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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Aug 21. 2020

종심, 레벤스라움, 해양력 개념으로 독-소 전쟁 살피기

지리학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독-소 전쟁의 전개와 경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인 행위는 뭐니 뭐니 해도 전쟁일 것이다. 그리고 유사 이래 가장 규모가 컸고 참혹했던 전쟁을 꼽으라면, 아마도 2차대전 중에서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독-소 전쟁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민간인과 군인을 합하여 도합 2천만 명 이상-3천만 명에 육박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나치 독일 역시 수백만 명-1천만 명에 육박하는 인명 손실을 기록하였다.

  독-소 전쟁의 비극은 전쟁의 규모가 컸던 데만 기인하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는 수많은 소련군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 청소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소련군들의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도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져갔고, 독-소 전쟁 말기에는 독일군 포로 및 독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소련군의 전쟁범죄도 자행되었다.

  독-소 전쟁에서 소련 측의 피해가 특히 컸던 이유는, 나치 독일의 인종 청소에 기인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월등히 많은 피해를 입었던 까닭도 크다. 특히 개전 초반 전쟁 준비가 덜 되었던 데다 정치적 이유로 인적 자원의 질적 저하까지 심각했던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집단군 병력이 소멸되는 참패를 연이어 입었다. 1942-3년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공세로 전환한 이후에도, 소련군의 인명 피해는 나치 독일군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승리한 전투에서조차 소련군의 사상자가 나치 독일군 사상자보다 더 많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자. 나치 독일군은 특히 전쟁 초반에 수백만의 소련군을 문자 그대로 증발시키다시피 할 정도의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왜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을까? 물론 소련의 영토와 인구가 나치 독일을 압도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설명도 나올 수 있으며, 그런 설명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련의 인구와 생산 능력이 나치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지만도 않았다. 개전 직전이었던 1940년 나치 독일의 인구는 약 9천만 명이었고, 소련 인구는 약 1억 9천만 명이었다. 소련의 인구가 확연히 많기는 했지만, 그 차이는 2배를 조금 넘는 정도였다. GDP 역시 두 나라는 세계 2, 3위를 다투는 수준으로, 경제 규모의 차이 역시 대등한 수준이었다. 소련이 가진 잠재적 국력이 나치 독일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개전 초의 극단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연패와 손실을 딛고 나치 독일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된 요인은 다양한 각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지리적인 요인도 매우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달리 소련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여 패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종심(從深, depth), 레벤스라움, 해양력이라는 지리적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영토가 크면, 그 나라의 국력과 군사력도 그에 상응해 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영토가 광대하다면, 그만큼 인구, 자원, 국방 등의 측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도 쉽다. 역사상 존재했거나 실존하는 강대국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영토가 아주 작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훈이 크게 반영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도, '영토가 광대한 나라는 정복할 수 없다'라는 구절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영토의 크기만으로 국력이나 군사력을 가늠하는 것은 사실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영토의 크기나 형태 등과 같은 '질적' 요인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툰드라 등 경제나 생산 활동은커녕 인간의 생활조차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광대한 영토가 국력이나 군사력 발전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너무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도, 국방이나 안보, 군사 전략상 어려움이 따르기 쉽다. 당장 제정 러시아의 경우에도 유럽 러시아와 극동 러시아 사이의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과 유럽 전선의 존재가,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군사 작전에서 전장의 범위는, 단순한 면적이나 거리와 같은 요인보다도 종심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접근되는 경우가 많다. 종심이란 쉽게 말해서 군대의 이동과 기동이 이루어지는 전장이나 전역의 깊이를 말한다. 종심을 뜻하는 영단어가 depth임을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종심은 전역의 폭보다도 군사전략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쉽다. 왜냐 하면 전역의 폭이 넓은 경우에는 우회 기동을 할 수 있지만, 종심이 깊다면 우회 기동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은 1805년 울름 전투에서 무려 800km에 달하는 적 전선을 우회하여 러시아군과 미처 합류하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바 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역시, 마지노 선과 벨기에-네덜란드 방면의 연합군 방어망에 대한 우회 기동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반면 종심은 진격로 방향이기 때문에 우회하기 어렵다. 전선의 폭이 넓어도 종심이 얕다면, 우회 기동을 통해서 적군의 지휘부나 수도 등을 점령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반면 종심이 깊다면, 공격자 측에서는 행군 거리뿐만 아니라 보급로까지 길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반해 방어하는 측에서는 적을 종심 깊숙이 유인하여 불리한 조건에서의 전투를 강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퇴각 및 병력을 재편하기도 용이하다. 더욱이 전쟁의 지속에 필수적인 군수 및 산업시설, 통신시설, 비행장, 항만 등을 종심 깊숙한 장소에 배치한다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이 같은 시설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종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공격자에게는 불리해지고, 방어자에게는 유리해진다. 종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공격자는 병력과 물자를 소모할 우려가 커지는 데다, 종심 깊숙한 전장은 공격자가 지형을 파악하기 어려운 만큼 불리한 전장에서의 전투를 강요당할 우려 또한 커진다. 즉, 종심이 깊을수록 공격자가 종심을 돌파하지 못하고 작전한계점을 맞이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차대전 말기에 프랑스군의 앙리 꾸로(Henri Joseph Eugène Gouraud, 1867-1946) 장군은 대규모 화력지원 하에 돌격(후티어 전술)해 오는 독일 제국군을 종심 깊이 유인하여 전력 소모를 강요(꾸로 종심방어전술)한 끝에 이들을 격파한 바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을 개시했을 때(바르바로사 작전), 소련군은 연패를 거듭했다. 전쟁 준비가 완비되지 못했던 데다, 병력, 특히 장교단의 질적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 하면, 1930년대에 스탈린이 1인 독재 체제 확립을 위해 실시한 대숙청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교들의 대부분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대숙청으로 인해 희생된 소련군 장교들은 전체 장교단의 3분의 2가 넘을 정도였고, 이들의 자리는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정치군인들이나 공산당 간부들, 또는 고위 지휘관이나 참모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한 후임자들에 의해 채워졌다.

