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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27. 2020

지리학과 지정학으로 겨울전쟁(소련-핀란드 전쟁) 읽기

겨울 전쟁(소련-핀란드 전쟁) 발발 요인, 맥락, 과정의 지리학과 지정학

  러시아 하면 추운 겨울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전쟁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러시아의 '동장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마저도 패퇴하게 만들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세계사 교과서에도 대개 그렇게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러시아에 토대를 둔 소련의 군대가 동장군에게 무력하게 당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거나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1939년 11월 핀란드를 침공한 소련군은, 국력 면에서나 군사력 면에서나 압도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핀란드군에게 고전을 거듭한 끝에 수십만의 인명 피해를 비롯한 막대한 손실을 강요당했다. 1939-40년에 일어난 핀란드와 소련 사이의 전쟁을, 소련-핀란드 전쟁 또는 겨울 전쟁이라고 부른다.

  본고에서는 겨울 전쟁의 요인과 맥락, 전개 과정을 지정학과 지리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북유럽에 자리 잡은 핀란드는 사실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으로 함께 묶이는 스웨덴, 노르웨이와는 사실 민족 정체성이나 언어적 계통에서 이 두 나라와 이질적인 성격이 강하다. 왜냐 하면 핀란드의 민족적‧역사적 정체성은 본래 우랄계, 즉 아시아계 민족집단인 핀인(Finns)에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핀인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 13세기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핀란드는 1809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의 속국으로 편입시켰으며, 제정 러시아의 붕괴 이후인 1917년 12월 6일에 비로소 독립을 선언하였다. 핀란드는 독립 과정에서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려는 독일 제국의 도움을 받았다. 아울러 핀란드에서는 독립 직후인 1918년 1-5월에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핀란드 적위대(Punakaarti)와 반공 보수파가 조직하였고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았던 시민 위병(Suojeluskunta) 간의 내전(핀란드 내전)이 일어났으며, 내전은 시민위병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핀란드는 공산주의의 확산과 소련의 위협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친서방 외교정책을 이어갔다. 그런 한편으로 핀란드는 1932년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등, 독일과 소련의 대립 구도에서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외교정책을 펼쳐 갔다. 이 같은 핀란드의 외교는 핀란드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듯이 핀란드는 마찬가지로 1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독립한 발트 3국과 더불어, 발트 해를 따라 독일, 소련과 인접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더욱이 오늘날과 달리 1930년대에는 발트 3국과 인접한 동프로이센이 독일 영토였다. 이는 핀란드의 지정학적 위치가 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세력 균형을 위한 완충지로서의 의미를 가짐을 시사하며, 실제로도 1930년대 핀란드 외교는 이 같은 독일-소련 간의 세력 균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1938년의 유럽 지도. 핀란드와 발트 3국은 소련으로부터 발트 해를 가로막는 장벽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출처: Pinterest)

  하지만 핀란드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조약에 따라 소련과 독일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고, 소련은 같은 해 가을에 발트 3국에 소련이 원하는 장소에 소련군을 주둔시키고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는 상호 원조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사실상 발트 3국을 소련의 속국처럼 만들어버린 셈으로, 이듬해 소련은 발트 3국을 결국 병합하였다. 핀란드로서는 외교의 기본축이 어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이 자국 영토의 코앞에서 안보를 위협하는 위기 상황에 내몰린 셈이었다.


