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덴마크, 노르웨이 침공을 지리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병합하고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통해 소련의 위협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한 나치 독일의 총구는, 당연하게도 서유럽을 향했다. 1939년 가을-1940년 봄에 걸쳐 나치 독일과 영국, 프랑스 사이에는 별다른 교전이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해둔 만큼 이들은 엄연히 적국이었다. 따라서 나치 독일과 영국-프랑스 연합군 사이의 전쟁은 시기가 문제일 뿐,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본격적인 개전에 앞서 나치 독일은, 북유럽 해상 교통의 요지였던 노르웨이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장악함으로써 자국의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물자 보급과 군사적 행동을 견제할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의도였다. 나치 독일은 베저위붕 작전(Unternehmen Weserübung)을 개시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장에서는 베저위붕 작전에 따른 나치 독일의 덴마크, 노르웨이 침공을 지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그중에서도 노르웨이 하면 독자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높은 수준의 1인당 GDP와 복지정책을 떠올릴 수도 있고, '노르딕'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설상 종목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 해라는 지명,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유전을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2차대전 당시 노르웨이는 지정학, 군사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노르웨이는 서유럽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중에서도, 북해, 노르웨이 해, 바렌츠 해와 해안선을 인접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즉, 노르웨이는 당대 최대의 해군 국가였던 영국을 견제하기에 적합한 전략적 위치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노르웨이의 북동쪽 국경은 소련(러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소련 북방함대의 본부가 위치한 항만도시 무르만스크와의 거리가 100㎞가 채 안 될 정도로 인접해 있다. 이 사실은, 노르웨이는 영국의 해군력 견제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북해에서 노르웨이 해, 바렌츠 해로 이어지는 서유럽(영국)과 소련(러시아) 간의 연계를 유지 또는 견제하도록 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략적, 군사지리학적, 지정학적 의미를 가짐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이미 독일 제국 시절부터 독일 군부는 노르웨이의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노르웨이는 1차대전 중 중립을 유지하며 전화(戰禍)를 비켜갔지만, 1916년 5월 31일-6월 1일에 영국과 독일 제국 해군의 주력 함대가 벌였던 유틀란트 해전은 북해에서 바렌츠 해를 잇는 노르웨이에 연한 해역의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노르웨이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나치 독일군 수뇌부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다가올 영국, 프랑스와의 결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국을 견제할 수 있는 해군 기지가 필요했다. 1차대전 이후 비록 전성기가 지났다고는 했지만, 영국 해군은 미국 해군과 더불어 세계 1, 2위를 다투는 대규모의 정예 해군이었다. 반면 독일 해군의 현실은 매우 열악했다. 독일 제국 시절 빌헬름 2세는 대규모의 건함 사업을 벌여 영국 해군과도 비견될 정도의 대규모 함대를 구축했으나, 1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연합군에게 노획되던 독일 제국 함대의 함선들은 영국 북부의 군항 스캐퍼플로우로 향하던 도중 집단 자침해 버렸다. 나치 독일은 1933년 집권 후 재군비를 통해 육군과 공군을 단기간에 괄목할 정도로 재건했지만, 해군은 그러지 못했다. 해군함의 건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독일 제국 함대의 집단 자침 이후 독일에서는 군함 건조와 함대 운용의 노하우가 실전(失傳)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 내내 4척의 전함밖에 보유하지 못했고 항공모함 건조는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린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치 독일 해군의 잠수함 유보트의 전설적인 활약상은, 수상 함대의 전력이 워낙 약해서 결국 연합군의 통상 파괴 작전을 잠수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를 정복하고 트론헤임,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의 주요 군항들을 접수하여 영국 해군을 견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 장교로 참전했던 볼프강 베게너(Wolfgang Wegener, 1875-1956, 1926년 해군 중장 전역)의 저서 『세계대전의 해군 전략(Die Seestrategie des Weltkrieges)』(1929년 초판 출간)은, 이 같은 나치 독일군 수뇌부의 노르웨이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중립국이었던 노르웨이를 점령하여 전략적 요충지에 해군 기지를 확보했다면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베르겐을 잇는 영국 해군의 봉쇄선을 독일 제국 해군이 무력화할 수 있었으리라는 논지를 담은 이 책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 군부와 정부의 수뇌부가 노르웨이 침공을 결의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노르웨이는 전략물자 확보라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 입장에서 반드시 장악해야 할 지역이었다. 