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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Nov 19. 2020

지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1941년 12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미군은 1942년 말 횃불 작전을 통하여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를 굴복시키기도 했지만, 유럽 전선에 대한 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이루어진 계기는 1944년 6월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럽 전역의 지형도가, 서부전선에도 본격적으로 무게추가 실리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신호탄이었다. 이를 통해서 미군은 연합군과 더불어 프랑스를 해방하고, 종국적으로는 소련군과 함께 나치 독일을 항복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냉전시대 서구 학계는 소련에 대한 폄하, 그리고 소련이 대량의 전사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던 사실 때문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야말로 2차대전의 진정한 전환점으로 평가하는 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오늘날에는 서구 학계에서도 냉전기와 달리 동부전선에서 이루어진 소련군의 나치 독일군의 침공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독ㆍ소 전쟁 중ㆍ후반에 실시한 대공세가 2차대전의 실질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대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평가절하하기는 어렵다.

  이번 장에서는 동명의 영화 덕분에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스탈린은 독ㆍ소 전쟁 초기였던 1941년 6월부터 영국과 미국에 서부전선으로의 참전을 요구했다. 연합군이 서부전선에 공격을 개시한다면 나치 독일의 전력이 동서로 분산되어 소련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스탈린의 요구를 즉각 수용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영국은 프랑스 공방전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은 데다,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추축국의 위협에 직면에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1941년 12월 이전까지는 나치 독일과 전쟁에 돌입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1942년 초반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의 급격한 세력 확장에 직면하여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1942년 5월 말에 이르러 스탈린과 루즈벨트는 유럽의 서부전선 구축을 합의했지만, 처칠이 영국군의 병력 및 전쟁 준비 부족을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결국 연합군의 서부전선 참전은 연기되고 말았다.

  미군의 유럽 전선에 대한 본격적인 참전은 유럽 대륙이 아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이루어졌다. 1942년 후반에 횃불 작전을 통하여 튀니지에 상륙한 미군은 이듬해 봄에 영국군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을 소멸시켰고, 여름에는 시칠리아에 이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무솔리니 정권을 붕괴시키고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나치 독일의 석유 자원 공급처였던 루마니아 유전 지대와 동부전선 후방을 위협하여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몰라도, 나치 독일에 본격적인 역습을 가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북부에는 알프스 산맥 등 험준하고 거대한 산악 지형이 분포하는 데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중립국인 스위스가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실각 후 연금 중이던 무솔리니를 구출한 다음, 이탈리아 북부에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Repubblica Sociale Italiana, 통칭 살로 공화국(Salo Repubblica))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즉, 이탈리아는 비시 프랑스 및 나치 독일 영토로 대규모의 연합군 병력을 진격시키기에 적합한 지리적ㆍ지정학적 위치가 아니었다.   연합국이 나치 독일을 항복시켜 유럽 전선에서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프랑스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프랑스를 해방시킨 다음 나치 독일 영토로 진격하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독일이나 벨기에, 네덜란드 해안은 나치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에서 발진하는 공군기와 잠수함이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영역 안이었던 데다 연합군의 상륙 거부를 위한 강력한 요새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간석지, 호소, 반도 등이 다수 위치하여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을 위한 지점으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1943년 영국군과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영불 해협을 건너 유럽 대륙에 상륙한다는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up)이 같은 해 1월 연기되었던 까닭에는, 유럽 상륙의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영국의 사정뿐만 아니라 이 같은 지리적 요인도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동부전선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하고 미군과 영국군이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한 데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을 계기로 전쟁의 주도권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감에 따라,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통한 서부전선의 형성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워싱턴 DC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사이에 열린 트라이던트 회담에서는, 루즈벨트와 처칠 간에 프랑스 상륙을 통한 서부 전선의 형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Chief of Staff Supreme Allied Commander)으로 임명된 영국 육군 중장 프레데릭 모건(Frederick Edgworth Morgan, 1894-1967)은, 후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으로 이어질 라운드업 작전의 수정안, 즉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작전의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43년 중반 무렵에는 연합군 해군이 대서양에서 유보트의 활동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작전의 계획과 준비는 더한층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1943년 11월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 간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듬해 5월까지는 서유럽에 병력을 진격시켜 서부전선을 형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다음 달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는 프랑스 상륙작전의 윤곽이 마련되었다. 연합군 원정군 총사령관에는 미 육군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대장이 임명되었고, 그는 1944년 초반 영국 런던에 연합국 원정군 사령부(Supreme Headquarters of the Allied Expeditionary Force (SHAEF))를 설치했고, 예하 지상군 작전을 총괄할 제21군집단(The 21st Army Group)의 사령관에는 영국 육군의 버나드 몽고메리 대장이 임명되었다.  


