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밭이 생각하기에 따라 황금밭일 수도 있다.
내가 근무하는 은행은 타 은행에 비해 전국적으로 영업점 수가 적은 편이다. 국내 5대 시중은행만 하더라도 영업점 수가 수백개는 되는데 우리 은행은 100개도 채 되지 않는다. 본점을 중심으로 업무가 이루어지는 조직이고 본점 인원이 전체 지점인원보다 많다. 게다가 영업점의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신입행원으로 들어오거나 또는 이후에라도 한번 이상은 연고가 없는 지방지점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 첫 발령지는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지방지점이었다.
신입행원 연수를 마치고 사령장을 나눠주기전 사전에 발령받을 곳을 안내받았는데 나는 “OO지점”을 발령받은 사실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주변 동기들이 나에게 하나둘 위로의 말을 전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혹시 이직하는거 아니냐며 농담반 진담반 말을 건내기도 하였다.
금요일 인사발령을 마치고 토요일 하루를 지낸 후 일요일 캐리어에 짐을 간단히 챙겨 KTX에 올랐다. 그날 밤 지점 직원용 합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지점장님과 팀장님을 만나뵌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긴장된 마음으로 사무실에 출근하였는데, 지점장님께서는 점심메뉴로 개고기를 권하셨다. 그리고는 차를 타고 어느 한적한 시골 농촌에 있는 보신탕 가게로 나를 데려가셨다. 출근 첫날부터 먹은 메뉴가 개고기라니, 내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일이다. 신입이라 긴장된 마음으로 개고기 맛도 모른채 그냥 입에 쑤셔넣었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지금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몇 년전 한 변호사의 강의에서 개고기는 식품위생법상 식품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인 위생검역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다.)
지금은 은퇴하신지 오래되셨지만 당시 지점장님은 굉장히 유순한 분이셨다. 실적가지고 아랫사람을 쪼거나 그러신 분이 아니었다. “안되는 일은 빨리 접어라. 할 수 있는 일이나 제대로 해라”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덕분에 지점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했다. 나와 같은 단신부임자들이 많다 보니 퇴근하면 회식 또는 골프연습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MZ세대들이 들으면 기절 초풍할 일이지만 당시 지점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지점장님, 팀장님과 함께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아침에는 합숙소에서 함께 조식을, 중식은 마케팅차 방문한 거래처와, 석식은 거래처와 회식 또는 지점내 단신부임자들과 함께하였다. 석식을 마치면 다같이 골프연습 또는 술자리를 갔었다. 그러고 나서 나의 개인시간이 주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내 주변사람들에게 하면 “정말 힘들었겠다.” “고생 많았다.” 이런 말들을 하지만 당시 나는 이런 생활을 꽤 재미있게 즐겼었던 것 같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당시 같이 있었던 분들이 모두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를 힘들게 하는 분이 한분이라도 계셨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당시에 너무 개념이 없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윗분들을 좀 어려워했었다면 나도 그 자리가 편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워낙 개념이 없었다 보니 오히려 불편함을 전혀 못느낄 정도로 편하게 지낼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갔어도 당시 내 친구들은 취업준비생이 태반이었기에 나랑 시간을 보내줄 친구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서울에 올라와서도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월요일 출근이 기다려졌을 정도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라이프였다.
지방의 라이프는 아무래도 서울의 그것과는 달리 여유가 많았다. 숙소가 영업점 인근에 있다 보니 출퇴근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었고 어짜피 일찍 귀가해도 할 일이 없었기에 야근을 생각하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업무시간에 급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라이프는 나말고 다른 단신부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보니 야근중에도 간단히 게임을 해서 간식을 함께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 때 당시에도 이런 소소한 일상이 즐거웠기에 주말보다는 평일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거래처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바다노을을 멍하니 바라 본 적도 있었다.
서울 본점이나 영업점에 있는 동기들은 나를 불쌍히 여겼지만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얘기를 하였고 그럴 때면 다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들 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당시 좋은 사람들과 지방 생활을 즐겁게 즐기며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힘든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건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이었다. 현지에 지인이 없다 보니 때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 그리고 젊은 나이 임에도 이성을 만나기 어렵다는 점은 나를 매우 외롭게 했다. 그런데 나를 더욱 힘들게 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말들이었다. “OOO 대리는 여자 안사귀어?” “결혼 해야지” “너는 왜 지방 발령났냐?, 연수성적이 안좋았냐?” 이런 류의 말들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그런 말들에 쉽게 상처를 받거나 쉽게 우울감에 빠지곤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말들에 쉽게 반응하여 방황하곤 했던 시간들이 아깝게만 느껴진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좀 더 지방 라이프를 즐겼을 텐데 말이다. 퇴근 후 차를 몰고 평소에는 가보지 못할 곳을 구석구석 가보지 못한게 아쉽고, 지점 사람들과 더욱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는데 괜한 열등감과 불안감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나중에야 깨닳았는데 이런 마음의 원인은 내가 알게 모르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인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학교에서 받아온 가르침은 남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그것의 성취는 남들과 다른 대우였다. 비교와 경쟁에 익숙한 삶, 비교와 경쟁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처음 맞이하게된 사회생활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 투성이었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그저 남들의 시선에 따라 긍정/부정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어떻게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면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쉽게 열등감에 빠지곤 하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내가 서 있는 곳은 천국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곳이 천국인줄도 모르고 지옥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과의 비교에, 남의 시선에,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에서 나에게 부여한 어떠한 목표도 때론 부응하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노력은 하지만 결과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제 나는 다음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인기부서, 핵심 요직 등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어느 부서를 가던지 그곳 업무에 잘 적응하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기만을 바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