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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Nov 30. 2020

스탈린이 내린 동부전선의 사형선고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지리학적 고찰

  쿠르스크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1943년 하반기 이후,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연속적인 대공세를 실시하여 나치 독일군을 서쪽으로 크게 몰아냈다. 1944년에 접어들어 소련군은 나치 독일 북부집단군의 포위에 수년간 시달려 왔던 레닌그라드를  해방하는 데 성공했고, 우크라이나 전선에서는 남부집단군 및 남우크라이나집단군으로 개칭된 A집단군을 서쪽으로 크게 후퇴시키고 우크라이나의 상당 부분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 중부집단군은 여전히 벨라루스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1944년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은 비록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비록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대공세를 통해 동부전선에서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이상의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1944년 6월에 일어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은, 동부전선의 전황에도 중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오버로드 작전의 성공에 따라 파리와 프랑스가 해방되고 서부전선이 형성되면서,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의 전력을 서부 전선으로 상당 부분 분산시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미 그 이전에 나치 독일은 연합군의 프랑스 해안으로 상륙에 대처하기 위해서 동부전선의 병력 일부를 서부 전선으로 차출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나치 독일의 영토를 직접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가뜩이나 1943년 후반-1944년 초반에 이어진 소련군의 공세로 약화된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 전력을 더한층 약화시켰다. 연이은 공세에 따른 손실의 누적으로 공세를 지속하기에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던 소련군에게, 서부전선 형성에 따른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 전력 약화는 더없이 좋은 호재였다. 이 같은 상황은 한편으로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을 하루라도 빨리 무력화할 필요성에 대한 절박감을 가중시켰다. 1944년 6월에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다는 계획은 소련 측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주춤하는 사이 서방 연합군이 베를린을 먼저 함락시키거나 하기라도 하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그만큼 소련의 영향력과 발언권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44년 봄에 접어들면서 스탈린과 주코프, 바실렙스키 등은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 전황을 극적으로 전환하고, 실지 회복을 넘어 독일 영토까지 점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44년 봄에 접어들어 나치 독일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및 남우크라이나집단군은 소련군의 대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선을 서쪽으로 크게 물린 상태였다. 남부집단군 및 남우크라이나집단군은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대부분을 상실한 채 루마니아, 헝가리 인근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고, 북부집단군도 3년 이상 포위를 지속했던 레닌그라드를 결국 상실했다. 게다가 프랑스에 상륙할 서방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부전선의 병력 중 상당수가 서부전선으로 돌려져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나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나 청색 작전과 같은 대공세를 다시 실시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 수백만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전력은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1943년 하반기 이후 소련군이 실시한 일련의 공세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의 전선을 크게 후퇴시키며 막대한 규모의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입은 소련군의 인적ㆍ물적 손실은 나치 독일의 손실을 상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 루마니아 등과 같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들도 여전히 나치 독일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래에 인용한, 1944년 5월 1일에 이루어진 스탈린의 연설은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우리의 사명은 조국에서 적을 소탕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작금의 독일군은 자기 영역인 독일 영토 안으로 기어들어가 상처를 핥아야 할 처지가 된 상처 입은 야수를 연상케 합니다. 상처 입은 야수가 자기 영역 안으로 뛰어들어간다면, 위험한 야수가 다시 출현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국과 우방이 또다시 노예로 전락할 위험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독일이라는 상처 입은 야수를 끝까지 쫓아 그 야수의 영역 안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합니다(Tucker, 2008, 60-61).