  나치 독일 측도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본적인 예상과 대비는 해 두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대서양 방면을 통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41년 영국군 특수부대인 코만도(Commando) 대원들이 노르웨이 해안의 나치 독일군 기지를 습격하여 파괴하는가 하면  1942년 8월에는 나치 독일을 후방에서 교란하고 소련군의 서부전선 형성 요구도 무마할 겸 캐나다 육군 제2사단과 영국군, 미군, 자유 프랑스군 특수부대들로 구성된  연합군 부대가 영불해협 인근의 항구도시 디에프(Dieppe)에 상륙하여 기습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만일 연합군이 우세한 수상 함대 전력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나 독일의 해안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배후가 뚫리고 심각한 전력 분산을 강요당할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디에프 상륙작전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였다.(출처: WarMuseum.ca)

   당장 영불 해협 건너편의 영국은 건재했고, 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나치 독일 공군의 대규모 공습(영국 본토 항공전)은 오히려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에 불을 지폈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군에게 막대한 공군기 손실까지 강요했다. 만에 하나라도 영국군이 영불해협을 건너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나치 독일의 배후를 치기라도 한다면, 나치 독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난국에 직면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미 1942년에 노르웨이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단에서 에스파냐와 인접한 프랑스 남서단에 이르는 대서양 방면의 해안 지대에 ‘대서양 방벽(Atlantikwall)’이라 불리는 해안 요새 체계를 건설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방벽은 연합군의 상륙작전 수행에 실질적인 제약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은 안전하다’라는 식의 나치 독일 프로파간다로도 적극 활용되었다. 물자 부족 등의 이유로 대서양 방벽의 모든 영역이 강력한 요새로 탈바꿈하지는 못했고 상당 부분의 구간들이 해안에 철조망을 두른 수준에 불과했지만, 대서양 해안을 감시하는 요새 체계의 건설은 연합군 입장에서는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실제로도 대서양 방벽의 구조물들은 지금도 상당한 숫자가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오늘날 이 구조물들은 관광지로는 물론 심지어 해안선 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기준점으로까지 쓰이고 있다.  

대서양 방벽의 영역(황색 선). 모든 해안선을 완벽하게 방벽으로 차단했기보다는, 해당 영역을 잇는 요새 체계를 건설한 형태였다.(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해안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서부전선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도출한 연합군에게는, 구체적인 상륙 장소와 일정을 선택해야 한다는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규모 특수부대의 기습이 아닌 대규모 병력의 상륙을 위해서는, 전차와 기갑차량, 화포 등의 상륙에 지형적으로나 지질학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장소에 상륙해야만 했다. 나치 독일군이 상륙 거부 작전을 수행하는데 유리한 항만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들을 수송할 상륙함이나 양륙함의 운용과 정박에도 문제가 없어야 했다. 대서양 방벽의 존재도 간과할 수 없었다. 대서양 방벽의 요새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나치 독일군의 반격으로부터 은엄폐하여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연합군은 이미 1942년에 디에프 기습에서 참패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주력이었던 캐나다군은 연합군 전체에서 차지하는 숫적 비중이 작았을 뿐 대전 기간 동안 이들이 보여준 용맹성과 전과는 연합군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던 데다, 영국군 코만도 부대, 미군 레인저 부대 등 각국이 자랑하는 최정예 특수부대들까지 참여했었다. 하지만 단애와 구릉이 발달한 디에프 해안은 지형적으로 상륙작전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디에프에는 항만시설까지 충분히 발달해 있어, 상륙작전에는 더더욱 적합치 못했다. 항만시설이 발달할 경우 방자 측에서는 항만시설을 활용하여 상륙 거부 작전을 수행하기 용이할뿐더러, 체계적으로 구축된 항만시설로 인해 공자 측이 기습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기에도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군 함정의 지원까지 받았던 연합군의 정예 병력은, 디에프에 제대로 상륙조차 하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만 입고 말았다. 즉, 상륙 지점의 지형 등 지리적 환경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연합군의 프랑스 해안 상륙은 큰 손실을 빚을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단애, 구릉 등이 발달한 디에프 해안은 상륙작전에 부적합했다.(https://warfarehistorynetwork.com/2018/12/05/disaster-at-dieppe)