  소련군의 체제 또한 전투 수행에 극히 비효율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군사 지휘권이 공산당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귀순한 제정 러시아군 출신 장교들-그중 상당수가 귀족 출신이었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소련은, 신뢰하기 어려웠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치위원(commisar) 제도를 마련했다. 공산당 간부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군 지휘관을 감시하고 장병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문제는 정치위원이 군 지휘관을 숙청할 수 정도의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정치위원들이 군 지휘관의 지휘에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위원의 권력이 사실상 군 지휘관의 권력보다 강하다 보니, 지휘관들이 전시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정치위원의 군사적 전문성을 결여한 의견에 끌려다니다 결국 패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휘관을 잘 보좌하여 용전 분투했던 정치위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군사적 역량이 부족한 '실세'가 지휘관 위에 서 있는 이러한 제도는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대전 후기에 소련군은 이러한 정치위원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소련군은 이런 형편이었던 만큼, 전쟁 준비를 완전히 끝낸 데다 실전 경험까지 풍부했던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연전연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바르바로사 공세 당시 병력 규모가 60만에 달했던 키예프 방면군의 지휘를 맡았던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죤늬(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1883-1973) 원수는 나치 독일군 50만 명의 포위를 당해, 키예프는 물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을 손실한 채 간신히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부죤늬는 러시아 혁명전쟁에서 전설적인 용명을 떨쳤던 천재적인 기병 지휘관이자 혁명 영웅이었지만,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데다 휘하 병력의 질적 수준까지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다시피 한 패배를 겪었던 것이다. 다른 전선에서도 이처럼 수십만에 달하는 소련군 병력이 말 그대로 '증발'하다시피 한 피해를 겪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목표였던 모스크바 함락에 결국 실패했고,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병력과 장비를 보충해 가며 결국 나치 독일을 패배시켰다.

  그 까닭은, 종심이 매우 깊다는 소련 영토의 특징과도 관계가 있다. 프랑스 전선의 경우, 아르덴 숲과 프랑스 파리까지의 거리는 불과 200-300km에 불과했다. 나치 독일군은 파리 함락이 아닌 벨기에, 네덜란드 방면의 연합군 전선을 우회했던 만큼, 실제 프랑스 전선에서의 종심은 더욱 짧았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독일의 전격전은 프랑스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효과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었다. 반면 나치 독일의 동쪽 국경선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1,000km가 넘었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만 수백만에 달하는 소련군을 소멸시키며 소련 영내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이러한 피해가 소련군의 전쟁 지속 능력 및 의지의 무력화로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 및 산업 시설을 우랄 지방 등 후방으로 이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독일군은 작전술과 병력 및 장비의 질적 우위를 통해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지만, 소련을 무력화하기는커녕 소련 영내로 진격할수록 보급 문제에 시달리며 전력이 약화되어 갔다.