  소련과 핀란드 간의 영토 갈등은, 소련-핀란드 국경지대에 위치한 지역인 카렐리야(Карелия, 핀란드어로는 카르얄라(Karjala)라 표기함)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카렐리야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접경지대인만큼 지정학적·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지만, 역사적·역사지리적으로는 물론 민족집단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우선 카렐리야 일대에는 카르얄라(Karjalaižet) 인이라는, 핀-우그리아(Finno-Ugria) 어파에 속하며 핀란드어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카르얄라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이 7세기경부터 거주해온 지역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건설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지역은 1323년 스웨덴 왕국과 러시아의 전신인 노브고로드 공국 간에 체결된 뇌테보리 화약에 의해 스웨덴령인 서카렐리야와 노브고로드 공국령인 동카렐리야로 분단되었다. 이때부터 카렐리야는 정치적‧지정학적인 이해관계와 다양한 민족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힌 분쟁의 지역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721년 스웨덴과의 사이에서 체결된 뉘스타드 조약에서 서카렐리야를 획득했고, 1809년 핀란드가 러시아의 속국인 핀란드 대공국이 되면서 서카렐리야는 핀란드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핀란드 대공국은 러시아의 속국인만큼 독자적인 외교권 및 군대를 갖지는 못했지만 내정과 관련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은 용인받았으며, 제정 러시아의 직할령과도 구분되는 관습적인 경계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동-서 카렐리야의 경계선은 이처럼 핀란드 대공국과 제정 러시아의 본토를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도 하였다. 이 같은 역사적, 역사지리적 과정과 맥락으로 인해, 카렐리야는 정치적‧민족적‧지정학적으로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속성을 가진 지역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17년 독립한 핀란드는 1920년 소련, 에스토니아와 함께 타르투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과의 국경선을 획정하기는 했지만, 소련은 핀란드와 발트 3국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게 아니었으며 1930년대 말의 국제정세, 특히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앞에 타르투 조약은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운명에 직면하고 말았다.

  핀란드와 소련의 남동쪽 국경지대에 위치한 지역인 카렐리야는 갈등과 논쟁의 핵심이라 할 만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본래 핀란드와 러시아는 속국-종주국 관계로 상호 교류가 활발했으며, 이로 인해 동카렐리야를 비롯한 소련-핀란드 접경지대의 소련 영토 내에는 핀란드어를 사용하며 핀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진 주민들도 적잖게 분포하고 있었다. 더불어 핀란드 내전에서 우익인 시민위병 측이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핀란드 공화국 내부에는 여전히 소련과 볼셰비즘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카렐리야의 지정학적 위치는 지방이 소련과 핀란드 간의 분쟁을 야기할 소지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겨울전쟁 초기에는 카렐리야 중부-서부에 해당하는 핀란드-소련 접경지대 일대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 오토 쿠시넨(Otto Vil'gel'movich Kuusinen, 1881-1964)이 세운 소련의 괴뢰정부 핀란드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어 소련의 핀란드 침공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동카렐리아(녹색)와 서카렐리아(황색). 1940년 이전 서카렐리아는 핀란드 영토였다.(Pinterest)
2차대전 이전 핀란드 지도(녹색)와 핀란드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던 소련령 동카렐리아(연두색)(출처: Pinterest)

  더욱이 핀란드령 서카렐리야는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인접해 있었다. 문제는 단순히 거리상으로 인접했다는데만 있지 않았다. 본래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반에 건설하였고 모스크바를 대신하여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 지정되기도 한 바 있는 이 도시는, 유럽 세계로의 진출을 목표로 하는 부동항 획득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도시는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는, 카렐리야 지협 남단의 핀란드 만 깊숙한 위치에 입지하였다. 게다가 이 도시는 동쪽으로 광대한 라도가 호와도 인접했었다. 이 같은 입지 조건으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유사시 레닌그라드가 적군에게 포위된 채 함락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으며, 이러한 우려는 훗날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44)으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 

레닌그라드의 위치. 빗금친 영역이 2차대전 이전까지 핀란드 영토였음을 고려하면, 카렐리아와 레닌그라드의 지정학적 위치 특성을 잘 알 수 있다.(Iztov, 2016, p.3.)

