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중 지중해에서 일어난 전투를 지정학, 지리학적으로 살펴보기
지중해는 낭만적인 정취와 경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인류사, 특히 서양사의 흐름과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다이기도 하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세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이들 지역 간의 교통과 교류가 이루어진 지리적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대부터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국가들은 지중해의 해상권 장악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고대 페니키아 인들은 지중해를 따라 유럽 각지로 진출하여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였고, 이는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 등 유럽 문명이 발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일어난 포에니 전쟁에는 지중해 해상권 장악이라는 배경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세계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중세-르네상스 시대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아라곤 왕국(오늘날 에스파냐 카탈루냐 지방에 있던 나라) 등이 지중해의 해양력과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여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지중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중해는 나폴레옹 전쟁, 이탈리아 통일 등 유럽 근현대사의 전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중해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은 2차대전의 전개와 과정에서도 결코 간과하기 어렵다. 지중해가 유럽 전역에 연해 있었던 만큼, 지중해의 해상력 장악은 2차대전의 전개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장에서는 2차대전에서 지중해가 가졌던 지정학적, 전략적 의미를 지리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의 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지중해는 남유럽 및 북아프리카, 중동 국가들과 인접해 있다. 따라서 지중해의 해양력 확보는, 이들 국가들 간의 안보 및 정치ㆍ군사ㆍ외교 전략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2차대전 당시 지중해의 지정학적, 전략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지중해의 제해권을 다투고 있었다. 두 나라는 각각 지중해에서 1, 2위에 해당하는 해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강국이었다. 프랑스야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3국 동맹의 일원으로 추축국의 한 축을 차지하는 강국이었다. 프랑스가 연합국, 이탈리아가 추국국의 핵심적인 구성원이었던 만큼, 이 두 나라의 해양력 경쟁은 지중해에서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해양력 장악을 위한 경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영국이 지브롤터 해협을 자국 영토로 지배했던 만큼 유사시 지중해에 해양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둘째, 지중해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식민지를 이어주는 해역으로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녔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대거 확보해 두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1930년대에 에티오피아, 리비아 등지를 침공하여 식민지로 만들어둔 터였다. 여기에 덧붙여, 이집트와 중동의 영국 식민지들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인도와 인도양 등으로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 지정학적 요지였다. 지중해는 이처럼 교통상,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식민지들과 식민모국을 이어주는 해역이었다는 점에서, 지중해의 해상권 장악은 2차대전의 향방에도 간과하기 어려운 중요성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지중해는 흑해와 연결되었고, 흑해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등 소련 영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나치 독일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가 소련이었던 만큼, 지중해는 독-소 전쟁과도 결코 무관한 해역이 아니었다. 넷째, 지중해는 이탈리아, 비시 프랑스, 에스파냐와 인접하면서 이들 국가와 중요하게 연결되는 해역이었다. 이 세 나라는 친독 성향이거나 나치 독일의 속국이었던 만큼, 지중해 장악은 이 세 나라의 관계 증진 및 연계 강화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었다.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됨으로써, 지중해 제1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프랑스 해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프랑스 해군 소속 함정 가운데 나치 독일은 소수의 경순양함과 구축함 정도만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일부 함선들은 프랑스를 탈출하여 자유 프랑스 정부 등으로 합류하는 데 성공했지만 상당수의 해군 전력은 비시 프랑스군 휘하에 속했고, 비시 프랑스의 해군장관 프랑수아 다를랑(Jean Louis Xavier François Darlan, 1881-1942) 제독은 중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프랑스 해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으로 합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비시 프랑스 함대가 나치 독일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한 처칠은, 비시 프랑스의 선전 포고 위협을 무릅쓰고 1940년 7월 3일 캐터펄트 작전(Operation Catapult)을 감행하여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Mers el-Kébir) 항구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영국 해군은 몇 대의 전투기와 몇 명의 인명을 손실하는 가벼운 피해를 입었던 반면, 비시 프랑스 해군은 전함 브르타뉴(Bretagne) 호가 격침당하는 등 상당수의 함선들이 격침 또는 파손당하고 1,200명이 넘는 해군 장병들이 사망하는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비시 프랑스 해군의 잔존 함선들도 나치 독일군에게 적극적인 협력을 하지는 않았으며, 1943년 나치 독일이 이들 함선들을 독일 해군으로 편입하려 했을 때에는 대부분 자침하고 말았다.