  따라서 소련군의 하계 공세는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강요한 다음, 나치 독일 영토 침공의 발판이 될 폴란드에 병력을 진주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했다. 이를 위한 선택지는 다양했다. 예컨대 전선이 가장 서쪽으로 밀려난 남부집단군 및 남우크라이나집단군을 공격하여 루마니아, 헝가리 등을 추축국에서 이탈시키고 폴란드 남부를 공략하는 방안도 있었고,  우크라이나 북서쪽으로 전력을 집중하여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을 돌파하고 발트 해까지 진출하는 방안도 강구될 수 있었다. 북부집단군을 공격하여 핀란드를 굴복시키고 발트 해 축선을 따라 폴란드 북부와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는 대안도 있었다. 하지만 루마니아와 헝가리 일대는 카르파티아 산맥, 발칸 산맥 등의 험준한 산악 지형이 분포하였고, 우크라이나 북서쪽에도 프리퍄티 습지라는 거대한 자연 장애물이 분포했다. 발트 해에서 동프로이센을 잇는 정면이 좁은 축선 역시 나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공세가 장기화될 소지가 컸고, 전과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소련군은 벨라루스 일대에 주목하였다. 전선을 서쪽으로 크게 물린 나치 독일 북부집단군 및 남부집단군ㆍ남우크라이나집단군과 달리, 부집단군은 벨라루스 일대에서 전선을 유지하며, '벨라루스 발코니(Byelorussian Balcony)'라 불린 동쪽으로 돌출한 거대한 돌출부를 형성하였다. 소련군이 이곳에 대한 공세에 성공한다면 중부집단군에게 중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벨라루스를 확보함으로써 폴란드, 나아가 독일 본토로 향하는 길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실제로 1944년 4월 22일 스탈린의 집무실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 소련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소련군의 하게 공세는 벨라루스 발코니의 중부집단군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1944년 여름에 이루어질 벨라루스 공세를, 나폴레옹 전쟁기의 전쟁 영웅이었던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Пётр Иванович Багратион, 1765-1812)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Белорусская операция)'이라 명명하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에는 118개 보병사단과 8개 기갑군단, 13개 포병사단, 6개 기병사단, 14개 방공사단으로 구성된 4개 전선군이 투입되었고, 총 병력은 약 170만 명으로 중부집단군 병력의 두 배가 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에 4,000대가 넘는 전차 및 기갑차량과 2만 문을 상회하는 화포, 6,000대 이상이 항공기를 투입하였고, 이는 중부집단군이 보유한 장비의 규모를 월등히 압도하는 규모였다. 여러 차례의 작전 회의 끝에, 소련군은 벨라루스 발코니를 남북 견부(肩部)에서 공세를 가하여 나치 독일군을 기만한 다음, 벨라루스 발코니를 거대한 포위망으로 만들고 민스크를 점령하여 벨라루스를 해방한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작전 회의를 거치면서 전선군의 개편 및 증원도 이루어졌다. 최종 작전안에서는 제1발트전선군(사령관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1897-1982) 원수)과 제3벨라루스전선군(사령관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1906-1945) 상장)이 스몰렌스크 북서쪽에 위치한 비텝스크(Витебск)를 포위하고, 제1벨라루스전선군(사령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은 벨라루스 발코니 남동단의 바브뤼스크(Бобруйск)를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해서 벨라루스 발코니 남북 견부에 포위망을 형성한 뒤에는, 제5근위전차군 등의 지원을 받아 증강된 제3벨라루스전선군 및 제1벨라루스전선군이 각각 북쪽과 남쪽 방면에서 민스크로 이어지는 종심깊은 포위망을 형성한다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와 더불어 제1발트전선군은 동프로이센 방면으로, 제1벨라루스전선군 예하 제2전차군은 벨라루스 발코니 남동단의 코벨(Ковель)로부터 폴란드의 비스와(Wisła) 강 방면으로 진격하여 중부집단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 작전에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사령관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1897-1973) 원수)도 추가 투입되었다. 코네프는 코벨 남쪽의 리비우(Львів) 동쪽에서 나치 독일군을 포위 섬멸한 뒤 폴란드 남동부의 산도미에시(Sandomierz)까지 진격한다는 작전(리비우-산도미에시)을 세웠고, 스탈린은 민스크 함락 직후 코네프가 공세를 개시하도록 허가하였다. 작전 개시일은 1944년 6월 22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이는 우연하게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로부터 정확히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출처: Tucker-Jones, 2009, 117)

  한편 바그라티온 작전의 공세 계획은 소련군의 종심전투교리(deep battle theory, 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의 성숙과 실천을 잘 보여 준다. 종심전투교리는 본래 1930년대에 소련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고안한 군사교리로, 적을 일거에 섬멸하는 대신 다수의 전략 목표에 대규모 병력을 광정면에 제파식으로 투입하여 적의 방어 태세를 마비시키고 후속 부대를 즉각적으로 투입하여 적진을 종심깊이 돌파 섬멸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종심전투교리는 1930년대 후반 투하쳅스키가 숙청된 이후 폐기되었으나, 소련이 2차대전의 동부전선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한 1943년 이후에는 주코프, 바실렙스키 등의 주도로 소련군의 중요 군사교리로 부활하였다. 소련군의 4개 집단군의 예하 병력들이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면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개시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후속부대를 적시 적절하게 투입하여 종심깊은 후속 공세로 중부집단군을 섬멸한다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요지는, 이 같은 종심전투교리에 입각한 소련군의 전략전술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중부집단군을 포함한 나치 독일군 역시 소련군이 하계 공세를 개시하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중부집단군은 벨라루스 발코니가 남북의 견부로부터 포위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나아가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의 하계 공세에 대비하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역량이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병력과 장비의 규모에서 중부집단군은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을 제외한 4개 전선군에 비해 현저하게 불리했다. 병력은 물론 전차, 항공기, 화포 등의 보유 대수 역시 소련군의 절반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었으며, 보급 수준 역시 열악했다.

