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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Dec 14. 2020

나치 독일 최후의 대공세가 벌어진 전격전 신화의 탄생지

나치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에 대한 지리학적 접근

  나치 독일은 1940년 봄 A집단군의 아르덴 돌파를 통한 프랑스군 주력의 포위 섬멸을 골자로 하는 황색 상황의 만슈타인 수정안(낫질 작전)을 통하여, 개전 45일 만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 '전격전의 전설'을 실현하였다. 이로서 한때 나치 독일은 전 유럽의 석권을 목전에 두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4년 후인 1944년 하반기의 나치 독일은 동서 양면에서 연합군의 대공세에 시달리며 패망을 목전에 둔 신세로 전락했다. 오버로드 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나치 독일군의 전력과 전쟁 지속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백만 명을 상회하는 병력의 손실 및 수천 대에 달하는 각종 장비의 상실뿐만 아니라, 영토의 상실 또한 나치 독일의 전쟁 지속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 중부집단군을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 동부와 인접한 동유럽 전초기지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루마니아, 핀란드 등의 동맹국들이 추축국을 이탈했고, 이는 나치 독일의 외교적 고립은 물론 자원 수급의 기회까지도 차단시켰다.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산업 시설에 대한 전략 폭격을 단행하여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 및 보급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즉, 1944년 하반기의 상황은 연합군이 나치 독일군에게 연승을 거두는 수준을 넘어, 경제, 산업, 보급 등 그들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 자체를 제거해 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동쪽과 서쪽에서 밀려오는 대규모의 연합군 병력과 영역 사이에 끼인 나치 독일의 상황은 마치 독 안에 든 쥐와도 같았다.

  다만 1944년 겨울에 이르러 동서 양면의 전선은 일시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우선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는 욕심 하에 네덜란드 해방 작전인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을 공수부대 위주로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발터 모델 원수가 지휘하는 나치 독일 기갑부대의 반격을 받아 네덜란드의 완전 해방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소련 역시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며 동부전선을 와해시키고 지속적인 후속 공세를 통하여 나치 독일군을 서쪽으로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수백 km 이상을 진격한 탓에 보급 문제, 병력 및 장비의 보충 등의 문제가 불거져 더 이상의 공세를 지속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 보여준 연합군 지휘부의 의사소통 문제와 발터 모델의 전과에 착안하여,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 진격한 연합군에게 '최후의 한 방'을 선사하여 전황을 일거에 전환시키겠다는 발상을 하기 시작했다. 혹한이 닥치고 폭설이 내리는 12월의 겨울에 나치 독일군이 아르덴을 통과하고 뫼즈 강을 도하하여 연합군의 보급 거점이었던 안트베르펜을 점령한다면, 연합군의 보급선을 마비시켜 서부전선에서의 평화 협정 체결까지 노려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는 마치 1940년 봄에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도 유사한 계획이었다. 물론 1944년의 전황은 1940년과는 크게 달랐지만, 히틀러와 OKW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 등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볼 희망을 걸고 '라인 강 수비(Wacht am Rhein)'라는 작전명 하에 도박과도 같은 아르덴 공세를 계획 및 실시하였다. 히틀러는 아르덴 공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안트베르펜 북쪽의 영국군과 남쪽의 미군을 각개 격파하고 연합군의 보급선을 마비시켜 서부전선의 위협을 제거하고, 루르 산업지대의 자원을 바탕으로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소련에게 역습을 가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후 가을안개(Herbstnebel) 작전으로 개칭된 라인 강 수비 작전에는 B집단군(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 예하 제5군(사령관 하소 폰 만토이펠(Hasso Eccard Freiherr von Manteuffel), 1897-1978) 대장), 제6군(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Joseph Dietrich, 1892-1966)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제7군(에리히 브란덴베르커(Erich Brandenberger, 1892-1955) 대장)의 3개 야전군이 동원되었으며, 이 3개 야전군은 9개 기갑사단과 13개 보병사단, 그리고 2개 공수사단들로 구성되었다. 병력 30만 명, 1,400대 이상의 전차 및 자주포,  화포 1,900여 문, 8,000문에 육박하는 대공포 및 로켓포를 갖춘 대규모의 부대였다.

