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 하루 종일 퇴사 후의 삶을 공상하며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 갔다. 사실 결혼식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반가웠다. 간간히 안부를 전하고 살지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학생 때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일하고,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그 일들이 너무 소중했고 의미 있었다. 열정이 넘치던 때였다.
20대 후반이 되어 대부분의 친구들은 일을 한다. 자기 밥벌이는 하며 사는 나이이다. 적당히 먹고 마실 돈이 있는 때.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곪아 있는 사람들만 넘쳐난다. 내 주변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한 친구는 최근 6개월 간 지인의 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 결과 임금 체불을 당했고 사람을 잃었다. 현재 몇몇 법적 절차를 밟는 중이다. 또 다른 친구는 대학병원에서 일을 한다. 매일 밤 보고서를 쓰고, 울고 싶은 것을 참는다고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일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그 순한 아이는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30살이 두려웠지만, 20대 후반의 나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다. 이 어정쩡한 나이가 괴롭다. 어린 시절, 회사에서 꿈을 찾기를 기대했었다.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멋진 직장인이 되기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하나둘씩 취업을 해나가는 주변인들을 보며 박수를 보냈고, 또 부러워했으며, 빨리 회사원의 삶에 편입되기를 소망했다. 평생 서울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살고 싶었다. 24살, 누군가 워라밸과 커리어 중 선택하라고 물을 때 주저 않고 커리어를 외쳤다. 20대에는 더 많이 배우겠노라, 그것이 나의 미래의 워라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말들을 해댔다.
이제는 그 열정이 모두 바닥나버린 지금, 나는 퇴근 후에 하루 종일 퇴사 후의 삶을 공상한다. 물론 나 역시 업무 시간에는 바쁘게 일한다. 의욕은 없지만 데드라인은 있으니 할 수밖에. 하루 종일 업무 요청을 하고 피드백을 듣다 보면, 내가 정신 차리고 들여다보아야 할 까다로운 문서들만이 남는다. 오늘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밤늦은 시간 업무를 본다. 또는 내일 아침의 나에게 맡겨두고 하루 종일 일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바쁘게 일하지만, 정작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아니, 영영 모르고 싶다. 그저 큰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
3년 반 정도의 회사 생활은, 적당히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다. 속이 곪아도 티 내지 않는 법. 보고하는 요령. 주말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법. 생각보다 월급은 적고, 그저 통장을 스칠 뿐이니 크게 기대하지 않는 마음가짐.
오랜 기간 꿈꾸던 업계에 들어가도 봤지만 결국은 사람을 갈아서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에 질렸다. 업계에 또 현타가 왔다. 전망이 좋다는 직무로 옮겨왔지만, 자꾸만 고민이 깊어졌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자꾸 들었다. 파릇파릇 열정 넘치는 신입사원들을 보면서, 내게 열정이 없음에 한탄하며 쥐구멍에 숨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저 열정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에게 실망한다.
의욕은 없지만 야근을 하는 삶. 주말에도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벽마다 알람을 맞춰두는 시간들.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아등바등 사는 삶이 너무 지옥 같을 때, 나는 정말 퇴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정년까지 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번듯하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직장인들의 꿈이 퇴사라지만, 나는 평균보다 한 뼘만큼은 더 진심이다.
이제 더 이상의 멋진 커리어를 쌓고 싶지가 않다.
- 적당한 워라밸을 보장받고 일할 수 있는 곳으로의 이직
- 제주도로 내려가, 가족의 일을 돕는 것
정말 진지하게, 올해 중으로 떠나겠다 마음을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그 지긋지긋한 위로에 더 이상 기대고 싶지 않다. 물론 조금 더 견딜만해지겠지만, 나는 삶을 견뎌내고 싶지는 않고,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내게 중요한 문제는 이제 커리어가 아니라, 그냥 큰 고통 없이 살아내는 것이다.
이직에 성공하면 좋겠다. 이직에 실패하면, 긴 휴식기를 가지며 나를 위로할 예정이므로 그 또한 괜찮다. 아등바등 살아도 큰 차이가 없다면 조금 더 행복하자. 내 밥벌이 정도만 하면 결국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추석 상여금까지는 받고, 회사를 떠나기로 한다.
30대의 나는 어느 방향으로든 안정을 찾고 있기를 꿈꿔본다.
나 자신을 보듬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