  지휘관의 질적 수준 역시 이전보다 악화되었다. 히틀러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동부전선, 나아가 나치 독일군 고위 지휘관 중에서도 가장 역량이 뛰어났던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A집단군(남우크라이나집단군)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를 경질하고, 그 후임자로 이들보다 역량이 떨어지지만 히틀러의 총애를 받은 인물인 페르디난트 쇠르너(Ferdinand Schörner, 1892-1973) 등을  임명했다.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전략전술 및 대규모 군부대의 지휘에 전문성이 없는 히틀러가 모든 작전을 일임하겠다는 현명하지 못한 발상을 실천에 옮긴 셈이었다.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Ernst Busch, 1885-1945) 원수는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군의 대공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등 능력을 입증받은 지휘관이기는 했지만, 패색이 짙어가는 동부전선의 상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제3우크라이나전선군과 제3발트전선군의 기만 전술에 속아 넘어가, 소련군의 주공이 우크라이나 또는 발트 해 방면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부슈 역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기만 전술을 간파하지 못했고, 주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는 이 같은 사실까지도 첩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및 발트 해 방면의 방어태세 증강을 명령했고, 이는 정작 소련군의 주공이 집중될 벨라루스 방면의 전력이 약체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소련군의 공세는 나치 독일 중부집단군이 장악하고 있던 벨라루스 방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44년 6월 초에는 소련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카렐리야 전선군이 핀란드 공세를 시작하였고, 6월 21일에는 레닌그라드 전선군 예하 제21군이 비푸리 점령에 성공했다. 소련군은 비푸리 점령을 발판 삼아 핀란드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고,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9월 소련 측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소련군의 핀란드 공세는 핀란드를 나치 독일로부터 이탈시킴과 동시에, 소련군의 벨라루스 공격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국경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과 제3우크라이나전선군은 지속적인 기동훈련과 병력 배치를 통해서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가 마치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주요 동맹국이자 유럽의 손꼽히는 산유국이었던 루마니아 방면에 대공세를 계획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전력의 약화와 제공권의 상실로 인해,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 후방에서 진척되고 있는 병력의 이동과 배치에 대한 첩보도 충분히 수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와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물론, 동부전선에 배치된 야전부대들까지도 소련군의 벨라루스 대공세가 임박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중부집단군의 양적ㆍ질적 전력 약화는 나치 독일군의 방어 계획 수립에도 매우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선 중부집단군은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종심전투교리에 입각한 제파식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소련군의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제파식으로 공격해 오는 소련군을 종심깊이 유인하는데 필요한 예비대가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전방의 방어선이 붕괴되면 소련군 후속부대의 종심깊은 공세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강제되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중부집단군은 병력 및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1개 사단이 30km 이상의 정면을 담당해야 했다. 이는 1개 사단이 맡기에는 너무 넓은 정면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단 후방의 예비 방어선 역시 충분히 증강되지 못했다. 소련군이 종심전투교리에 입각한 철저한 작전 계획과 병력 및 장비의 배치, 나치 독일군을 기만할 정보전 등에 만전을 기하는 동안, 중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종심깊은 제파식 공세를 방어할 대책은커녕 소련군의 작전 계획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부집단군 점령 지역 하의 파르티잔들도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에게 무시하기 어려운 위협이었다. 나치 독일은 인종주의와 변질된 레벤스라움 이념에 따라 동부전선의 점령지 하에서 가혹한 점령지 정책을 벌였다. 1차대전 당시 비교적 인도적으로 러시아의 피점령지를 다스렸던 독일 제국군과 달리, 나치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는 '열등 민족'의 제거와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명분삼아 점령지의 유대계 주민과 공산당 간부는 물론, 전쟁포로와 슬라브계 민간인들까지도 절멸시키기 위한 각종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일삼았다. 