독-소 전쟁에서 나치 독일은 광대한 소련 영토를 점령했지만, 소련의 깊은 종심으로 인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하는데 실패했다.(위키피디아)
국토의 종심이 깊었던 소련은 독-소 전쟁 기간에 국토의 후방에 군수 공장을 배치했다.(https://www.quora.com/)

  소련의 자연환경은 종심 깊은 전장이 갖는 방어의 유리함, 공격의 불리함을 더욱 증가시켰다. 소련의 기후 특성상 겨울에는 혹한이 도래하는 데다, 해빙기가 되면 겨울에 얼어붙었던 토양이 녹으면서 깊은 진창을 형성한다. 겨울의 혹한은 장병들의 사기와 전투능력을 저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급 문제에도 차질을 빚었고, 해빙기의 진창은 병력과 보급부대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해빙기 소련의 진창(라스푸티챠)는 나치 독일군의 진격과 보급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위키피디아)

  이 같은 소련의 깊은 종심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나치 독일의 보급과 전력 유지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41년 겨울에 모스크바 20-30km 지점까지 진격했던 나치 독일군이 결국 작전한계점을 맞아 퇴각해야 했던 까닭도, 1943년 초반에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나치 독일 제6군 병력이 항복하고 말았던 까닭도 바로 이러한 소련의 깊은 종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나치 독일의 동유럽 침공, 그리고 소련 침공은 전술했듯이 나치즘의 왜곡된 레벤스라움 개념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레벤스라움 개념은,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에서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왜냐 하면, 라첼 등이 제안했던 레벤스라움과 달리 나치즘적 레벤스라움은 슬라브인, 유대인 등의 박멸을 전제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소련 영토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더 나치 독일군의 인종 청소와 전쟁 범죄, 그리고 점령지에서 적극적으로 일어났던 파르티잔들의 활동을 야기하였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이 일어났을 때, 적지 않은 소련인들은 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간주하며 환영하기까지 하였다. 스탈린의 극도로 억압적인 독재와 공포 정치에 질린 소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민족적 문제로 박해를 받은 데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농업정책 실패로 수백만의 아사자까지 발생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이처럼 나치 독일군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1941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들(출처: 위키피디아)

  문제는 나치 독일군이 점령지와 점령지 민중을 대하는 태도였다. 인종주의에 찌든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지 주민들은 해방해야 할 민중이 아니라 박멸해야 할 '열등한 인종'이었다. 나치당의 당군(黨軍)이었던 무장친위대(Waffen Schutz Staffel)는 특히 이러한 성향이 매우 강했다. 무장친위대는 인종청소 전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특수작전부대'라는 뜻으로, 정식 명칭은 '보안경찰 및 보안국 특수작전부대(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였음)까지 조직하여  소련 영내의 점령지에서 대규모 인종 청소를 조직적으로 자행하였다. 정규군인 국방군(Wehrmacht) 역시 지휘관의 성향이나 부대의 분위기 등에 따른 차이는 있었지만, 인종 청소와 전쟁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국방군 육군 제6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er Karl Ernst August von Reichenau, 1884-1942)는 나치 독일의 점령지 내에서 독일군 장병들이 유대인과 볼셰비즘을 절멸하는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1941년에 라이헤나우 명령(Reichenau Order)을 발표하여, 국방군의 인종 청소 임무를 공식화하기까지 하였다. 이 명령은 라이헤나우의 상관이었던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침공했던 나치 독일의 각 부대에도 영향을 미쳐 다수의 지휘관과 장병들로 하여금 별다른 죄책감 없이 소련군 포로와 소련 내 유대인, 그리고 소련 민간인들을 학살하도록 만들었다. 일례로 헤르만 호트(Herman Hoth, 1885-71)는 기갑 전술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휘하 장병들로부터 '파파(아빠)'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의 덕장이기도 했지만, 라이헤나우 명령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탓에 유대인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절멸을 지시하는 전쟁 범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그는 전후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중도에 석방되었다. 물론 몇몇 부대의 지휘관들은 라이헤나우 명령 등 인종청소 명령을 무시하고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에 가담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유대인과 민간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의 노력만으로 소련에서 일어난 나치 독일의 조직적인 인종 청소와 민간인 학살을 제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나치 독일 국방군의 인종 청소, 전쟁범죄를 명령한 폰 라이헤나우 원수(위키피디아)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한 소련 민간인 학살 장면(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나치 독일군은 소련 영내에서 피점령지의 민중을 박해하는 점령군이나 압제자의 수준을 넘어, 유대계 주민을 비롯한 소련인들을 절멸 대상으로 간주하고 체계적, 조직적으로 이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들은 소련군 포로들을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기는커녕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우했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질병, 기아, 구타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들에 대한 대우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장친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당수의 국방군 병력들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유대계 소련인, 공산당 간부, 군경 가족 등은 우선적으로 나치 독일군에게 끌려가 학살당했고, 이 외의 민간인들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음은 물론 '열등한 인종'이라는 허울 하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까지 하였다.