  모건과 SHAEF 참모부는 대규모의 연합군 병력을 안전하게 상륙시킨 다음 프랑스 영내에 효과적으로 진격시키는데 적합한 상륙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장소가 후보지에 올랐고, 그중 처음에는 영불해협 인근의 파드칼레(Pas-de-Calais)가 상륙 후보지로 제안되었다. 파드칼레는 영불해협을 건너기만 하면 도착할 수 있는 데다, 아미앵(Amiens), 아라스(Arras), 랑스(Lens) 등 교통의 요지와 인접했고 파리와도 거리가 가까웠다. 하지만 파드칼레 상륙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각되었다. 영불 해협을 통한 프랑스 상륙은 나치 독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이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상륙 거부 수단을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프랑스 함락 직후 영국군이 본국으로 탈출한 장소인 됭케르크(Dunkirk),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이미 이루어진 바 있는 디에프 등은 모두 파드칼레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장소였다. 이처럼 프랑스 상륙 지점으로서 현실적으로 적합성이 떨어지는 파드칼레의 대안으로 지목된 장소가 바로 노르망디였다. 영국 남부의 항구도시 포츠머스(Portsmouth)로부터 남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만입부에 위치한 노르망디 해안은, 광대한 사빈(沙濱), 즉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해안의 경사도 완만하여 대규모 병력의 상륙에 적합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일대에는 항만 시설의 발달이 미약했기 때문에, 상륙작전에는 더더욱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서양 방벽의 요새 체계는 상륙 지점의 동단에서 북동쪽으로 약 36km 떨어진 센(Seine) 강 하구 북안(北岸)까지는 조밀하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으나, 센 강 하구 남안(南岸)부터는 요새 시설의 밀도와 강도, 화력이 눈에 띄게 약했다. 지질학적 조건 역시 상륙작전 수행애 적합했다. 화강암 기반암의 코탕탱(Cotentin) 반도(셰르부르 위치) 서안 등지와 달리 상륙 장소는 석회암 및 퇴적암 기반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회암 기반의 토양은 상륙군이 임시 비행장과 도로를 신속하게 가설하는 데는 물론, 대규모 병력의 유지에 필요한 지하수의 확보에도 유리했다. 때문에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지질학자들을 동원하여 상륙 장소의 지질을 분석하고, 이를 작전 구역 분할에 적극 반영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지점의 지질도(Bresson, 2019)

  오버로드 작전의 수립에 따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훈련 겸 병력 수송 계획인 볼레로 작전(Operation Bolero)을 통하여, 미군 등 연합군 병력을 영국으로 수송하였다. 그리고 나치 독일군을 기만하기 위한 포티튜드 작전(Operation Fortitude)도 행해졌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노르웨이 또는 파드칼레에 상륙할 예정이라는 허위 정보를 퍼트렸고, 파드칼레 상륙군으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용명을 떨친 조지 패튼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군집단(First U.S. Army Group)이라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위 부대를 창설하여 이 부대의 활동에 관한 정보까지 고의적으로 퍼트렸다. 심지어 파드칼레 방향으로 대량의 폐선이나 열기구 등을 배치하여 나치 독일의 레이더 감시망에 ‘파드칼레 상륙을 준비 중인 대규모 연합군 병력’이 포착되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포티튜드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 상륙 직전까지도 나치 독일군 수뇌부에는 연합군이 파드칼레에 상륙하리라고 믿었던 고위 장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버로드 작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면은 바로 노르망디 상륙이었다. 노르망디에 연합군 병력이 안전하게 상륙해야만 이어지는 프랑스 영내로의 진격 및 프랑스 해방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상륙작전에 임하는 군대는 상륙하는 과정에서 적군의 감시망과 상륙 거부 수단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쉬운 데다, 사빈 해안 지형의 특성상 병력의 은폐 및 엄폐도 용이하지 않다.  게다가 2차대전 당시에는 대규모 병력의 상륙작전이 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 LST)이 해안 근처에 정박한 뒤 병력이나 장비를 단정이나 주정에 옮겨 태워 상륙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LST에서 주정 및 단정에 옮겨 탄 병력이 해안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은 특히 많은 위험이 따랐다. 적군의 시야와 화망에 그대로 노출되는 데다,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거나 엄폐할 수단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SHAEF는 노르망디 상륙 당일의 작전 계획인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을, 오버로드 작전의 하위 작전으로 수립하였다. 해왕성 작전에 따라 노르망디 해안은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서드(Sword)의 5개 구역으로 크게 분할되었다. 이 가운데 서쪽의 유타 해안과 오마하 해안에는 미군이 상륙하기로, 동쪽의 나머지 3개 구역에는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상륙하기로 계획되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가  착착 이루어지는 동안, 나치 독일군 수뇌부도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 및 침공이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 총사령관(Oberkommando West)으로 임명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서부전선 형성에 대비하여 정예 병력 양성 및 해안 지역의 상륙 거부 대책과 경계 태세 증강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기울였다. 폰 룬트슈테트 휘하에서 프랑스 해안 방어 및 상륙 거부 대책 마련을 담당할 책임자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용명을 떨친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가 임명되었다.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핵심은 연합군의 상륙 거부의 성패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았던 롬멜은, 프랑스 해안 일대에 연합군의 상륙 거부를 위한 대규모의 장애물을 가설하였다. 상륙 주정의 상륙과 해안에 상륙한 병력 및 장비의 진격, 그리고 강하한 공수부대의 활동을 거부할 철조망과 말뚝, 지뢰, 기뢰가 프랑스 해안에 대거 설치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군은 롬멜의 지휘 하에 프랑스 해안에 지뢰만 400만 개 이상을 설치했고,  