3개 야전군 가운데 제5군과 제7군은 국방군 병력으로 구성된 반면, 제6군은 무장친위대 병력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 3개 야전군 가운데 제5군은 룩셈부르크 북동쪽의 바스토뉴(Bastogne)를 돌파한 다음 디넝(Dinant)을 거쳐, 제6군은 룩셈부르크 북쪽의 장크트피트(St. Vith)와 스타벨로(Stavelot)를 통과한 다음 리에주(Leige)를 거쳐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제7군은 스당 방면의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제5, 제6기갑군이 아르덴에서 안트베르펜에 이르는 약 170km의 거리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히틀러는 아르덴 대공세를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만큼 예하 부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주려고 했다. 덕분에 3개 야전군 중에서도 특히 무장친위대 중심으로 구성된 제6군은 6호 구축전차 야크트티거(Panzerjager VI Jagdtiger), 6호전차 쾨니히스티거 등 최신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급받았고, 인원 또한 충분할 정도로 보충받았다. 제5군 역시 장비와 인원을 충분히 지급받았다. 다만 공세에서 우선순위가 비교적 낮았던 제7군은 제5군 및 제6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비의 수량과 수준 등에 다소 부족함이 있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이들이 공세를 지속할 수 있도록 공세 이전에 8-10일 분량의 물자를 지급했고, 이후의 물자 보급도 원활히 이루어지게끔 철도를 활용한 보급 계획도 수립해 둔 상태였다.

  이 같은 아르덴 공세는 마치 나치 독일군이 서쪽으로 돌출한 돌출부(bulge)와도 같은 모양새를 취한 아르덴 고지 방향의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돌파하고 분단시키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벌지 전투(The Battle of the Bulge)’라고도 불린다. ‘벌지 전투’라는 용어는 1965년에 개봉된 헨리 폰다, 로버트 쇼 주연의 전쟁 영화 제목 등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아르덴 공세를 일컫는 명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기도 하다.

가을안개 작전에 따른 나치 독일군의 진격 계획과 전선의 변화(출처: Harrison and Passmore, 2020, 6)

  1944년 12월 16일, 바스토뉴와 말메디 방면으로 각각 진격한 나치 독일 제5군과 제6군은 작전 초기에 연합군을 상대로 기대를 훨씬 웃도는 전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르덴 공세에 전력을 기울였던 나치 독일군의 의도를, 연합군 수뇌부는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군 B집단군이 아르덴 공세를 개시했을 때, 연합군 수뇌부는 이를 대규모 공세가 아닌 국지적인 도발이나 침공 정도로 오판했다. 이 때문에 공세 초반 연합군은 B집단군의 기습적인 대공세를 적절히 파악하지 못했고, 이는 아르덴 공세 초창기 연합군이 고전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겨울의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아르덴의 지형은 판터, 티거 등과 같은 나치 독일군 중(重)전차들의 효과적인 기동을 저해하기도 했지만, 12월의 강설과 작전 초기의 짙은 안개는 연합군의 항공 정찰과 지원을 방해하며 나치 독일군의 진격을 결과적으로 도와주었다. 강설과 안개로 인해 연합군의 항공 병력은 지상군에게 적절한 지원을 해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군의 기습을 적절하게 탐지해 내지도 못했다. 일례로 12월 20일에 연합군  항공기는 고작 2소티의 출격 횟수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독일군은 연합군을 향해 효과적인 기습을 감행할 수 있었고, 연합군 항공 전력은 아군에게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군의 특수부대 역시 연합군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강요했다. 이탈리아 항복 이후 무솔리니를 구출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진 오토 슈코르체니(1908-1975, Otto Skorzeny) 대령이 지휘하는 독일군 특수부대원들은 미군으로 위장하여 도로 표지판을 왜곡하거나, 허위 지뢰지대 표시를 설치하거나, 심지어는 아이젠하워 암살 계획에 대한 헛소문을 그럴듯하게 흘리는 식으로 미군을 교란하였다(그라이프 작전, Unternehmen Greif). 독일군 특수부대의 후방 교란에 지린 미군은 보안 유지와 특수부대 및 스파이 색출을 위해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과 같은 미국인들이나 답할 수 있을 법한 어려운 암구호를 정해야 했고, 심지어 미 육군 제12군집단 사령관 오마 브래들리 중장이 일리노이 주 주도를 묻는 암구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해 초병에게 일시 구금되는 해프닝이 빚어지기까지 하였다. 프리드리히 폰 데어 하이트(Friedrich August Freiherr von der Heydte, 1907-1994) 대령이 지휘하는 1,300여 명의 공수부대 강하(매 작전, Unternehmen Stösser) 역시 연합군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실 폰 데어 하이트 대령의 공수부대는 악천후 등으로 인해 당초 계획한 지점에 효과적으로 집중하지 못한 채 분산되어 강하했으나, 이는 연합군으로 하여금 나치 독일군의 대규모 공수부대 병력이 후방을 타격하고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강요하는 데 성공하여 적잖은 혼란을 초래하는 데 성공했다.