  피점령지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수준을 넘어선 극단적이고 비 인륜적인 인종 청소와 전쟁범죄는, 당연히 소련인들의 극단적인 적개심과 저항 의지만 고취시킬 뿐이었다. 이로 인해 소련군의 나치 독일군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져갔고, 소련군은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소련인들은 자국 국민들을 말살하려는 나치 독일군을 쳐부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대거 군대에 입대했고, 이들은 남성 군인들 못지않게 용전 분투하여 나치 독일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례로 류드밀라 미하일로브나 파블리첸코(Людмила Михайловна Павличенко, 1916-1974)는 당시로서는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로 군에 입대한 다음, 저격수로 활동하며 나치 독일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모스크바 전투를 다룬 글에서 후술 하겠지만, 나치 독일군이 모스크바 전방 20km 지점까지 진격한 시점에서 스탈린이 붉은 광장에 나와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통해 소련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킬 수 있었던 까닭도 이 같은 나치 독일군의 극단적인 인종 청소와 전쟁범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치 독일군 300여 명을 저격한 소련군의 여성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위키피디아)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민간인들은 인종 청소와 전쟁범죄를 자행하는 나치 독일군에 맞서 파르티잔을 조직하였다.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보다, 이들에게 저항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르티잔들은 비록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학살자인 나치 독일군에 대한 적개심 및 이들에게 맞서 조국과 가족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대단히 높았다. 뿐만 아니라 지형에 익숙했고 소련 주민들의 직간접적인 지원도 받았다. 이들의 지속적인 게릴라전은 나치 독일군의 전선 유지와 보급 등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다. 나치 독일은 파르티잔을 체포하는 즉시 심한 고문을 가한 뒤에 공개 처형하는 등 이들의 활동을 근절하기 위해 잔학한 수단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는 파르티잔의 활동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2차대전 후기에 소련군이 공세로 전환하면서, 파르티잔들은 소련 정규군과 함께 나치 독일군을 격파하고 점령지를 해방하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군이 점령한 마을을 공격하는 소련 파르티잔의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나치 독일의 왜곡된 레벤스라움 개념은, 소련에 침입한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에 의해 점령지에서의 대규모의 인종 청소, 전쟁범죄가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열등 민족'의 완전한 말살이 아닌, 소련 민중과 군대의 극단적인 적개심만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고 잔혹했던 나치 독일의 점령지 정책은, 결국 점령지 주민들과 소련군의 적개심만 고취하여 나치 독일이 전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전쟁에서 패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치즘의 왜곡되고 반인륜적인 레벤스라움과 이에 바탕한 라이헤나우 명령 등은, 독일 민족이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기는커녕 나치 독일의 패망, 그리고 이에 따른 독일 영토의 축소라는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해양력 역시 나치 독일이 독-소 전쟁에서 패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나치 독일은 사실 1930년대부터 수십 척의 전함과 항공모함 건조를 목표로 하는 해군 증강 계획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함선들은 1940년대 중반쯤에야 완공될 예정이었다. 군함, 특히 중순양함, 전함, 항공모함 등의 대형 군함은 완공되는데 수년 이상, 길게는 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독일 제국이 구축했던 세계 2위 수준의 대규모 함대가 1차대전 종전 직후 연합군에 넘어가기를 거부하며 스코틀랜드 북단의 스캐퍼 플로우 군항 근해에서 자침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은 영국, 미국 등과 달리 개장을 통해서 그런대로 활용할 수 있는 구형 군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함선의 건조와 함대 운용 등에 대한 노하우 역시 대거 실전되었다. 육군, 공군과 달리, 해군은 1920-30년대에 이루어진 독일의 재군비 과정에서도 제대로 재건되지 못했다. 독일의 협력자였던 소련 역시 해군력이 약했던 데다, 소련 영내에서 함선을 건조하거나 해상 훈련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나치 독일 해군은 육군, 공군과 달리 히틀러 집권 이후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에서 전력을 재건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문제는 해군 재건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점이었다. 전쟁 발발 시점에서 나치 독일 해군이 보유한 전함은 연합군 전함에 비해 화력이 열등한 샤른호르스트 급 전함 두 척뿐이었고, 항공모함은 전무했다. 이런 전력으로는 연합군 해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조차 없었다. 연합군 전함과 비교했을 때 대등 이상의 성능을 가진 비스마르크 급 전함 2척이 1941년을 전후해 취역할 예정이었지만, 이 정도의 전력으로 수십 척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보유했던 영국, 미국 해군에 대등하게 맞서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치 독일 해군은 잠수함과 포켓 전함(소형 전함 수준의 주포와 경순양함 수준의 장갑을 장비하여, 함대전이 아닌 빠른 기동력과 강력한 화력을 활용한 상선대 습격에 목적을 두고 개발한 나치 독일의 군함)을 활용하여 연합군의 보급선을 파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 척에 불과했던 포켓 전함들은 결국 영국 순양함대의 추격을 받아 각개 격파당했고, 잠수함 전술 역시 연합군이 대잠 전술을 개발하는 한편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나치 독일 해군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면서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노르웨이 전역에서 나치 독일 해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1941년 취역한 전함 비스마르크 호는 영국 해군의 주력 전함 후드 호를 일격에 격침하는 등 영국 해군에게 중대한 위협으로 떠올랐지만, 이 역시 취역한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영국군의 대대적인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해군 항공대의 공습에 격침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향후의 건함 계획을 모조리 취소하고, 해군에 대한 지원도 크게 줄여 버렸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해군에 대해서 히틀러가 분노하고 실망한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과 미군이 건재한 상태에서 히틀러의 이 같은 결정은 현실에 대한 고려가 크게 부족한 판단이었다. 나치 독일의 해양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의 군수물자 수송 선단은 바렌츠 해를 우회하여 무르만스크로 향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라는 해상력의 요충지를 장악한 나치 독일이었지만, 해양력이 열악하니 연합군의 해양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 해군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바렌츠 해 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해군 전력의 미비로 인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은 바렌츠 해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물자와 장비를 공급했다.(Naval-History.Net)