  하지만 나치 독일, 그리고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연합군 상륙에 대한 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선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지속적으로 대공세를 펼치며 전선을 서쪽으로 밀어붙임에 따라, 서부전선 총사령부가 애써 양성한 병력과 확보한 장비의 상당수가 동부전선으로 차출되고 말았다. 나치 독일군 수뇌부는 연합군의 상륙 지점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폰 룬트슈테트, 롬멜 등 대다수의 군부 내 고위 인사들은 연합군이 노르망디가 아닌 파드칼레 또는 그 근처에 상륙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폰 룬트슈테트와 롬멜 간의 견해차도 불거졌다. 폰 룬트슈테트는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한 다음 포위 섬멸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반면 롬멜은 나치 독일군, 특히 서부전선 예하 군 병력의 양적ㆍ질적 열세가 분명한 데다 제공권마저 연합군이 가진 만큼, 연합군이 상륙에 성공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기 전에 가용한 기갑전력을 최대한 동원하여이 해안에서 그들을 섬멸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롬멜을 신뢰하지 않았던 폰 룬트슈테트는 롬멜 휘하의 B집단군 지휘권을 자신에게로 옮겼다. B집단군 사령관 롬멜이 예하부대 지휘를 룬트슈테트의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계속해서 불거지자, 히틀러는 롬멜에게 제12SS히틀러유겐트 기갑사단 등 3개 기갑사단의 직접적인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미봉책에 가까운 절충안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히틀러는 병력 지휘를 자신의 허가를 득한 뒤에 하도록 하였다.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불리한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악천후로 인한 연기 끝에, 1944년 6월 6일 해왕성 작전을 통한 노르망디 상륙이 개시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에는 총 100만 명 이상의 연합군이 동원되었고, 이 중 해왕성 작전에만 약 13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함 6척, 순양함 23척, 구축함 80척의 호위를 받았으며, 미군의 2개 공수사단(제82공수사단, 제101공수사단)과 영국군 제6공수사단도 주요 거점 장악을 위해 투입되었다. 나치 독일군 수뇌부가 비록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다고는 하나, 노르망디 해안에는 5만여 명 규모의 3개 사단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해왕성 작전에 투입된 연합군 병력에 비하면 적은 규모였지만,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임했던 반면 나치 독일군은 요새와 토치카에서 방어하는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결코 병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연합군 역시 노르망디 상륙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노르망디 해안으로의 상륙 자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연합군의 공수부대 강하는 노르망디를 방어하던 나치 독일군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고 혼돈을 가중시켰으며, 해안포와 기관총 진지를 효과적으로 제거 및 무력화하였다. 대규모 해군 함정의 함정의 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은 상륙하는 지상군 병력에게 효과적으로 화력지원을 제공하였고, 나치 독일 해안포와 해안 요새를 무력화하는데도 효과적이었다. 심지어 영국군은 전차의 차체에 굴착기, 지뢰 제거기 등을 장착한 ‘퍼니 전차(funny tank)’를 개발하여 해왕성 작전에 투입하였고, 이 장비들은 노르망디 해안의 지뢰와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톡톡한 활약을 하였다. 나치 독일 해군은 사실상 무력화된 터라 연합군 함대에 대한 위협을 가할 수 없었고, 공군력 역시 크게 약화되어 연합군의 공중 폭격을 저지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해안의 나치 독일군은 상륙하는 연합군에 비해 병력의 수 면에서는 우위였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그러지 못하였다. 상술했듯이 서부전선 총사령부가 양성하거나 획득한 우수한 병력과 장비는 상당수가 동부전선으로 돌려진 상태였고, 노르망디의 나치 독일군은 질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연합군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노르망디 인근에는 제12SS히틀러유겐트 기갑사단 등의 기갑사단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히틀러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6일 오후가 넘도록 출동조차 하지 못했다.