2차대전 당시 스웨덴은 명목상 중립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며 철광석과 석탄 등의 지하자원을 공급해 주었다. 스웨덴의 자원은 발트 해를 통해서 나치 독일로 공급되기는 했지만, 이 같은 자원 수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나치 독일이 스웨덴과 서유럽 사이에 위치한 노르웨이를 반드시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치 독일 해군의 사정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상술한 바와 같이, 나치 독일의 해군력 재건 속도는 육군 및 공군력 재건 속도에 비해 크게 뒤쳐졌다. 1939년 당시 나치 독일 해군의 수상함 전력을 살펴보면, 항공모함은 전무했으며, 10-20척 이상의 전함을 보유했던 영국, 미국, 프랑스 등과 달리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급 전함 2척 만을 보유했을 뿐이었고 이 두 척은 적국의 전함에 비해 화력이 부족했다. 순양함, 구축함의 수도 현저히 부족했다. 나치 독일의 해군 재건 계획은 1944년에야 완비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1939년 개전 당시 나치 독일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Erich Johann Albert Raeder, 1876-1960) 원수는 나치 독일 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용감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뿐이라며 절규할 정도였다. 때문에 그는 히틀러에게 노르웨이를 점령하여 영국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유보트 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노르웨이 내부의 사정 또한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조장하였다. 노르웨이의 극우정당인 국가통일당(Nasjonal Samling)의 당수였던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 1887-1945)은 히틀러, 레더, 그리고 나치 독일의 고위 간부이자 인종주의 이론가였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Alfred Ernst Rosenberg, 1893-1946) 등과의 면담을 통해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종용했다.
1940년 2월에 일어난 알트마르크 호 사건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 수뇌부가 노르웨이 침공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나치 독일의 포켓전함 그라프 슈페(Graf Spee) 호에 물자와 탄약을 보급하는 임무를 맡았던 위장 보급함 알트마르크(Altmark) 호는 영국 해군 포로 299명을 태운 채 귀국하던 중, 중립국 노르웨이 영해 내부에서 영국 해군 구축함 코삭(Cossack) 호에게 나포당했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 수뇌부 사이에는 노르웨이를 중립국으로 인정할 경우 자칫 1차대전 때와 같이 영국의 대 독일 해상 봉쇄에 이용되리라는 우려가 강하게 퍼져갔다. 알트마르크 호 사건은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에 기름을 부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지정학적, 군사지리학적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히틀러와 나치 독일 수뇌부는 노르웨이 침공을 결정했다. 나치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는 1940년 1월부터 덴마크와 베저위붕 작전을 계획했다. OKW는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덴마크 또한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덴마크는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를 점령할 경우 나치 독일군은 덴마크 영토를 우회할 필요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점령을 위한 진격로 및 보급로의 거리 또한 단축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년 4월에는 나치 독일이 선구적으로 시도한 육‧해‧공군 합동 작전이자, 나치 독일 육군의 대승과 해군의 치명적 손실이라는 결과를 야기한 베저위붕 작전이 개시되었다.
노르웨이의 전략적 가치는 나치 독일만 주목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1939년 2차대전 개전과 더불어 노르웨이의 전략적 입지에 주목하였다. 더욱이 1차대전과 달라진 국제정세는, 영국과 프랑스, 특히 해군 국가였던 영국으로 하여금 노르웨이에 대한 신중한 군사적 대안 모색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우선 겨울전쟁은 소련이 핀란드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에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뻗칠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화시켰다. 알트마르크 호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에게도 중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알트마르크 호가 중립국 노르웨이를 경유하여 본국으로 귀환하려 했다는 사실은, 중립국 노르웨이가 자칫 나치 독일의 해상 작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에 이어 나치 독일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장악한다면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북해에서 바렌츠 해에 이르는 해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 특히 스웨덴의 지하자원이 온전히 나치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이어질 우려도 컸다.