때문에 동부전선 후방에서는 파르티잔 부대들이 조직되어 나치 독일군을 후방에서 괴롭혔고, 체포된 파르티잔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과 공개 처형 등의 대처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중시켜 파르티잔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벨라루스 일대의 파르티잔들은, 소련군의 제파식 공세에 직면한 중부집단군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붕괴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1944년 6월 22일,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소련군 4개 집단군이 중부집단군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대규모 포병의 지원사격 하에 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였고, 약화된 중부집단군의 화력은 대규모 소련 기갑부대의 파상 공세를 저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소련군은 군데군데 존재하는 중부집단군의 증강된 거점을 우회하며 종심깊이 전진하였고, 과도하게 넓은 정면을 담당해야 했던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은 이 같은 소련군의 기동을 적절하게 저지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이루어지는 소련군의 파상 공세와 더불어, 후방에서 이루어진 파르티잔들의 유격전 역시 중부집단군에게 혼란을 강요하며 주요 거점과 시설, 장비들을 파괴해 갔다. 심지어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프리퍄티 습지의 늪지대를 개척하면서 벨라루스 남부에 기습 공격을 가했고, 이를 예상치 못했던 중부집단군 예하 병력드른 프리퍄티 습지 일대에서 패퇴하며 제1벨라루스전선군이 중부집단군 후방으로 우회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부집단군은 제2발트전선군의 진격에 의해 북부집단군과 완전히 단절당했다. 비텝스크, 바부뤼스크 등과 같은 중부집단군 영역 내의 주요 거점 도시들도 이윽고 소련군에게 포위당하거나 함락되고 말았다. 벨라루스는 지형적으로 평야가 발달한데다 주요 도시들은 요새화는커녕 목조건물 위주의 경관과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에 불리했고, 히틀러의 주요 도시 사수 명령을 받은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은 소련군의 공세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벨라루스 전선에서 패퇴한 중부집단군 부대들은 민스크에 집결하여 역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이전의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큰 손실을 입은 탓에 소련군과 전면전을 벌이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된 형편이었다. 민스크는 결국 7월 3일 소련군 기갑부대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민스크 동쪽에서 방어 작전을 수행하던 나치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제4군마저도 소련군의 종심작전에 의해 포위당했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된 6월 22일부터 민스크가 함락되기까지의 12일 동안 25개 사단(병력 약 30만 명)을 손실하였고, 벨라루스를 사실상 소련군에게 내어주며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민스크 해방을 위한 종심작전을 수행하면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한 4개 집단군의 손실 또한 누적되었기에 이들의 진격 속도는 7월 중신께 접어들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해임된 부슈를 대신하여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 발터 모델 원수는, '총통의 소방수'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게 중부집단군의 잔존 병력을 재편하여 벨라루스 서부에서 방어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벨라루스 침공은 민스크 방면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7월 13일에는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리비우-산도미에시 작전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 서부의 리비우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7월 27일에는 나치 독일군이 리비우를 포기했고, 7월 29-30일에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예하 부대들이 산도미에시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중부집단군 예하 4개 기갑군단(제3, 제24, 제48, 제53)이 산도미에시 탈환을 위해 1개월 가까이 반격과 역습을 진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벨라루스를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 소련군은, 폴란드 방면으로 공세를 지속하였다. 퇴각하는 중부전선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폴란드까지 전선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7월 25일에는 소련군 제8근위군과 제2전차군이 비스와 강에 도달하였고, 28일에는 제2전차군이 바르샤바 남동쪽 83km 지점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700km 이상의 종심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이 누적된 데다, 보급 문제 또한 불거졌다.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발터 모델은 8월 초에 중부집단군 잔존 병력, 그리고 헤르만 괴링 강하 기갑사단 등의 증원 병력을 재편하여 바르샤바 인근에서 역습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제3전차군단이 괴멸적인 손실을 입는 등, 막대한 손실을 강요당했다. 8월 5일, 소련군은 병력 및 장비의 보충과 재편, 그리고 후속 작전을 위해 공세를 중지하였다. 이로서 바그라티온 작전은 막을 내렸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따른 전선의 변화. 소련군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회복하고 폴란드까지 진격하였다.(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에 따라 소련군이 바르샤바 목전까지 도달하자, 폴란드 영토 내에서 저항 활동을 지속하던 폴란드 국내군(병력 4-5만 명 규모)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시를 받아 8월 1일 봉기하였다. 바르샤바 봉기를 통해 바르샤바를 제압하고, 소련군과 합세하여 폴란드를 해방한다는 목적이었다. 마침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로코솝스키는 폴란드계이기도 하였다. 