  오마하 해안에서는 상륙주정에서 내려 상륙하던 미 육군 병력이 나치 독일 해안포와 토치카의 집중포화에 노출되어 3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등 ‘피투성이 오마하 해안(Bloody Omaha)’이라 불릴 정도의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다른 해안에 비해 지형적으로 해안 절벽이 발달한 데다, 공수부대의 활동이 미미하여 해안 포대와 토치카, 기관총 진지 등이 상륙하는 미군을 향해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합군은 이외의 구역을 비교적 순조롭게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오마하 해안 역시 악전고투 끝에 장악할 수 있었다. 5개 구역의 완전한 연결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 여러 날이 지나서야 이루어졌고 나치 독일군은 여전히 노르망디 해안 인근의 주요 요소들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왕성 작전을 통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군의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1943년 중-후반기는 2차대전의 유럽 전선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쿠르스크 전투에 이어진 일련의 대공세를 통해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며 나치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추축국 세력이 소멸했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은 이탈리아 상륙을 통해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 본토는 여전히 건재했다. 이탈리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몰라도 독일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기에는 충분치 못했으며,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에 괴뢰 정권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고는 하나, 나치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 인명 피해만 수천만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이 누적된 상태였다. 즉, 나치 독일을 수세로 몰아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독일 본토를 점령하여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여건은 아직 조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 같은 2차대전 유럽 전선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노르망디에 대규모의 연합군이 상륙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럽 전선에는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서부에도 본격적인 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해왕성 작전을 통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은, 이 곳을 교두보로 삼아 오버로드 작전의 남은 목표들을 달성해 갔다. 6월 26일에는 코탕탱 반도 북쪽의 항구도시 셀부르를 점령했고, 7월 21에는 노르망디 남동쪽에 위치한 캉을 점령했다. 이어서 8월 21에는 캉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팔레즈(Falaise)에서 약 6만 명 규모의 나치 독일 제7군 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팔레즈 포위전). 이와 더불어 연합군은 8월 15일 용기병 작전(Operation Dragoon)을 개시하여 프랑스 남부의 코트다쥐르(Côte d'Azur)에 상륙했고, 이어서 마르세유와 툴롱 점령까지 성공했다. 팔레즈 포위전과 용기병 작전 이후 프랑스 영내의 나치 독일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따른 서부전선의 형성은 나치 독일군의 전력에 분산을 강요함으로써, 나치 독일군에게 전략적으로는 물론 지리적으로 심각하게 불리한 상황을 초래했다. 나치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내어 서부전선에서 진격해 오는 미군과 영국군까지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상실도 나치 독일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본격화된 연합군의 전략 폭격은, 나치 독일의 군수 및 산업 능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저하시켰다. 전략 폭격기의 부재로 동부전선 후방의 나치 독일 영역에 위치한 군수시설, 산업시설까지 타격을 가하지 못했던 소련군과 달리, 연합군, 특히 미군은 B-17, B-24 등 항속거리가 길고 대량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폭격기들을 운용하여 나치 독일의 전선 후방에 위치한 대도시와 산업 시설, 군수 공장 등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 영토 내부에 공군 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연합군의 나치 독일 영토 공습은 그 횟수와 파괴력이 눈에 띄게 증가해 갔다. 물론 노르망디 이전에도 연합군은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독일 본토를 공습하기도 했지만, 독일에 인접한 데다 영토가 광대한 프랑스의 탈환은 연합군에게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큰 독일 본토 공습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끔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눈에 띄게 강화된 연합군의 공습은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저하시켰지만, 이 와중에 뉘른베르크 등의 대도시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은 1944년 8월 24일 파리에 입성했고, 이튿날 나치 독일의 프랑스 군정청장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1966) 대장이 필리프 르클레르(Philippe François Marie Leclerc de Hauteclocque, 1902-1947) 자유 프랑스군 중장에게 항복함으로써 프랑스는 만 4년이 넘는 나치 독일 점령 하에서 해방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은 성공으로 끝났다. 이후 연합군의 진로는 나치 독일 본토를 향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처럼 유럽 전역에 서부전선이 형성되도록 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몰락이 가시화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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