결국 영국은 윈스턴 처칠 수상의 주도로, 노르웨이와 스웨덴 침공 계획인 윌프레드 작전(Operation Wilfred)과 R4 계획(Plan R4)을 입안하였다. 영국의 스칸디나비아 침공 계획은 나치 독일과는 달리 나르비크 등 주요 항만과 군사적 요충지, 광산 지대만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나치 독일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장악 및 점령을 사전에 차단하고, 나치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 및 자원 지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2차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노르웨이는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운명에 직면하고 말았다. 북해에서 노르웨이 해, 바렌츠 해를 잇는 해역과의 인접성, 그리고 전쟁 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철광석, 석탄 자원의 운송로 상에 위치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노르웨이 침공을 먼저 실행에 옮긴 주체는 바로 나치 독일이었다.
OKW는 공군과 해군의 지원 하에 육군 병력을 노르웨이 해안의 요충지에 상륙시켜 노르웨이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와 동시에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의 길목에 위치한 덴마크 역시 침공하여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덴마크 침공 병력의 지휘관으로는 육군 대장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kolaus von Falkenhorst, 1885-1968)가 임명되었으며, 해군 대장 권터 뤼첸스(Johann Günther Lütjens, 1891-1941)의 지휘 하에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을 비롯한 독일 해군의 사실상 전 병력에 가까운 함대가 폰 팔켄호르스트의 병력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OKW는 나르비크, 트론헤임(Trondheim), 베르겐, 크리스찬산(Kristiansand), 에게르순(Egersund), 오슬로의 6개 공격 목표를 설정하였다. 해군 함정에 탑승한 육군 상륙부대 병력이 공군기와 해군 함정의 지원을 받으며 이 6개 공격 목표를 공략하고 상륙하는 한편으로, 덴마크를 통하여 육군 병력이 노르웨이 남부의 오슬로, 크리스찬산 등지에 상륙하여 노르웨이 영토를 북상하여 최종적으로 노르웨이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독일 해군에 상륙함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육군 병력은 전투함에 승선하여 노르웨이로 향해야 했다.
1940년 4월 7일, 뤼첸스 제독은 노르웨이 침공 병력을 태운 함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나치 독일 함대는 영국군의 정보망에 포착되었지만, 영국군은 나치 독일 함대가 북해를 돌파하여 영국의 해상 수송로를 타격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오판해 버렸다. 처칠은 심지어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경고한 덴마크 주재 영국 해군 무관의 보고조차 무시해 버렸다. 영국군 수뇌부는 노르웨이에 주목하는 대신, 독일 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함대 편성을 준비했다. 더욱이 노르웨이는 국력과 군사력 측면에서 나치 독일에 비해 크게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동년 4월 초에 나치 독일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때까지도 병력 동원 준비가 크게 미비한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나치 독일은 4월 8일 덴마크 정부에 선전 포고를 하고, 이튿날 덴마크 침공을 개시했다.
총병력이 2만 명에 미치지 못했던 덴마크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나치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침공 당일에 결국 항복했다. 영국군이 북해의 독일 함대를 추적하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상륙부대 역시 노르웨이의 6개 목표지점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노르웨이군은 오슬로에서 해안포 포격을 통해 나치 독일 해군의 중순양함 블뤼허(Blücher) 호를 격침시키며 나치 독일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황은 대체로 나치 독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영국군, 프랑스군, 폴란드 망명 정부군이 노르웨이군을 지원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상륙했지만, 이들은 전력면에서도 충분치 못했거니와 지휘 체계가 극히 혼란하여 나치 독일군에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군 역시 지휘 체계 면에서 많은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이들은 노르웨이군을 각지에서 격파하며 노르웨이 내륙에서 건제를 유지한 채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노르웨이에 공군 기지를 확보한 나치 독일 공군은 노르웨이군 및 영국-프랑스-폴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공군기의 지원도 충분한 대공 화기도 갖추지 못했던 연합군 병력은 나치 독일 공군의 공습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노르웨이는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노르웨이 왕실과 정부 요인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망명 정부를 세워야 했다. 연합군은 1940년 5월에 노르웨이 북부의 나르비크를 일시 탈환하기도 했으나, 보급 문제와 나치 독일 공군의 위협, 그리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결국 나르비크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나치 독일 육군과 공군이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승기를 잡고 두 나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던 반면, 노르웨이 전역에서 나치 독일 해군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노르웨이군의 해안포에게 중순양함 블뤼허 호가 격침당했을 뿐만 아니라, 나르비크에 독일 육군을 상륙시킨 구축함 10척도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모두 격침당했다. 이로 인한 손실은 나치 독일 구축함 전력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뿐만 아니라, 나르비크 전역에 투입되었던 샤른호르스트 호, 그나이제나우 호 모두 영국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중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격침되지는 않았지만, 장기간의 수리를 요하는 손상이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 해군은 당시 보유했던 전함 2척이 모두 가용 불능 상태에 빠져 버린 셈이었다.