파괴된 미군 차량의 잔해 사이를 돌파하며 진격하는 나치 독일군 보병(출처: 위키피디아)

  B집단군의 기습적인 대공세에 허를 찔린 연합군은, 공세 초반에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으며 B집단군 예하부대들의 진격을 허용해야만 했다. 아이젠하워 휘하의 서부 전선 연합군은 무려 90개 사단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는 아르덴 대공세에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했다.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광대한 정면을 유지해야 했고, 아르덴이라는 허점을 찔린 연합군은 이 같은 병력상의 우위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채 나치 독일군의 공세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특히 나치 독일군의 공세가 집중되었던 장크트피트, 스타벨로 등을 담당하고 있던 미 육군 제1군의 손실이 컸다. 제1군 예하 제99사단, 제106사단 등은 전멸 수준의 손실을 입었다. 교통의 요지 바스토뉴를 담당하던 제12군집단 역시 중대한 손실을 입었고, 특히 제8군단의 피해가 컸다. 폰 만토이펠의 제5군은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같은 폰 만토이펠의 활약상은 나치 독일 선전국에서도 '위대한 제3제국군의 부활'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미군 역시 폰 만토이펠을 나치 독일군의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연합군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한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아르덴 공세 초기 나치 독일군은 1만 명 이상의 연합군 포로를 노획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아르덴 공세 초반 나치 독일군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며 미군에게 적지 않은 손실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1944년의 아르덴은 1940년의 아르덴과는 크게 다른 전장이었다. 사실상 텅 빈 고지나 다름없었던 1940년의 아르덴과 달리, 1944년의 아르덴에는 나치 독일군의 기습을 방어하기 위한 각종 장애물과 요새 시설들이 구축되어 있었다. 여기에 수 개의 연합군 야전군 병력까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군이 1940년에 그랬듯 불과 1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아르덴을 돌파하여 안트베르펜을 함락할 것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1944년의 연합군은, 나치 독일 A집단군의 아르덴 돌파에 적절히 대처하기는커녕 이에 대한 예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1940년의 프랑스군 수뇌부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비록 악천후와 B집단군의 기습적인 대공세에 고전하기는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히틀러의 예상과 달리 예하부대를 유기적으로 통솔하여 나치 독일군의 기습에 적절하게 대처했다. 심지어 제3군 사령관 조지 패튼은 대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를 예측하기까지 해 둔 상태였다. 미 육군 제1군, 제12군집단 등의 예하 야전군 역시, 스당, 뫼즈 강 등을 무기력하게 내주었던 프랑스군과 달리 일부 예하 사단들이 전멸하는 등의 막대한 손실이 누적되는 와중에도 전선을 질서 정연하게 물리며 건제를 유지했다. 폰 만토이펠, 디트리히 등이 기습의 이점 아래 뛰어난 부대 통솔력을 발휘하여 연합군을 상대로 기대 이상의 전술적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1940년과 달리 이들은 아르덴이라는 장소를 연합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와해시키는 '전략적 장소', '전쟁을 뒤집는 장소'로까지 발전시키지는 못했던 셈이다. 아르덴 공세가 시작된 지 4일 만인 12월 19일에 아이젠하워가 베르됭(Verdun)에서 반격작전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는 사실은, 1944년의 아르덴이 1940년의 아르덴과 결정적으로 다른 전장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베르됭 회의에서 패튼은 나치 독일군의 공세를 뫼즈 강 인근에서 저지한다는 아이젠하워의 계획을 한층 공격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미 아르덴 공세를 예측했던 패튼은, 휘하 제3군 참모들과 함께 나치 독일군에 대한 역습 계획을 수립해 두었다. 패튼은 예하 3군단을 바스토뉴 남쪽에서 북진시켜 바스토뉴를 해방한 다음 제1군과 합류한 뒤 아르덴 돌출부의 서쪽을 분단시킨다는 계획을 세웠고,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 패튼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히기 위해서 우선 제3군 예하 3개 사단만으로 아르덴 돌출부 남부의 돌파를 시도했고, 2차대전에 참전한 각국 장성들 중에서도 특히 호전적이고 용감무쌍한 맹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쌍권총을 허리에 찬 채 전선을 순회하며 진두지휘를 감행했다. 

