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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Dec 30. 2020

베를린 전투: 나치 독일의 패망과 냉전의 탄생

베를린 전투에 대한 지리학적 고찰

  1945년 봄에 접어들어 나치 독일의 패망은 사실상 기정 사실화되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은 반격이나 역습을 가할 여력은커녕, 전선을 유지할 최소한의 병력과 장비조차 태부족인 상태였다. 심지어 베를린의 비밀 벙커에서 히틀러의 주관으로 열린 작전회의에 사용된 지도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단과 군단, 야전군 등의 단대호가 무수히 꽂혀 있을 정도였다. 절대적인 병력 부족 탓에 나치 독일은,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로 국민돌격대(Volkstrum)라는 민병 조직을 창설하기까지 하였다. 국민돌격대는 이름만 그럴듯했을 뿐, 징집연령을 한참 초과한 40-50대 이상의 민간인들까지 징집하여 충분한 훈련도 없이 사복에 완장을 채우고 개인화기만 들려준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무장집단에 불과했다. 예비군을 조직하여 만든 국민척탄병(Volkgrenadier)은 그나마 국민돌격대보다는 무장이나 훈련 수준이 높았지만, 이들 역시 연령이나 훈련 수준 등에서 정규군이나 정예부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나치당의 소년단인 히틀러유겐트(Hitler Jugend) 마저도 무기를 쥔 채 전투에 참여해야 할 정도였다.

  나치 독일이 사실상 패망이나 다름없는 상황에까지 몰렸다고는 하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은 여전히 나치 독일의 통제 하에 있었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의 수뇌부도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어찌 되었든 전쟁의 지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패망을 앞두고 있다고는 했으나 나치 독일 국민들과 군 장병들의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한 지지와 충성심은 여전히 확고했고,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망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킬 군항 수병의 반란과 같은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반정부 운동이나 반란의 조짐도 없었다. 한때 스탈린은 나치 독일 내부에서 공산 혁명이나 폭동을 일으켜 나치 독일을 접수하고 공산화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으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국민과 군 장병들의 지지와 충성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에는 이 같은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이 독-소 전쟁, 나아가 2차대전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베를린을 점령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 수뇌부의 신병을 확실히 접수하여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내야 했었다.

  연합군의 승리가 기정 사실화되었다는 점은, 연합국 각국으로 하여금 베를린 점령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연합군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협력해 왔지만, 2차대전의 승리가 눈앞에 오자 그들에게는 전후 처리 문제가 매우 절실한 과제로 다가왔다. 종전 후 자국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 그리고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후 처리를 최대한 자국에게 유리하게 진행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전후 소련이 유럽과 국제 사회를 주도할 위상을 차지하기를 원했던 스탈린은 독일 영토, 그중에서도 베를린 점령에 심혈을 기울였다. 만일 서방 연합국이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한다면, 그만큼 전후처리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과 발언권은 제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탈린은 전후 독일을 공산화시켜 서구 국가들에 대항할 수 있는 소련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때문에 독일의 경제적ㆍ군사적 기반을 일정 수준 이상 온존 시킬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스탈린은 다른 연합국과 달리 독일 영내에 대한 전략 폭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2차대전 후 동서독의 분단, 그리고 동독이 동구권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들의 이해관계가 불거지고 냉전 체제가 성립된데 따른 결과에 앞서 이미 종전 이전부터 스탈린이 구상해 놓은 지정학적 전략이 실현된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2월 4-11일에 크림 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렸던 얄타 회담에서는, 연합군의 승리가 기정 사실화된 2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연합국의 주요 정상들(루즈벨트, 스탈린, 처칠)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 종전 후 독일과 베를린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4개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었다. 즉, 얄타 회담은 2차대전 이후 독일이 맞이할 분단이라는 운명을 결정지은 계기였다. 이 회담에 참여한 세 나라의 정상들은 각기 자국의 이해관계 및 정치ㆍ외교 전략에 따라 상이한 의도를 갖고 회담에 임했다.

