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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Aug 19. 2020

일본-소련 중립 조약의 지리학

소련과 일본이 2차대전 때 중립 조약을 맺은 까닭을 지리학적으로 살펴보기

  2011년 개봉한 '마이웨이'라는 한국 영화가 있다. 일본군으로 징집된 조선인 청년이 만주에서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나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까지 나치 독일군 소속으로 참전하기까지 한다는 기구한 삶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흥행 성적이나 평은 그다지 좋은 듯하지는 않지만, 1930년대에 일어난 일본군과 소련군의 전투는 박진감 있게 잘 그려낸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에 일본과 소련은 동아시아의 패권과 이권을 두고 대립 관계를 이어 왔다. 제정 러시아와 일본은 이미 1904-5년에 러일 전쟁을 벌인 바 있으며, 러시아 혁명의 발발로 소련이 수립되자 일본은 다른 서방 국가들과 더불어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1918-24년간 소련에 군대를 파병하여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시베리아 출병). 뿐만 아니라,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일본 관동군은 1930년대에 소련군과 여러 차례 국지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례로 1939년 5월 관동군은 만주국과 몽골 인민공화국 간의 불분명한 접경 지대였던 할하 강 일대에 몽골군 병력이 진입한 것을 빌미로 몽골에 대규모 공세를 취했으며, 이에 몽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이 몽골군을 원조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할힌 골 전투(일본에서는 '노몽한 사건'이라 부름)라 이름 붙여진 이 전투에서 훗날 소련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소 전쟁의 승리에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인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1896-1974) 중장은, 소련-몽골 연합군의 작전 지휘를 맡아 전차부대의 돌격을 중심으로 하는 돌파 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동년 9월에는 소련의 주장대로 할하 강을 몽골-만주국 간의 국경으로 획정하는 조건으로 종전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소련과 일본은 만주, 몽골 일대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1939년 개봉된 소련 영화 '트랙터 운전수(Трактористы)' 삽입곡이자 오늘날까지 소련/러시아의 전차부대 군가로도 쓰이고 있는 노래 ' 전차병(Три танкиста)',  같은 소련-일본 간의 대립을 보여주듯 소련에 침공한 사무라이들을 소련 전차병들이 격퇴한다는 가사를 담고 있다.

잔디 위에 이슬이 맺히고, 대지에는 안개가 자욱이 깔렸다. 오늘 밤 사무라이들은 강 건너 국경을 넘는다는 결단을 내렸다... 전차들은 거세게 돌진하여, 적 전차의 장갑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강철과 화염 아래, 사무라이들은 쓰러졌다.
할힌 골 전투 당시 작전회의를 하는 주코프(우)와 몽골 인민공화국 대통령 허를러깅 처이발상(좌)(출처: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이래 노골적인 적대관계를 이어오며 교전까지 벌였던 소련과 일본은, 1941년 4월 31일에 중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소련 중립 조약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두 나라는 1939년에도 국경선을 놓고 교전을 하던 관계였다. 관동군은 소련을 몰아내고 만주, 몽골 일대에서의 세력 확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소련에서는 소련군이 사무라이의 침공을 격퇴한다는 가사를 가진 노래가 불릴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보나 현실에서 보나 명백한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두 나라가 어느 순간 중립 조약을 맺은 까닭은, 두 나라의 지정학적, 군사지리학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가진 나라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럽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이다. 소련 역시 이 점에서는 제정 러시아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국방 전략 역시 유럽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이 극동 지방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블라디보스톡, 하바롭스크 등을 개발하고 극동군과 극동 함대를 양성해 왔지만, 이는 유럽 방면의 병력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주력이라기보다는 보조 전력에 가까웠다. 실제로 러일 전쟁에서 제정 러시아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던 까닭에는, 바로 이 같은 지리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전 병력이 일본과의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일본군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 방면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를 견제하였고, 제정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들을 무시하고 대규모 병력을 극동 전역으로 이동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가 유럽 방면 병력의 일부를 극동 지방으로 이동시키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극히 힘들었다. 이 같은 지리적 요인 때문에 제정 러시아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럽 방면군에 비해 떨어지는 극동군 병력으로만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고, 이는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병력과 장비, 물자의 수송 여건 자체는 러일 전쟁 때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소련의 중심부 역시 유럽 러시아 일대에 있었고, 중서부 유럽 국가들의 위협과 견제 또한 여전했다.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는 했지만, 외교 조약이 그렇듯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영국 또한 그때까지는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핀란드, 발트 3국 등도 국력 자체는 소련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만일 유럽 방면의 병력에 공백이 생긴다면 이들의 움직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올 터였다.