비시 프랑스 해군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나, 이탈리아 해군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국 해군이 지중해 함대를 보유했다고는 하나, 프랑스의 함락으로 인해 유럽 대륙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지중해 해역에만 전력에 집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해군은 다수의 전함과 수십 척의 순양함 및 구축함, 게다가 항공모함까지 보유하는 등, 영국으로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탈리아 해군의 양적 전력은 영국 지중해 함대보다도 더욱 강력했고, 영국은 지중해 함대의 전력을 증강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영국 지중해 함대와 함께 이탈리아 해군을 견제해야 할 프랑스 해군은 사실상 전선에서 이탈해 버린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영국으로서는 아프리카, 중동, 인도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릴 처지였다-희망봉을 경유하는 경로도 있었지만, 지중해를 통한 경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험난했다.
결국 영국 지중해 함대는 1940년 11월 12-13일,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이었던 이탈리아 남단의 타란토 항에 대한 항공 공습을 감행하였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복엽기 소드피시(Swordfish) 뇌격기 부대를 활용한 타란토 항 기습 공격을 통해 군항 내에 정박한 이탈리아 함대를 격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결과 영국 지중해 함대는 뇌격기 2대를 손실한 데 반해,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 호가 격침당하고 2척의 다른 전함이 대파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비록 타란토 항 공습이 이탈리아 해군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했고 이후에도 이탈리아 해군과 비시 프랑스 해군은 지중해에서 연합국에게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해양력에는 중대한 손실이 야기되었다. 이탈리아 해군은 이로 인해 지중해에서 영국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이는 지중해에서 이탈리아군, 그리고 나치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 해군은 영국 지중해 함대의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하여, 진주만 기습을 위한 작전 계획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1940년 5-6월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 함락에 성공하자, 무솔리니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세력 확대를 위해 그리스와 이집트 침공을 단행했다. 나치 독일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심리도 무시할 수 없었거니와, 프랑스가 함락되고 영국이 고립되었다는 상황은 이탈리아로 하여금 이때야말로 지중해, 북아프리카에서의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도록 만들었다. 영국 본국이 고립된 만큼, 지중해 일대에 병력을 증원하거나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그 근거였다.
문제는 나치 독일군과 달리,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전선에서 졸전을 거듭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은, 숫적으로 월등한 열세에 처해 있던 영국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영국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도군, 호주군 병력을 이집트에 증원하는 등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에 대한 대비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2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뛰어난 전략가로 명망이 높던 인물이었던 이집트 주둔 영국군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Archibald Percival Wavell, 1883-1950) 원수는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및 역습 계획을 철저히 마련해 둔 터였다. 반면 나치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1919년 무솔리니의 집권으로 파시즘 정권이 수립되기는 했지만 군 현대화나 정예화, 현대적인 전술교리 개발 등에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장교단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웨이벌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1940년 12월 9일 이집트 북서부의 시디바라니(Sidi Barrani)에서 이탈리아군의 주력을 섬멸했고, 이듬해 1월에는 이탈리아군의 잔존 병력까지도 격파하며 이집트-리비아 국경까지 진격하였다.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북동부의 항구도시 투브룩(Tubruq)까지 상실한 채 트리폴리로 무질서하게 후퇴했으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병력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장비마저 파괴 또는 유기되고 말았다. 이어서 1941년 2월 이탈리아는 영국군의 공격에 의해 에티오피아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스 전투에서 역시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이어 갔다. 발칸 반도는 흑해의 관문과도 같은 지정학적ㆍ전략적 위치를 점하는 만큼, 이탈리아가 국력이 약했던 그리스, 나아가 알바니아를 조속히 점령한다면 나치 독일로서는 독-소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며 전념할 수 있을 터였다. 흑해 연안과 카프카스 지역의 자원 확보도 나치 독일, 나아가 추축국의 전쟁 수행 능력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지상군은 심지어 이탈리아 공군이 유명무실했던 그리스 공군력을 제압하고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 하에서조차, 그리스 육군을 상대로 연패를 거듭했다. 