  패튼의 공세는 나치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과 바스토뉴의 좁은 정면으로 인해 처음에는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안개가 걷히고 날씨가 쾌청해지자 항공 지원을 받아가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결국 12월 26일 제3군단 예하 제4기갑사단이 바스토뉴를 장악했고, 바스토뉴 구원을 위해 투입되었다 고립당했던 제101공수사단 역시 패튼에 의해 구원받았다. 이후 제3군은 제1군과의 합류를 통해 아르덴 돌출부의 서쪽을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르덴 돌파를 통해 프랑스-벨기에 국경선의 연합군 주력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던 1940년의 나치 독일군과 달리, 1944년의 나치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적잖은 피해를 강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아르덴 돌파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르덴 공세에서 나치 독일군의 진로와 패튼의 기습(출처: Pinterest)

  보급과 제공권 문제는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주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히틀러와 서부전선 총사령부는 공세 개시 전부터 보급 물자를 충실히 배분하고 철도를 통한  보급 계획까지 수립하는 등 보급 문제를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다 보니, 나치 독일군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보급 계획은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12월 하순에 접어들어 악천후가 그치고 일기가 쾌청해지자, 연합군은 나치 독일군의 보급로에 공습을 집중시켰다. 이미 제공권을 빼앗긴 나치 독일 공군은 보급선을 폭격하는 연합군 항공기들을 적절하게 저지하지 못했고, 공습에 의해 보급선이 파괴된 탓에 B집단군 예하 일선의 야전부대들은 적시 적절한 보급을 받지 못했다. 연합군의 공습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나치 독일군 보급부대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공습을 피해 은폐 엄폐하느라 보급이 절실한 일선 부대에 적시 적절하게 보급을 제공하지 못했다. 1944년 12월 31일까지, 나치 독일군은 11,000대 이상의 보급 차량과 6,200량이 넘는 화물 수송용 열차를 공습으로 인해 상실했다. 974개소의 철도 노선과 421개소의 도로망 역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전격전의 신화를 썼던 1940년의 나치 독일군은 전격전에 적합한 전차 중심의 편제뿐만 아니라 기계화된 보급 수단까지 강구했고, 이들은 1차대전식 군사교리에 사로잡혀 있던 프랑스군을 손쉽게 유린했다. 하지만 1944년의 나치 독일군은 자신들 못지않게 기갑 전술에 뛰어난 연합군-일례로 패튼은 맹장이기도 했지만, 기갑 전술의 대가이기도 하였다-을 상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보급 문제에서도 심각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나치 독일군은 연료 등 부족한 물자를 연합군으로부터 탈취한다는 계획도 세웠지만, 연합군은 나치 독일군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나치 독일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던 1940년의 아르덴과 달리, 1944년 아르덴의 제공권은 연합군에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1944년의 아르덴에서 나치 독일군이 동원한 쾨니히스티거, 야크트티거 등의 중장비들은 연합군의 공습에 무력하게 파괴되었다. 나치 독일군의 중전차들은 연합군 전차를 월등하게 상회하는 성능을 발휘하며 마치 전쟁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지만, 항공기의 공습 앞에서는 크고 느린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드리우고 폭설이 내렸던 아르덴 공세 초반에는 나치 독일군이 패튼의 역습을 저지하는 등 선전했지만, 항공기가 출격할 수 있는 기상 조건이 갖추어지자 제공권을 갖지 못했던 나치 독일군은 연합군의 폭격을 견뎌내지 못하며 와해되어 갔다.

