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소년에게 지지와 격려가 필요해
학기 말이 되어 좀 지쳐 있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정기적으로 나가는 모임을 당분간 쉬기로 했다. 숲길 산책을 하고, 떠오르는 초승달도 맘껏 쳐다보며 여유를 부려보기로 작정하였다. 퇴근하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김 선생님 나 집 나왔는데 집에 놀러 가도 돼요?”
“그러세요.”
안 선생님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게 감성적이고 그걸 절절하게 글로 잘 표현해서 우리에게 작가로 통했다. 우리는 답사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데, 생각이 열려있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결혼이 늦어서 아이들이 조금 어린 편인데 그 아이들을 항상 답사에 동참시켰다. 어린 녀석들이 기특하게 답사를 잘 따라다녔다. 뙤약볕에 징징대지도 않고 구석구석 잘 따라다니는 데다 먹는 것도 잘 먹었다.
그러던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최근 2~3년 동안 엄마의 말은 모두 거부한다는 것이다. 매일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학교만 갔다 오면 안하무인 오락만 한다고 했다. 엄마와 가는 답사는 생각도 하기 싫다며 엄마와는 슈퍼도 가지 않으려고 하고. 엄마의 말을 모두 잔소리나 간섭 정도로 받아들여 진심 어린 걱정의 말도 할 수가 없단다.
엄마로서 녀석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열이 정수리까지 뻗쳐 견딜 수가 없지만, 입만 열면 정면으로 대거리하며 싸우는 상황이 벌어지고 결국, 상황을 악화만 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학기 초에 대안학교를 며칠 보내 보기도 했단다. 아이는 의외로 잘 적응하고 좋아했지만, 엄마가 여러모로 불안해서 다시 데리고 내려왔다. 그런데 그걸 빌미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친구가 없는 것도 자신이 방황하는 것도 모두 엄마 때문이라며 막 나가고 있다고 했다.
생각다 못해 아빠가 내린 처방이 아이와 엄마가 얼굴을 서로 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엄마는 출근하고, 퇴근 이후 밖에서 떠돌다가 아이가 잠들 12시쯤 되면 집에 들어가기로 했단다. 그 와중에 우리 집에 들른 것이다.
그 아이와 우리 아들이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데다 혼자서도 잘 논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남에게 간섭받거나 야단맞는 걸 싫어한다. 남이 좋다고 해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정해져야 행동하고 시도한다. 한번 마음먹으면 야무지게 잘한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매사에 신중하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마음을 닫아 버린다. 그래서 닮은 꼴 우리 아이가 어떻게 사춘기를 넘겼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물론 우리 아이도 사춘기를 겪었다. ‘참 쉽지 않구나’ 여겨지는 고비도 있었다. 내 마음대로 아이를 요리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독립된 자아이고 그 자아를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 잘하고, 성공해야만 아들로 대접해 주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삶에 대한 지지와 응원자가 필요했다. 부족하지만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가는 길이 그르지 않다고 끝없이 격려해 주는 아군이 필요했다.
“이쪽은 도랑이 있으니 가지 말고, 저쪽은 마른 길이니 가라.” 이런 지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직접 가봐. 너도 충분히 길을 찾아갈 수 있어. 잘하고 있어. 힘들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라는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때로는 박수 쳐주고 때로는 함께 아파해주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너 공부를 이렇게밖에 못했어?”가 아니라 “괜찮아, 언젠가 네가 필요하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인생을 단번에 결정하려고 하지 마. 고등학교 3년 안에 인생이 결정되지 않아도 좋아. 네가 진정 원하고 행복한 일이라면 5년이 더 걸린 들 어때? 너를 믿어.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아이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편해졌다. 아이의 부족한 자신감이 깨알만 큼씩 느는 모습이 보이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느긋해지고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스스로 부족한 것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 찾으려고 하고, 무엇보다 세상의 눈치 보지 않고 꿈을 정하고 꿈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을 찾았다.
내가 아는 목회자 한 분이 있다.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혼을 하면 처자식이 먼저 보여 진심으로 하느님의 목자로 살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결혼해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살림을 맡아하는 애처가로, 혹은 학교 운영위와 학원을 쫓아다니는 적극적인 아빠로 사는 것을 보았다. 결혼 전에 했던 각오는 철없던 시절에 품었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한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예외 없이 많은 부모가 보편적인 가치나 철학의 잣대를 잘 알면서도 자식에게만은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려 든다. 자식의 행복이나 꿈보다는 세상의 명예나 권력, 부를 갖는 것만이 행복이고 성공이라고 착각한다. 아이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갈등은 부적응이라고 한다.
안 선생님의 갈등도 거기에 있었다. 풀꽃 한 송이에도 감동하고, 대통령의 죽음에 진심으로 눈물 펑펑 흘릴 줄 아는 따뜻하고 마음 바른 사람이었지만, 자식의 삶 앞에서는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욕심이 났다. ‘잘 나가는 아이라면 이 시간에 공부해야 하는데, 학원 가야 하는데, 컴퓨터에 빠져 있으니 어느 세월에 공부해서 성공할래? 물려줄 재산도 없는데, 재산이라고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라는 소망이 전부인데, 지금 이렇게 놀고 있으면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 계속 이렇게 조바심이 났고, 조바심은 아이에게 잔소리나 간섭으로 표현되었다. 사랑이란 명분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의 미래를 벼랑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아이는 ‘내 맘 하나도 몰라주면서 엄마 맘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나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 ‘어떨 때 엄마가 마음 아파하는지를 잘 아니까 일부러 엄마가 싫어하는 일 나도 끝까지 하겠다.’ 그렇게 틀어져 버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엄마에게도 위로와 여유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었다. 이 순간은 잠시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토록 엄마를 거부하지만 실상 그 엄마의 사랑과 지원과 격려를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진정으로 너를 믿는다. 기다려주겠다. 힘내라. 늦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뭔지,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함께 찾아보라고 그런 마음으로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다독였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의 도를 닦는 일이다. 내 마음속 욕심의 찌꺼기를 닦아내는 일이며, 사람이 하늘임을 깨닫는 것이다. 아이를 통해서 내 삶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부족한 나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내가 만일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이애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이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