  영국은 종전 후에도 기존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누렸던 제국주의 열강의 위치를 유지하려 했고, 따라서 제국주의 체제의 지속을 원했다. 따라서 영국은 인도와 중동 등의 식민지 유지를 위해 지중해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남유럽 국가에 친영 정권이 들어설 필요성도 있었다. 1942년부터 소련이 영국과 미국에 서부전선 형성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4월까지 늦어진 배경, 그리고 미군이 유럽이 아닌 북아프리카부터 상륙한 다음 이탈리아로 진격한 배경에는 이 같은 영국의 이해관계와 입장도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처칠은 1944년 스탈린과 남유럽 및 서유럽을 영국의 관할로, 중부 및 동유럽을 소련의 관할로 배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퍼센트 합의(Percentage Agreement)를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영국은 종전 후에도 제국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유럽 세계의 맹주 자리를 이어가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구상에는 과거 고립주의를 고수하며 유럽 문제에 대한 개입을 꺼렸던 미국의 정치적ㆍ외교적 기조가 종전 후에도 이어지리라는 심산도 깔려 있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확대를 꾀했던 소련은 독-소 전쟁 기간 동안 인명 손실만 2-3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대문에, 가급적 빠른 피해 복구와 더불어 장차의 전쟁 위협을 최소화하면서도 반공주의 국가들의 위협을 견제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소련 입장에서는 향후 또다른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소 전쟁과 같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완충지 또한 절실했다. 때문에 스탈린은 독일을 분단시켜 1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20여년 후 또다시 2차대전을 일으켰듯이 또다시 소련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할 위험성을 제거함과 동시에,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선 독일의 일부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련의 서쪽에서 서방 세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영역으로 삼고자 했다. 소련은 2차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만큼 전쟁에 기여한 부분도 컸기 때문에, 얄타 회담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다.

  종전 후 기존의 제국주의적인 국제질서를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무역 체제에 기반한 시장경제, 그리고 새롭게 창설될 국제연합에 토대한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루스벨트는, 서유럽을 이 같은 국제질서의 실현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다.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서유럽 부흥을 위한 대대적인 지원-마셜 계획 등-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런 루스벨트는 처칠과 달리 소련을 적대적인 공산국가가 아닌, 새로운 국제질서의 동반자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했다. 소련은 1930년대 말에 이미 독일과 더불어 세계 2-3위 수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정도의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달리 제국주의 국가에 해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루스벨트는 소련 또한 자유무역 체제의 구성원이자 파트너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게다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이어가던 미국 입장에서는, 태평양 전쟁의 조기 종전을 위해 소련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소련을 견제하면서도, 중요한 협상 파트너로도 여기고 있었다.

  얄타 회담은 세 나라 정상의 회담이었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처칠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채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회담을 주도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협상 결과 스탈린은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보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 같은 스탈린과의 '거래'를 통하여 우선 서유럽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국제 연합 창설을 기정 사실화하는 한편, 나아가 소련 및 동유럽과의 자유무역 또한 점진적으로 확대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반동으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확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동유럽을 소련에게 양보한다면 서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최소화 내지는 차단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이와 더불어 얄타 회담에서는 종전 후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을 1939년의 소련-폴란드 국경이 아닌 1918년 폴란드 독립 당시의 국경이었던 커즌 선을 기준으로 재획정하고, 이에 따라 동쪽의 영토가 축소된 폴란드의 영토는 독일 동부의 영토를 희생시켜 편입시키는 식으로 재편한다는 합의까지도 도출하였다. 결론적으로 얄타 회담은 2차대전 이후 유럽 각국의 영역과 분단이라는 독일의 운명은 물론, 냉전 질서의 지정학적 지도까지도 기초한 셈이었다.


