다양한 콘셉트의 가든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있는 데다 크기도 커 하루 안에 다 둘러보기도 힘들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한 곳에선 어느 4인 가족이 피크닉을 하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드는 아이들과 돗자리를 펼치고 이것저것 세팅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부모님의 모습이 왠지 모를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후 6시, LA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연착될 거라 예상했지만 웬일로 이번엔 칼같이 정시에 도착했다. 꼭 급할 땐 늦고 아쉬울 땐 제시간에 오는 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버스 왔다. 가야겠다.”
그는 내 가방을 들고 버스 안까지 들어와 선반 위에 올려주었다.
막상 마지막 인사를 하려니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서로를 몇 초간 바라만 보았다.
“잘 지내.”
“너도, 그동안 고마웠어.”
“보고 싶을 거야.”
그는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버스에서 내렸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 종료되었다. 무사히 몸 건강히 살아남음에 감사해야 할까, 스쳐간 인연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해야 할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림에 분통해해야 할까, 모든 감정이 뒤섞여 이리저리 흩어진 느낌이다.
좋은 기억이든 안 좋은 기억이든 이별 앞에선 모든 게 미화되는 듯하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처럼 순간순간을 최대한 소중히 여긴다 해도 막상 끝자락에 다다르면 모든 게 아쉬워진다.
정이란 게 뭔지, 항상 나 자신을 정이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라고 여기고 살아왔지만 제대로 느낄 만큼 특별한 인연을 만나본적이 없었을 뿐 사실 정이 꽤 많은 사람인가 보다. 특히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만남의 과정도 특별할뿐더러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에 더더욱 그 인연의 잔상이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다.
창 밖으로 스치는 샌디에이고 다운타운의 야경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