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짐을 싸던 중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사모님이다.
“키 좀 받아갈 수 있을까?”
“네.”
그녀는 키를 받자마자 휙 돌아섰다. 잘 가라, 조심히 가라 등 그 어느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뭘 기대한 걸까? 뭘 바란 걸까?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그동안 만난 모든 사람과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돌아가길 기대했는데 모두는 내 욕심이었나 보다. 온전히 그들의 그릇을 탓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나라는 착각마저 든다. 이렇게 애써 자책이라도 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가 보다.
살면서 가장 느끼기 싫은, 되도록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배신감이라 생각한다. 배신감이란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울화가 치밀어 말문이 막힐 정도의 수준이라고 표현해도 후련하지 않은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 또한 무뎌지겠거니 하면서도 왠지 이 엔딩만큼은 평생 납득하지 못할 것 같다.
아침 8시, 준비를 마치고 캐리어를 조심스레 끌며 하나씩 문 밖으로 내보냈다. 불을 끄기 전 빠트린 물건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 후 문을 닫았다. 줄기는커녕 늘어나있는 가방 개수에 무게는 출국날보다 두 배는 더 무거워진 듯하다. 그래도 이젠 목적지가 어느 또 다른 낯선 곳이 아닌 나의 집이기에 마음만은 한결 가벼웠다.
9월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날씨는 구름과 안개가 낀 회색빛 하늘 아래 기온이 약간 서늘했다. 블레이저를 꺼내 입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버가 오는 동안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보통 이럴 때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나 회상에 잠기곤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럴만한 일화가 별로 없다는 게 아쉬웠다. 굳이 꼽자면 나를 픽업하러 와준 친구들과의 재회의 순간, 외로울 때면 마당 앞에 나와 한국에 있는 친구와 한 시간 내내 수다 떨던 순간, 시모네와 작별인사를 한 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 어떻게든 외출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뙤약볕에 장바구니를 들고 왕복 40분 거리인 마트를 걸어 다녔던 순간… 손에 꼽을만한 특별한 추억은 없지만 한 달간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체크인을 하고 들어선 출국장, 걸어가던 중 스타벅스가 눈에 들어왔다. 가기 전 미국커피맛은 한 번 더 맛보고 가야 되지 않겠냐며 망설임 없이 줄을 섰다. 커피를 받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컵에 쓰인 내 이름을 보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름 알아듣기 쉬운 이름으로 지었다고 생각해도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가끔은 내 발음이 정확한지 테스트하기 위해 카페에 갈 때도 있다. 내 이름이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게이트 앞 대기석에 짐을 세워둔 채 자리를 잡았다. 우중충했던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그간 만난 모든 친구들에게 작별 메시지를 보냈다.
몇 분 뒤엔 제이가 동영상 하나를 보냈다. 영상 속엔 다름 아닌 물냉면이 있었다. 그의 생일파티 다음날 술병이난 서로에게 지금 가장 당기는 해장음식을 물었고 내가 지체 없이 물냉면이라 답했었다. 냉면을 처음 들어보는 그에게 이미지까지 보여주며 나중에 꼭 기회가 되면 먹어보라고 권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소하지만 꽤나 감동적인 포인트였다.
우리 모두는 이별의 순간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돌아선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별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덜어지는 느낌이다. 기약 없는 이별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린다.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앞으로 펼쳐질 일상을 버티게 해 줄 원동력이 될 것이다.
도피와 직면 그 중간 어디쯤에서 출발한 여정, 눈물을 훔치는 아빠의 모습을 뒤로하고 절대 이 경험을 헛되이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사실 1년을 준비했어도 뚜렷한 계획 하나 없이 무작정 발을 내딛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 펼쳐질지 꿈에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획이란 걸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그리곤 예상했다시피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할 변수들이 들이닥쳤고 어부지리로 그 난관들을 하나씩 잘 헤쳐왔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박수를 주고 싶었다. 수고했다고. 지금 당장 어떠한 큰 업적을 안고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몸으로 부딪히면서 쌓은 경험치는 언젠가 나에게 피와 살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학연수 3개월에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게 향상될 거란 기대는 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지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실전영어를 제대로 익힐 수 있었고 무엇보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일단 내뱉고 보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여기서 더 한 발짝 나아가 국내에서도 꾸준히 실력을 갈고닦는 다면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다음 여정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캘리포니아,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꼭 다시 방문하고 싶다. 이 말만으로도 내 석 달간의 여정이 얼마나 깊고 특별했는지 충분히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