소련의 유럽 영토와 극동 영토 사이에는 광대한 시베리아가 펼쳐져 있었다.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러한 지리적 요인은 소련에게 심각한 부담을 강요할 터였다.(위키피디아)

  일본 역시 소련과의 전쟁에 집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기본적인 전략은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하여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일본은 1938년 중일 전쟁을 벌여 중국 국민당 정부를 쓰촨 지방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중국 동부의 평야 지대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주요 도시와 간선 도로망 정도만을 온전히 지배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의 게릴라 전술, 그리고 중국 민중의 저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일본의 궁극적인 목표인 중국 대륙조차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보다 더 강한 상대였던 소련과 전면전을 벌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940년 당시 일본은 중국 동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점령지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로 인한 병력과 자원의 소모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출처: 위키피디아)

  게다가 1940년대 초반에는 아시아에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영국 역시 고립된 상태에서 아시아의 식민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줄 여력이 없었다. 즉,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여 아시아를 장악하고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지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이 재현되어 있다.(한겨레 21 기사(2019.9.21.), 김득중 작성)

  이처럼 1940년대 초반 일본은 중국 점령지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리적으로 반대 방향일 뿐만 아니라 거리상으로도 멀리 떨어진 소련에 전력과 국력을 집중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 구축 전략을 저해하는, 비현실적인 낭비만 초래할 상황이었다.


  프랑스, 네덜란드의 함락과 영국의 고립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려던 일본에게, 소련의 위협을 제거하는 일은 사실상 필수적이었다. 할힌 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의 전투력이 일본군의 예상 이상으로 강했다는 사실-할힌 골 전투를 비롯한 소련과의 국경 분쟁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패배를 거듭했다-은,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과의 협상을 더욱 절실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1940년 5월부터 소련에게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다.

  소련 역시 유럽에서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과의 협상에 긍정적으로 나섰다. 다만 상호 원조까지 포함하는 불가침 조약을 원했던 일본과 달리, 나치 독일,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 대한 과도한 자극을 꺼렸던 소련은 상호 원조 등을 전제하지 않는 중립 조약을 원했다. 소련으로서는 가장 신경 쓰이던 상대였던 나치 독일이 일본의 동맹국이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입장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1941년 4월 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는 모스크바에서 소련과의 중립 조약에 서명했다. 일본-소련 중립 조약의 체결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중립 조약은 5년 기한이었고, 이의가 없다면 자동으로 5년의 기한이 연장된다는 조건이었다. 얄궂게도 마쓰오카는 독일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가진 뒤 귀국하던 길이었고, 히틀러는 마쓰오카에게 소련 침공 계획을 알려 주며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해 둔 터였다.

일본-소련 중립 조약에 서명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그 뒤로 스탈린(인민복 차림)의 모습이 보인다.(출처: foreignaffairs.com)

  일본-소련 중립 조약은 2차 대전 중 양국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두 나라가 자국의 배후에 위치한 상대 나라의 위협에 신경 쓰지 않고, 자국의 주 전장에 전력과 국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일본은 소련의 위협이 제거되자, 병력을 동남아시아 방면에 집중하여 1942년 초반의 짧은 기간 동안 해당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다. 본국이 함락되거나 고립되어 전력이 크게 약화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주둔군은, 일본군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와해되거나 항복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 초-중반에 미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고전했던 이유도,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던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을 지켰던데 기인하는 바가 적지만은 않다.

1942년 3월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일본군에게 격침당하는 영국군 순양함 엑서터 호. 2차 대전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동남아 식민지 주둔 병력은 크게 약체화되었다.(위키피디아)

  나치 독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던 소련 역시, 일본과의 중립 조약을 체결한 덕택에 나치 독일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극동 지역으로 병력과 전력을 분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군이 극동 방면으로부터 소련을 침공해 왔더라면, 소련은 자칫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 방면에 전력과 국력을 집중했던 일본은, 소련과의 중립 조약을 위반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 초반에만 수백만 명의 병력을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던 소련이었지만, 일본의 위협에서 자유로웠던 덕택에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강력한 나치 독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일본-소련 중립 조약은 2차대전 말기였던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의 결과로 파기되었다. 나치 독일의 항복과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진 다음이었던 1945년 8월, 소련군은 만주 방면에 대공세를 펼쳐 명맥만 유지하던 관동군을 와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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