폴란드 국내군은 소련군과 로코솝스키의 지원 약속을 믿고 봉기를 감행하여, 한때 바르샤바 시역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군은 각종 중장비로 증강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투입하여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소련군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치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세에 크게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폴란드 진압군을 진압할 능력은 갖고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의 의도는 동부전선에서의 효과적인 작전을 통해서 나치 독일군을 격파하고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있었지, 폴란드 민중을 해방하는 데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한 소련군 부대들이 8월 초에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소련군으로서는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할 여력이 더더욱 부족한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친서방 성향을 가졌던 폴란드 망명정부와 국내군이 바르샤바 봉기에 성공하여 연합군 내부에서 발언권과 위상이 제고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10월 4일에 접어들어 바르샤바 봉기는, 수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국내군 및 민간인 포함) 사망자를 기록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성범죄를 저지르고 바르샤바 시내가 초토화될 정도로 파괴와 방화를 일삼은 무장친위대 사단의 지휘관들은,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처형되거나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한편 로코솝스키는 바르샤바 봉기에서 보여 준 배신 행위에 가까운 행동, 그리고 전후 소련의 폴란드 군정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정치로 인해 오늘날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도 민족반역자,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나치 독일 중부전선군은 45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을 손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1천-2대가 넘는 전차와 자주포, 항공기까지 손실하고 말았다. 게다가 벨라루스는 물론, 서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영토 일부마저 소련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발터 모델이 수완을 발휘하여 잔존 병력을 재편하고 8월 초에 소련군에게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역습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중부전선군은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소련은 기존 영토를 거의 수복했고, 동부전선은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영토를 향해 공세를 가하는 양상으로 완전히 전환되고 말았다. 발터 모델이 잔존 병력을 수습해서 바르샤바 인근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냈고 히틀러가 중부집단군 잔존 부대의 재편을 명령했다지만,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을 주도할 군사적 역량은 물론 지리적 배경마저 사실상 상실하고 말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나치 독일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다. 우선 핀란드는 소련 레닌그라드전선군과 카렐리야전선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소련과 강화 협정에 나서면서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했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나치 독일로서는 잃어서는 안 될 석유 자원의 보급 기지였던 루마니아마저 나치 독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따라 소련군이 루마니아 국경선까지 육박하자, 1944년 8월 23일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Michael I, 1921-2017)가 쿠데타를 일으켜 파시스트 정권의 실권자였던 이온 안토네스쿠(Ion Victor Antonescu, 1882-1946)를 축출하고 연합군에 항복한 것이었다. 나치 독일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중부집단군을 비롯한 동부전선의 군사적 역량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음은 물론, 정치적ㆍ지정학적으로도 고립되고 말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소련군에게도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200-250만에 달하는 소련군 장병들 가운데 100만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전차와 자주포의 손실 역시 3천 대를 상회할 정도였다. 이 같은 손실은 나치 독일군이 입은 손실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소련은 그 대가로 벨라루스를 비롯한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탈환할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을 압도하는 공업 생산력 및 인적 자원 보충 능력을 통하여 나치 독일군과 달리 효율적으로 병력 및 장비를 충원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도 종심전투교리에 입각한 대공세를 지속했고, 프랑스의 연합군까지 상대해야 했던 나치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광정면으로 종심깊이 진격해오는 소련군의 제파식 공세를 당해낼 역량이 없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정확히 3주년이 되는 날에 개시된 바그라티온 작전은,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는 수준을 넘어 동부전선의 지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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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eťová, M., and Syrný, M., 2020, The 1944 Warsaw Uprising, Journal of the Belarussian State Univsersity: History, 1, 18-23.

Tucker-Jones, A., 2009, Stalin's Revenge: Operation Bagration and Annihilation of Army Group Centre, Barnsley, South Yorkshire: Pen & Sword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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