물론 영국 해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단적으로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호는 샤른호르스트 호와 그나이제나우 호의 포격에 의해 격침되고 말았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입은 피해는 전체 전력의 일부였던데 반해, 나치 독일 해군은 사실상 전력이 마비되는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은 사실상 수상 함대 전력을 배제한 채 프랑스 침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 침공에서 1개월여 만에 프랑스를 항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됭케르크(Dunkirk)에서 프랑스 주둔 연합군의 탈출을 결국 허용한 일, 히틀러가 공군력만으로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비현실적인 작전(영국 본토 항공전)을 수립 및 감행한 일, 훗날 이어진 비스마르크 호의 격침 등도, 이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라는 천혜의 해군 기지-이곳은 본래 나치 독일이 대양 해군의 전초 기지로 삼을 예정이었다-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점령이 영국 해군에 대한 의미 있는 타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노르웨이는 나치 독일의 해군 기지로, 영국 해군에 대한 견제 및 통상 파괴를 위한 잠수함대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노르웨이 해와 바렌츠 해를 통과하여 소련에게 군장비와 물자를 수송하는 연합군의 수송 선단을 놓고 노르웨이 근해에서 나치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또 다른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은 자신들의 인종주의상 ‘위대한 게르만 민족(아리아 인종)’과 관계 깊은 북유럽인들에 대한 동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노르웨이, 덴마크를 게르만 민족, 아리아 인종의 발전을 위한 레벤스라움으로 간주했고, 노르웨이인, 덴마크인들을 인종적으로 독일 민족에 동화시켜 종국적으로는 북유럽을 독일 영토로 포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Schutz Stapfel)와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00-1945)는 나치즘 인종주의상 독일 민족과 ‘혈통상으로 가까운’ 북유럽인들에게 많은 흥미를 보였고, 심지어는 덴마크, 노르웨이인들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사단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나치 독일은 순수 게르만 민족의 확대를 위한 우생학적 기관인 레벤스보른(Lebensborn: ‘생명의 샘’이라는 뜻)을 노르웨이 전역에 설치하였다. ‘인종적으로 우수’하거나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가진’ 여성들을 입소시켜 나치 친위대 장병과 성관계를 맺게 하여 ‘순수 아리아 혈통’을 가진 아기들을 낳아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확대하겠다는 왜곡된 우생학에 토대한 지극히 비인간적인 이 기관이 설치되면서, 수천 명의 노르웨이 여성들이 나치 독일 친위대원들의 아기를 낳았다. 전후 이 여성들은 전쟁 부역자로 처벌받았고, 그들과 그 자손들은 노르웨이 사회에서 많은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노르웨이 정부는 2018년 이들에게 가해진 낙인과 차별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와중에도 저항을 이어갔다. 노르웨이 왕실은 영국에 망명하여 저항을 이어갔고,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X, 1870-1947, 재위 1912-1947)는 말을 타고 코펜하겐 거리를 산보하며 나치 점령군에게 억눌린 덴마크 국민들에게 덴마크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불어넣는가 하면 덴마크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의 손에서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노르웨이인들과 덴마크인들은 해외로 탈출한 뒤 연합군의 일원으로, 또는 국내 레지스탕스 단원으로 활동하며 조국을 점령한 나치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 2017년 개봉한 노르웨이 영화 Den 12. Mann(2019년 국내에서 ‘12번째 솔저’라는 제목으로 개봉)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노르웨이에 침투한 노르웨이인 특수부대원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침략에 저항하던 노르웨이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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