  1945년 1월 1일, 히틀러는 연합군의 항공 전력과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보덴플라테 작전(Unternehmen Bodenplatte)을 감행했다. 연합군이 보유하지 못했던 Me-262 등의 제트전투기 포함한 800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하여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항공 전력을 와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보덴플라테 작전에서 나치 독일 공군은 부족한 연료와 신임 조종사들의 부족한 실전 경험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200대 이상의 연합군 항공기와 다수의 비행장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 공군은 300대 이상의 항공기, 그리고 250명 이상의 숙련된 조종사 인력을 상실하는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덴플라테 작전 와중에도 연합군 항공기들은 나치 독일군에 대한 공습을 지속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중전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손실을 입은 나치 독일 공군은 사실상 와해 수준에 직면하고 말았다.

  1945년 1월 12일, 동부전선에서 휴식과 보충을 마친 소련군은 또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1월 8일에 소련군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제6군을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제6군의 후퇴 및 재배치는 연합군의 공세로 인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아르덴 공세의 지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1월 28일에 접어들어 연합군은 아르덴 공세로 상실한 구역을 모두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아르덴 돌파 후 안트베르펜 점령을 통해서 서부전선을 정리하겠다는 히틀러의 군사적 도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마지막 남은 전력을 '쥐어짜듯이' 동원했다가 중대한 손실만 입은 채 작전에 실패한 나치 독일의 패망은 이제 눈 앞에 다가왔다. 1940년의 아르덴은 나치 독일군이 전격전의 신화를 이루며 육군 강국 프랑스를 40여 일 만에 항복케 만들었던 승리의 장소였지만, 1944년의 아르덴은 나치 독일군이 마지막 남은 전력을 쥐어짜 시도한 최후의 대공세를 실패로 돌아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약체화된 나치 독일군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린 패배의 장소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Harrison, S., and Passmore, D. G., 2020, On geography and war: New perspectives on the Ardennes campaigns of 1940 and 1944, Annals of the American Association of Geographers. DOI: 10.1080/24694452.2020.1807307

Jarkowsky, J., 1995, German special operations in the 1944 Ardennes Offensive, Unpublished MA dissertation of th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Kennedy Jr., J. L., 2015, Failure of German Logistics During the German Ardennes Offensive of 1944, Auckland, New Zealand: Pickle Partners Publishing.

Passmore, D. G., and Harrison, S., 2009, Landscapes of the Battle of the Bulge: WW2 field fortifications in the Ardennes forests of Belgium, In T. Pollard, and I. Banks(eds.), Bastions and Barbed Wire: Studies in the Archaeology of Conflict, pp. 87-107, Leiden, The Netherlands: Brill.

Showalter, D., 2005, Patton and Rommel: Men of War in the Twentith Century, Berkeley(황규만 역, 2012, 패튼과 롬멜,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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