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배려
- 슈퍼우먼의 일상 -
“은실이는 집에서 엄마가 무서워. 아빠가 무서워?”
“엄마? 아니요. 우리 아빠가 더 무서워요.”
“왜?”
“우리 아빠는 꼬락서니가 더러워서 잘못하면 때찌때찌 해요.”
이 부장이 아침에 데리고 온 은실이가 사무실에 아빠랑 같이 출근해, 직원들의 짓궂은 질문에 집안 속내를 들춰내고 있다. 부부 직장인인 이 부장의 딸은 유치원생이다. 토요일 날은 유치원이 쉬는 까닭에 외할머니가 보살피셨는데, 외할머니가 입원하는 바람에 아빠를 따라나선 것이다.
“집사람이 절대 안 데리고 가고 싶어 해서…….”
여직원이 아이를 데려왔으면 궁상맞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 부장이 데려온 은실이는 이 부장의 마음씀이 엿보여 더욱 귀엽다. 이 부장의 배려를 마치 내가 받은 배려인 양 모두 기꺼워하는 눈치다.
여직원이 대부분인 직원들은 아직도 코흘리개 유치원에서 중학생까지 엄마 손이 아직 필요한 아이들을 모두 한둘씩 키우고 있다. 살림 때 자국을 직장에 가져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하루에 한두 번 이상은 아이를 키우는 선생님들의 휴대폰이 울린다.
“대문 열쇠가 없다고? 옆집에 가서 누나 올 때까지 놀고 있어.”
“아직 점심을 안 먹었어? 냉장고 열어서 엄마가 아침에 해 놓은 부침개랑 찌개 데워서 밥 먹고 학원 가야 한다.”
“숙제해 놓고 TV 봐라. 컴퓨터 하면 안 돼.”
당부를 하는가 하면,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 똘이가 아프니까 소아과 좀 데려가세요.”
모두 과부들이 아니건만 집안에 일이 생기면 거의 엄마가 홀로 해결하고 있다.
그와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의 전설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못지않은 열정으로 만났다. 우리의 인연 속에는 결혼 후 어떤 어려움과 역경도 함께 할 것이며, 부족한 점은 서로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무언의 약조가 있었다. 더구나 80년대 학교를 다녔던 우리는 이제까지의 낡은 악습과 부조리, 불합리한 현실도 과감히 변화시켜 간다는 전제도 있었다.
결혼 후, 그 기대가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점점 악처가 되어 갔다. 어쩔 수 없는 아줌마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직장에서 두 배로 긴장해 일하는 것은 그래도 나았다. 집에 도착하면 직장보다 훨씬 많은 가사와 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한창 갓난쟁이였을 때였다. 퇴근하면 하루 종일 시설에서 긴장했던 아이가 치마꼬리를 붙들고 칭얼댔다. 빨래하랴, 걷어 개키랴, 청소하랴, 요리하랴, 녀석을 업고 달래주랴, 머리에서 김이 후끈후끈 올라왔다. 딱 30분만 누군가 아이를 봐주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 한데 남편은 어떤 양해도 없이 밖에서만 바쁘다. 가사 따위, 육아 따위는 여자나 하는 가치 없는 사소한 일 인양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살아남아야 하는 악처의 말들이 방안 구석구석에 배어 냄새를 풍겼다. 육체로 힘든 것도 크지만 상대적인 심리적 박탈감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같은 직종인데 집에서 나는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할머니가 새벽같이 가족을 위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것이 행복이었고, 어머님이 밤늦게까지 부엌에서 부산하게 식구들의 손과 발처럼 봉사하는 것을 아늑하고 편안한 향수로 가지고 있는 그가 가사를 분담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었다.
신입직원 환영회 때였다. 노래를 부르라는데 기억나는 노래가 ‘뽀뽀뽀’밖에 없었다. 뽀뽀뽀를 부르는데 왜 눈물이 나오는가? 심한 정신적인 공황을 겪고 있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고 할까? 이대로 물거품처럼 스러질 것 같은 불안도 있었다. 나에게 투자하지 못하고 있다는 조급증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자의식 없이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말았으면 싶었다. 어설픈 자아가 나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아닐지.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살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의 삼분지 일을 밖에서 일하면서도, 우울증에 가까운 피해의식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힘들어하고 여유가 없을수록 남편은 다가와 손을 잡아주기보다는 멀리 물러나 제삼자가 되려고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식사 준비하랴, 아이 챙겨 보내랴, 출근 준비하랴, 정신없는 마누라 앞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보는 여유. 한 지붕 아래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배려하고 통해야 한다고, 작은 것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이 간절한 바람은 나를 힘들게 했다.
며칠 전 군 단위 노조 집행부 모임이 있던 날이다. 내가 없으면 아이들이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먹을 정도로 키웠다. 용 된 것이다. 하나, 여전히 집을 비운 시간이 그대로 구멍이 되어, 늦게라도 메워야 하기 때문에, 늦은 모임은 부담스럽다. 머릿속에서는 얼른 일어나 아이들에게 가봐야 할 텐데 하면서 시계를 보며 일어날 결심을 하던 차였다.
모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이 부장이 내게 귀엣말을 했다.
“집사람이 회식이라 집에 아이들만 있거든요. 먼저 집에 가봐야겠어요.”
상황이 나와 다를 바가 없지만 그런 이 부장이 나는 그저 고마워 선뜻,
“그러세요. 얼른 가보세요.”
그러면서 생각한다. 우리의 처지를 가장 이해받고 보장받아야 할 모임에서마저, 여자인 나는 주저하지만 남자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빛이 나는구나. 하면서도 마치 내가 받은 것처럼 그저 그 아름다운 배려가 고맙고 가슴 따뜻해진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데. 작은 배려 하나로 이렇게 마음이 젖을 수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