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의 카자크 음악 영상을 사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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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ook.so/posts/VntO4ka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도니프로강 하류의 자포리자 지역에서 아조프해로 흘러가는 돈 강 하류 일대, 그리고 아조프해 동안의 쿠반 지역에 이르는 스텝 지대에는 러시아어로 카자크(казак), 우크라이나어로 코자키(козак)라 불리는 슬라브계 군사집단이 살고 있었습니다. 중세 슬라브 왕국이었던 키예프 루스(가르다리키)의 후예로 정교회를 신봉하던 이들은 아트만이라 불리는 지도자를 따르며 종주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등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치를 인정받으며 농업과 목축에 종사했고, 때로는 오스만 제국 등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변발을 하고 멋들어진 수염을 길렀으며 품이 넓은 승마바지를 입고 날이 휜 기병도 샤쉬카를 찬 카자크 남성들은 타고난 기마 전사였습니다. 카자크는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제정 러시아, 소련 등에서 최정예 기병으로 명성을 떨쳤고, 심지어 나치 독일군도 소련군 소속 카자크 기병대를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은 훗날 거주 지역에 따라 상이하게 분화합니다. 자포리자 코자크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인의 원류를 이루게 된 반면, 러시아 영내에 거주하거나 러시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돈 카자크, 쿠반 카자크 등은 러시아에 동화됩니다. 중세 루스인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화한 것처럼, 애초에는 러시아에 속하느냐 우크라이나에 속하냐 하는 관념이 희미했던 카자크/코자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경, 영역이 굳어지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과 영역성을 갖는 집단으로 분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갈등이 극적으로 불거진 2014년 이후, 카자크/코자크의 역사와 영역성은 두 나라의 문화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는 카자크를 자랑스럽고 용맹스런 러시아의 전사로, 우크라이나는 코자크를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우크라이나의 용맹한 조상으로 재현하는 양상으로 말이지요. 이런 양상을 유튜브를 잘 살펴 보면 아주 흥미롭게 나타납니다.
우선 러시아 쪽의 돈/쿠반 카자크 관련 영상부터 살펴 봅시다. 아래 영상은 2016년 열린 쿠반 카자크 합창단의 공연 영상입니다. 옛 쿠반 카자크를 정교하게 재현한 합창단원들의 의상과 안무도 인상적이지만, 영상을 잘 살펴 보시면 정복을 착용한 러시아군 장교들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는 쿠반 카자크 합창단의 수준 높은 음악성과는 별개로, 쿠반 카자크의 음악이라는 문화 유산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정치적, 문화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러시아 측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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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쪽은 어떨까요?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는 카자크 합창단이나 예술 집단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우크라이나 출신의 반두라 연주자 예우헨 올렉산드로비치 아담체비치(Євге́н Олекса́ндрович Адамце́вич, 1904-1972)가 작곡한 자포리자 코자크 행진곡은 자포리자 카자크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곡으로 널리 사랑받는 듯 합니다. 아래의 영상에서는 폴란드의 대문호 헨리크 시엔키예비치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폴란드 영화 「불과 검(Ogniem i mieczem, 1999년작)」 의 영상을 배경으로 자포리자 카자크 행진곡이 연주됩니다. 영화 자체는 자포리자 코자크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투 노력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애국자들의 이야기지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영상에서 털모자를 쓰고 성호를 긋는 지도자처럼 묘사된 인물)의 지휘 아래 당대 동유럽 최강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를 격퇴하는 자포리자 코자크의 모습을 담은 장면은 우크라이나인 입장에서도 인상적이었는지 유튜브에서는 이처럼 「불과 검」 영화의 영상 또는 스틸컷을 자포리자 코자크 행진곡과 결합한 동영상이 제법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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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코자크의 역사적, 문화적, 영역적 정체성이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갈등과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두서 없이 살펴 보았습니다... 쿠반 카자크 합창단의 수준 높은 연주능력과 다섯 번째 영상의 주인공인 우크라이나 악단의 연주솜씨가 그저 아름다운 예술로만 감상할 수 있는, 전쟁이 끝난 뒤 평화가 돌아온 날이 다가오기를 고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