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칫밥 먹는 신세
이곳에 머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부터 목사님 내외가 나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따뜻한 환영 덕에 마음의 안정을 얻고 앞으로 남은 날들이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라 믿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문제는 나를 완전히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의사와 별개로 항상 식사시간이 되면 간간히 내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먹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이제는 내가 집에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없는 사람인 양 나를 철저히 배제하고 본인들끼리 식사를 했다.
나를 대하는 룸메이트들의 태도도 상당히 달라졌다. 특히 욕실 옆 방에 거주하는 교포 언니와는 집에 있는 시간이 겹칠 때마다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안면을 트고 지냈지만 언제부턴가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스쳐갔다. 며칠 전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화장실에서 드라이기 떨어뜨린 적 있어요? 크랙(crack)이 생겼는데..."
굳이 되묻지 않아도 말속에 숨은 의도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네가 변기 깨뜨렸지?"라는 뉘앙스였다. 더 황당한 사실은 나를 포함해 무려 4명이 같이 쓰는 공용화장실임에도 불구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이젠 마주치기도 거북해져 그들의 말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목이 말라도 꾹 참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꾹 참다가 그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서야 방문을 열었다. 점점 이곳에서의 생활이 가시방석 같았다. 영락없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곰곰이 추측해 보았다. 두 분 중 어느 누구도 나와 대화해 보려는 시도조차 안 하니 나 혼자 원인을 도출해 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첫 번째, 교회에서 시작된 인연임과 동시에 직업이 목사인 만큼 내가 머무르는 동안 시간이 된다면 가급적 주일 예배에 참석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물론 첫 주는 참석했다. 호기심에, 또 한 번쯤은 가보는 게 인지상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간 적이 없다. 난 이곳에 놀러 온 사람이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관광객이다. 여행을 위해 이곳에 머무르기로 한 것이었으며 예배 참석이 필수라는 규율은 그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공짜 숙식도 아닌 엄연히 한 달 치의 렌트비를 이미 납부하고 지내는 사람이다. 아마 그들 눈에는 매일 꾸미고 외출하는 내 모습이 탐탁지 않게 보였던 것 같다. 특히 사모님의 눈에는 더더욱.
두 번째, 사모님의 입김
약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동안 사모님이 나를 그저 순수 목사님의 제자 중 한 명으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 한 달 전 도미토리 탈출기를 떠올려보자.
하룻밤 신세 지는 것을 흔쾌히 승낙한 목사님께서 금요철야예배가 끝나고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철야예배인 만큼 늦게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고 OC에서 베니스까지 오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혼자 오실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조수석 문을 열었을 때 차 뒷좌석에는 온 가족이 총출동한 상태였다. 사모님뿐만이 아니라 사모님의 여동생 심지어 곤히 잠든 두 명의 자식까지 다 데리고 온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탑승했지만 가는 내내 뒤통수가 뚫어질 것 같은 느낌에 거의 6년 만에 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집과 교회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처자식을 내려주고 오는 게 번거로워 동행시킨 것일 수도 있기에 섣불리 넘겨짚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주 전 사모님의 차를 타고 주일 예배로 향했을 때 집에서 교회까지의 거리가 고작 15분 남짓이라는 점을 알게 된 이후로는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여자 룸메이트들을 대하는 사모님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첫 1~2주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유키가 이곳에 왔을 때 흔쾌히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도 하고 외부 점심 약속이 있을 때도 나를 동반시키는 등 누구보다 잘 챙겨주셨다. 하지만 이젠 내 이름은 쏙 빼고 다른 룸메이트들만 불러들인 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입김과 의견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님마저 갑자기 나와 거리를 두는 것으로 봐선 나에 대한 어떤 불만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나를 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태도다. 남도 아니고 봐온 세월이 몇 년인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간에 대화로 풀어보려는 시도조차 안 하고 그냥 무시로 일관하는 모습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들은 내 부모가 아니니 내 생활방식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다.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은 알기에 대화보다는 그냥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쪽으로 결정을 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매우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하루는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져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 소식을 반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심지어 우리 가족과도 안면을 튼 사이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 믿고 보낸 건데 이런 취급이나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이제 슬슬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