   연합군, 특히 미국의 막대한 물자 지원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막심한 손실을 겪고 있던 소련군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식량과 물자로, 나치 독일의 공세와 포위 속에서도 고사(枯死)하지 않고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무르만스크를 통해 소련에 제공된 미국제, 영국제 무기와 장비 역시 소련군의 전력 강화와 현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 나치 독일 육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1942-43년간 이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에 쓴 일기장에 '우리가 수십 개의 소련군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만큼의 사단을 즉각 보충한다'라는 절망에 찬 문구를 적었다. 이는 소련이 단순히 인구가 많아서라기보다는, 나치 독일의 빈약한 해양력으로 인해 연합군의 물자와 장비가 고스란히 소련에 전달될 수 있었던데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군에게 공여되었던 미국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 소련군은 해양 보급로를 통해 전달된 미국제 무기와 장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위키피디아)

  나치 독일군의 전투력은 2차대전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데 손색이 없었다. 작전술, 무기와 장비의 수준은 물론, 장병들의 기강과 전투능력 역시 다른 나라의 군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반대로 소련군은 스탈린의 대숙청, 비효율적인 정치위원 제도, 미비한 전쟁 준비 등으로 인해 나치 독일군보다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 실제로 독-소 전쟁 초기 소련군은 졸전을 거듭하며 연전연패를 이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자는 나치 독일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이번 장에서는 독-소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원인을, 종심, 레벤스라움, 해양력이라는 지리학 개념을 통해서 살펴 보았다. 소련은 종심 깊은 국토의 특성을 통해 나치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의 왜곡된 레벤스라움 개념은 나치 독일군이 점령지를 유지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은 빈약한 해양력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장악하고도 바렌츠 해를 거쳐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연합군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실패했다. 이처럼 독-소 전쟁을 이해하는 데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지리적 여건 및 이와 관련된 요인도 무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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