  나치 독일 역시 자국의 패망이 눈앞에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역시 연합군에게 항복하더라도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소련이 아닌 서방 연합국에 대한 항복이었다. 나치 독일군은 인종주의와 변질된 레벤스라움 이념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소련인들과 소련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학살과 인종청소 등의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저질렀다. 이로 인해 무려 2-3천만 명에 육박하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은 소련이, 나치 독일에게 관대한 전후 처리를 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실제로 2차대전 후기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뒤에는, 소련군 역시 나치 독일군 전쟁포로와 점령지에서 탈출하지 못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1944년 하반기 이후 전투에 패한 나치 독일군 장병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련군이 아닌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한 사투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서방 연합군 역시 나치 독일과 적대시했지만, 소련과 달리 '열등 민족'이 아닌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등은 나치 독일군에게 소련군이 당한 수준의 가혹행위와 범죄행위를 당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이들의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은 소련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루르 공업 지대의 방어 임무를 맡고 있던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가 1945년 4월 20일 휘하 장병들의 전역을 명령하며 집단군을 해산하고 이튿날 자살한 사건은, 2차대전 말기 나치 독일과 독일군이 처했던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나치 독일군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미 나치 독일군 장병들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고, 동부전선의 수많은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의 지휘를 맡아 소련군에게 역습을 가해왔던 발터 모델은 부하들에게 최대한 소련군의 포로가 될 위험을 줄여주려는 측면에서 이 같은 조치를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전쟁의 지휘를 이어가던 히틀러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사실상 상실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나치 독일군이 대부분 궤멸되고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와 같이 전투력은커녕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전투에 나가서는 안 될 인원들마저 전투에 투입되는 상황 속에서도, 히틀러는 소련군을 베를린에서 격퇴하고 예비 병력을 모아 역습을 가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45년 3월에 이르러, 소련군은 베를린 근교로부터 6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 서쪽 100-120km 지점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서방 연합군에 비해서 소련군이 베를린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였지만, 서방 연합군의 진격 속도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치 독일의 방어선이 좁아진 만큼, 나치 독일군이 전력을 다해서 베를린 방어에 임한다면 소련군은 손실은 둘째 치더라도 자칫 서방 연합군이 먼저 베를린을 접수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서방 연합군이 베를린에 입성하기 전에 베를린을 장악한 다음, 베를린의 서쪽에서 남쪽을 향해 흐르는 떨어진 엘베(Elbe) 강에서 서방 연합군과 조우하는 것을 목표로 베를린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베를린 시역에 소련이 먼저 입성하는 결과를 만듦으로써, 소련이 전후 유럽의 지정학적 질서를 주도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제1벨라루스전선군(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제2벨라루스전선군(사령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의 3개 전선군이 베를린을 포위한 뒤 함락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베를린 공세가 계획되었다. 이들은 6천 대 이상의 전차 및 자주포, 4만 문 이상의 화포, 항공기 7,500여 대라는 대규모의 장비 또한 갖추고 있었다. 소련군은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을 따라 형성된 전선에 3개 집단군을 배치했다.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우익(북쪽)에,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중앙에,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은 좌익(남쪽)에 배치되었다. 이외에 폴란드 제1군과 제2군도 소련군과 더불어 베를린 공세에 참여하였다.

  이들을 상대할 나치 독일군은 병력 약 100만 명으로, 1,5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그리고 9천 문이 넘는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치 독일군의 규모 역시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군은 그동안의 누적된 손실과 고립으로 인해 그 규모에 비해 질적 수준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상당수의 병사들은 실전 경험은커녕 훈련도 충분히 받지 못한 신참 징집병들이었고, 이들을 지휘할 장교단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게다가 100만 명에 가까운 대군들 중에는, 정규군에 비해 전투능력이 부족한 국민척탄병은 물론 제대로 된 전투임무 수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 단원 등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군은 제2벨라루스전선군 담당 구역 방면에 비스툴라 집단군(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Fedor August Heinrici, 1886-1971) 상급대장) 예하 제3기갑군(사령관 하소 폰 만토이펠 대장)을 배치하였고, 베를린 동쪽의 제1벨라루스전선군 방면에는 마찬가지로 비스툴라 집단군 예하였던 제9군(사령관 테오도르 부세(Ernst Hermann August Theodor Busse, 1897-1986) 대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전선 남쪽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방면에는 중부집단군(사령관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 예하부대인 제4기갑군(사령관 프리츠후버트 그뢰저(Fritz-Hubert Gräser, 1888-1960) 대장)과 제17군(사령관 빌헬름 하세(Wilhelm Hasse, 1894-1945) 대장)을 배치하였다. 아울러 베를린 북쪽에는 소련군에게 역습을 가하고 유사시 베를린을 구원할 임무를 맡은 신설 부대인 슈타이너 군집단(Armeegroup "Steiner". 사령관 펠릭스 슈타이너(Felix Martin Julius Steiner, 1896-1966) 무장친위대 대장)을 배치하였다. 베를린 방어 사령관에는 헬무트 바이틀링(Helmuth Weidling, 1891-1955) 대장이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14-15일 소련군이 나치 독일군의 방어 전선에 포격과 공습을 실시한 뒤, 16일에는 베를린에 대한 지상군의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5월 말에 베를린 공격을 실시하겠다고 아이젠하워에게 통보한 스탈린의 약속보다  1개월 이상 빠른 공격 개시였다. 소련군은 압도적인 우세 하에서 공세를 개시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나치 독일군의 저항에 초반에는 고전을 겪기도 했다. 특히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오데르 강 서안의 젤로(Seelow) 고지 점령 및 돌파 과정에서 나치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데다 도로 폭이 좁고 습지가 많은 전장에 무리한 기습을 강행한 탓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4월 20일에야 젤로 고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역시 나치 독일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지만, 4월 18일에는 나이세 강에 이어 베를린 남쪽의 슈프레 강까지 도하에 성공함으로써 베를린을 남쪽으로부터 포위할 준비를 마쳤다. 한편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전선군도 19일에 오데르 동안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서안으로의 진격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베를린의 북쪽과 동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4월 20일 베를린에 포격을 개시하였고 25일에는 베를린 북쪽을 완전히 포위했다.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역시 4월 20-25일 사이에 베를린 남쪽을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 제9군과 제4기갑군은 베를린 남동쪽에서 포위당했고, 이어서 급속히 와해되어 갔다. 한편 제2벨라루스전선군은 오데르 강을 도하하여 독일 북쪽으로 진격하여, 나치 독일 제3기갑군과 슈타이너 군집단에 대공세를 실시하였다. 이 두 부대는 제2벨라루스전선군의 공세를 당해 내지 못하고 서쪽으로 밀려나, 역습은커녕 베를린 구원에 투입될 수조차 없었다.