영국과 동맹을 맺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전쟁 준비를 완비했던 그리스군을 상대로, 이탈리아군 자휘관과 참모들은 부적절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을 구사하며 졸전만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군은 지중해 전역에서 졸전과 패전만을 거듭했다.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물론, 객관적으로 국력과 군사력 측면에서 현저한 열세에 있었던 그리스, 알바니아를 상대로도 연전연패를 이어 갔다. 이는 무솔리니 정권의 동요로 이어졌다. 무솔리니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이탈리아군 참모총장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 1887-1956) 원수를 해임하고 연령 45세 이하인 정부 각료들을 알바니아 전선으로 파견하는 등의 시도를 통해서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처칠은 1940년 12월 23일의 연설에서, 이탈리아는 '단 한 사람', 즉 무솔리니 때문에 국가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는 요지의 언급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와 발칸 반도에서의 연전연패를 극복하지 않고 몰락한다면, 나치 독일은 정치적ㆍ전략적ㆍ지정학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다. 우선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이탈하거나 연합국에 가담한다면, 나치 독일로서는 어찌 되었든 중요한 동맹을 잃고 정치적ㆍ전략적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컸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지중해 일대를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 즉, 이탈리아를 잃는다면 지중해의 해상권은 영국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터였다. 비시 프랑스가 존재했다고는 하지만, 해군력이 크게 약화된 이들만으로 영국 지중해 함대를 견제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와 알바니아가 영국과 동맹을 맺고 2차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한다면, 흑해와 카프카스 방면을 견제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줄 터였다.
결국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1941년 2월 북아프리카에 군단 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에르빈 롬멜 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었다-이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뿐만 아니라 1941년 4월에는 내분에 휩싸여 있던 그리스의 동맹국 유고슬라비아의 친나치 세력을 회유하여 이 나라를 점령한 뒤, 그리스 침공을 단행하였다. 그리스 북부, 알바니아 동부에서 이탈리아군을 견제하던 유고슬라비아가 무너지자, 나치 독일군은 그리스군 및 그리스 주둔 영국군 병력의 방어선을 손쉽게 돌파하며 각 제대들을 분단시켰다. 그리스는 4월 말 결국 나치 독일에게 항복했고, 나치 독일군은 같은 해 5월 말에는 그리스 남단의 요충지 크레타 섬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그리스는 1944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나치 독일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대한 저항, 레지스탕스를 이어갔다.
유럽에서 지중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로 간과할 수 없었으며, 이는 2차대전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군력 경쟁을 위한 경쟁, 영국 지중해 함대와 이집트 주둔군의 활동, 캐터펄트 작전과 타란토 공습 등은 바로 이 같은 지중해의 지정학적ㆍ전략적 중요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문제는 추축국에서 지중해 방면을 담당했어야 할 이탈리아가, 수준 이하의 졸전을 이어가며 연패를 거듭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나치 독일에게 적지 않은 위험을 강요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지중해를 장악한다면, 이들은 식민지와의 교역을 안전하게 이어가면서 고립된 상황으로 인해 고사하기는커녕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발칸 반도에서 흑해와 카프카스 방면을 견제한다면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역시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은 결국 그리스와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여, 발칸 반도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사령관 롬멜 원수와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전설로 거듭났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이 같은 전과의 이면에는, 지중해 전역의 존재와 이탈리아군의 졸전으로 인한 나치 독일의 전력 분산이라는 부작용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양력의 부족으로 결국 영국 점령에 실패했던 나치 독일은, 지중해라는 또 다른 해역의 존재와 그 해역이 가졌던 지정학적ㆍ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또 다른 전력 분산과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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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nberg, G. L., 2005, A World at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Ⅱ, Part Ⅰ: The World Turned Upside Down, Second Edition,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홍희범 역, 2016, 2차세계대전사: 1권 뒤집어진 세상, 이미지프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