베를린 공세 당시 소련군의 공세(출처: 위키피디아)

  서방 연합군 역시 서쪽에서 독일, 그리고 베를린을 향해 공세를 지속하며 진격해 왔다. 나치 독일군 제12군(사령관 발터 벤스크(Walther Wenck, 1900-1982) 대장), 제21군(사령관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Kurt Oskar Heinrich Ludwig Wilhelm von Tippelskirch, 1891-1957) 대장) 등이 서방 연합군에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945년 4월 25일,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휘하 소련군 병력들이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엘베 강 유역의 도시 레크비츠(Leckwitz)에서 미군 병사들과 조우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북쪽에서도 제2벨라루스전선군 휘하 병력들이 역시 엘베 강 인근에서 영국군과 조우하였다.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싸우던 연합군이 처음으로 조우하는 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로서 나치 독일은 완전히 고립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4월 26일, 베를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바이틀링 휘하의 베를린 방어군은 국민돌격대와 히틀러유겐트 단원까지 동원하여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고립된 상태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베를린 방어군은 소련군에 의해 각개 격파당했고, 슈타이너 군집단, 제4기갑군 등의 야전부대들 역시 사실상 와해된 터라, 외부에서의 구원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5월 1일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의 제국 의사당 지붕에 소련 국기를 게양하였고, 이튿날에는 바이틀링이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비록 베를린 시내에서 산발적인 나치 독일군 잔존 병력의 저항이 이어졌고 나치 독일이 완전히 항복한 것도 아니었지만, 베를린까지 함락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패망은 그야말로 기정 사실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지붕에 소련 국기를 게양하는 소련군의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소련군은 오데르-나이세 강을 잇는 전선에서 베를린 공세를 시작한 지 불과 17일 만에 베를린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약 46만 명의 나치 독일군 병력을 사살하였고, 약 48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하지만 소련군 및 폴란드군에서도 36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승리를 위한 희생 역시 결코 간과할 수준이 아니었다. 


  1940년 4월 29일, 연인이자 비서였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히틀러는 이튿날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였다. 이 날은 베를린 수도방어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Helmuth Otto Ludwig Weidling, 1891-1955) 대장이 히틀러에게 예하부대의 탄약과 전투 지속능력이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보고한 뒤, 병력의 전선 이탈을 허락받은 날이기도 하였다.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히틀러 부부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해군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 원수가 나치 독일 대통령으로, 선전장관 괴벨스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자녀들을 살해한 뒤 부인과 함께 자살하였다.  

  바이틀링 휘하 부대의 전선 이탈에서 볼 수 있듯이, 나치 독일군은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인 플렌스부르크(Flensburg)로 정부를 옮긴 되니츠는, 소련군의 베를린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고 독일 국민과 군 장병들을 최대한 베를린에서 소개한 다음 소련이 아닌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한 시도에 착수했다. 하지만 사실상 조직적인 전투력이 와해된 나치 독일군 병력으로 베를린을 향해 쇄도하는 소련군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무엇보다 얄타 회담에 따라 소련의 독일 점령을 이미 용인했던 서방 연합국이, 되니츠의 소련을 배제한 항복 시도를 받아줄 수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되니츠에게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와중에 베를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을 점령하고, 국회의사당 건물에 소련 국기를 게양하였다. 연합군은 애초부터 나치 독일의 서방 단독 강화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선택지는 더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되니츠는 5월 7일 OKW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을 프랑스의 랭스(Reims)에 소재한 연합군 사령부에 나치 독일 대표로 파견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케 하였다. 무조건 항복이었지만, 이 같은 조치에는 나치 독일의 항복에서 최대한 소련을 배제하려는 되니츠의 마지막 저항과도 같은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를 간파한 소련은 5월 8일 밤 베를린에서  OKW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에게 주코프를 통해 전달된 항복 문서에 서명토록 하였다. 베를린 시간으로는 5월 8일 밤이었지만,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이었다. 때문에 서방 국가들은 5월 8일을 2차대전 전승기념일로 간주하지만, 소련과 러시아 및 구소련 가맹국들은 5월 9일을 전승기념일로 제정하여 매년 성대한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소련군의 베를린 입성 과정에서 베를린 시민들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전쟁범죄에 막심한 피해와 상처를 입어야 했다. 소련군은 무장친위대나 나치당 간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전쟁범죄를 일삼았다-사실 이 같은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1944년 무렵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나치 독일의 잔혹한 전쟁범죄에 대한 복수심에 기인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전쟁범죄인 데다 독일인들의 소련에 대한 저항 의지만 고취하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소련군 수뇌부에서는 이를 엄금하기 위한 노력도 했지만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베를린 전투에서 수만 명 이상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에게 살해당했고, 5-10만 명의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 성폭력 피해자들 가운데 약 1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대부분은 자살이었다.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이자 국제법 위반이었지만, 승전국 소련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이 같은 전쟁범죄 행위에는 상응하는 처벌도 이에 대한 소련 정부의 사과나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련은 2차대전에서 다른 연합국들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막대한 인적ㆍ물적 자원을 희생해 가며 나치 독일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지상전을 치러냈다. 게다가 베를린에 가장 먼저 입성한 연합군의 군대는 소련군이었다. 이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련이 큰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얄타 회담을 통해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스탈린이 세워둔 전후 독일을 자국의 전초 기지와도 같은 지정학적 장소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동독이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의 축으로 편입되는 양상으로 실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패전의 대가로 프로이센의 발상지인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동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해야 했다. 포츠담 회담(1945.7.17.-8.2.)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오데르 나이센 선(Oder-Neisse Line)으로 획정함에 따른 결과였다.

1947년 기준 전승국의 독일 분할 통치.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자르 보호령 포함), 폴란드에 의해 국토 및 베를린이 분할된 모습을 알 수 있다.(출처: 위키피디아)

   독일과 베를린은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의 분할 통치를 받았고, 이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독과 동독, 그리고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 냉전기에 서독과 동독은 각각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전진기지에 해당하는 지정학적 위치를 부여받았고, 이에 따라 주독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였다. 베를린 장벽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무장 병력은 물론 전차까지 배치한 채 냉전 종식 때까지 대치를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십만 명의 자유 폴란드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분투했던 폴란드는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폴란드는 나치 독일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2차대전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장병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키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얄타 회담에서 소련이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승인받은 탓에 제대로 된 전승국 대우를 받기는커녕 영토마저 강제적으로 재조정당한 채 소련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본래 다민족 국가였던 폴란드는 폴란드계 위주의 단일 민족 국가로 변모하였다. 폴란드에서는 1947년 소련이 개입한 부정선거에 의해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고, 1952년에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이라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폴란드의 실권은 소련이 임명한 국방장관 로코솝스키의 손에 있었다-그는 폴란드인에 대한 지나친 탄압과 강경 정책을 편 끝에 1956년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초래하여 결국 실각하고 소련으로 귀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에 협조적이지 않은 폴란드 국내군 인사 등은 독립 영웅의 예우를 받는 대신 숙청당했으며, 런던에 소재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1991년 내전이 종식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소련의 압력에 의해 공산화되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1950-60년대 이후 소련의 강압적인 내정 간섭에 반발하는 반소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동유럽인들의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상당한 수준이다.

  요컨대 베를린 함락은 2차대전 유럽전선의 종전인 동시에,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와 지정학적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독일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토 상실과 분단을 강요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위치를 부여받고 말았다. 실제로 냉전 시대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각각 동서 독일의 경계를 최전선으로 간주하고, 서독군과 동독군은 두 기구의 선봉 역할을 부여받았다. 동유럽의 공산화를 우려한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고 향후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NATO를 창립하였다. 동서 냉전이라는 유럽과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는,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몰락이 일어난 1991년에야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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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dy Jr., J. L., 2015, Failure of German Logistics During the German Ardennes Offensive of 1944, Auckland, New Zealand: Pickle Partners Publishing.

Roberts, G., 2006, 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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