  1938-39년에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이루어졌던 영토 관련 논의는 이 같은 핀란드와 소련의 지정학적 관계, 특히 카렐리야 일대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소련은 레닌그라드 북부의 카렐리야 지협, 그리고 무르만스크 북서쪽에서 바렌츠해 방향으로 돌출한 리바치 반도 서쪽 부분의 양도를 강력하게 원했다. 레닌그라드 및 바렌츠 해 일대의 방위 태세 강화가 목적이었다. 그 대가로 소련은 핀란드에게 동카렐리아 일대의 영토 양도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의 협상에 적극적‧긍정적으로 임했고, 핀란드와 소련 외교 담당자들과 지도자들은 영토 협상의 체결과 평화 유지가 가능하리라고 낙관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11월 9일 양국 간의 협상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사실 소련 측은 1939년 여름부터 핀란드 침공 계획을 입안 중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 즉 동맹이었다.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로 인해 소련은 서쪽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위협을 일단 회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발트 3국 및 핀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즉, 외교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지정학적 여건의 변화는, 이들 나라들과 협상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준 셈이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소련 국경 지대에서 핀란드군 병력이 소련군에게 발포했다는 날조된 사건을 빌미로 핀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소련 국방장관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1881-1969) 원수는 키릴 이파시나에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1968) 대장 휘하의 레닌그라드 군관구 병력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침공, 점령한다는 계획을 이미 같은 해 9월에 수립한 상태였다. 메레츠코프와 휘하 참모진은 핀란드 전선을 4개 전역으로 나누고 이에 따라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르면 소련 육군 제7군은 핀란드 만과 라도가 호 사이의 핀란드 남부와 소련 간의 접경 공격, 북상하여 비푸리(Viipuri, 오늘날의 러시아 비보르크(Быборг))를 점령한 다음 서쪽으로 진격하여 헬싱키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핀란드 남서부의 항구도시 항코(Hanko)까지 장악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핀란드의 인구와 산업, 도시가 집중한 남부 해안 지대를 장악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제8군에게는 라도가 호 북동부 방면의 소련-핀란드 접경지대를 침공한 뒤, 서쪽으로 진격하며 제7군을 엄호하는 임무가 할당되었다. 제9군은 핀란드 동부 접경지대의 수오무살미(Suomussalmi)와 서부 해안의 항만도시 오울루(Oulu)를 잇는 축선을 장악하여 핀란드 국토를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무르만스크에 근거지를 두었던 제14군은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Petsamo, 오늘날의 러시아 무르만스크 주 페쳉가(Печенга))를 돌파하여 중부의 로바니에미(Robvaniemi)까지 진출하여 핀란드 북부를 장악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작전계획은 주공이 핀란드 남부를 장악하는 동시에 조공이 핀란드 국토를 양단하고 북부까지 장악한다는 합리적인 계획으로 비쳐질 만하기도 하다. 소련군의 작전 계획이 의도대로 이루어진다면, 핀란드의 붕괴는 시간문제일 터였다.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계획(홍색)과 핀란드군의 반격(청색)(출처: https://slubne-suknie.info/?n=russian+invasion+of+finland+ww2)

  더욱이 핀란드와 소련 간의 국력차, 군사력 차는 현격했다. 당대 GDP 규모가 나치 독일과 더불어 세계 2-3위를 다툴 정도의 경제 대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 강국이기도 했던 소련과 비교했을 때, 핀란드의 경제 규모와 군사력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4개 야전군을 동원한 소련군의 병력 규모는 45-55만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2,500대 이상의 전차, 2,000여문의 화포, 1,500여기의 항공기 등의 강력한 장비와 화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1939년 당시 핀란드 인구가 37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소련군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반면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소집한 핀란드군의 병력 규모는 30만명 정도였다. 장비는 더욱 열악했다. 개전 당시 핀란드군의 전차는 1개 전차대대 규모에 불과한 30여대에 지나지 않았고, 항공기 역시 114기에 불과했다. 개전 초 주 전장이었던 카렐리야 지협의 병력 배치를 보면, 소련군 제7군과 제13군은 전차 1,400여대와 야포 900여문으로 무장한 12만명 규모의 예하 병력(12개 보병사단 및 7개 기갑여단 규모)을 카렐리야 지협으로 진격시켰다. 이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던 후고 외스터만(Hugo Viktor Österman, 1892-1975) 중장 휘하의 핀란드 지협군의 규모는, 야포 71문과 대전차포 29문을 갖춘 병력 29,000만명이 전부였다. 누가 보더라도 소련의 압승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소련 공군의 헬싱키 폭격에 이어 소련군이 작전 계획에 따라 핀란드 영토내로 진격하면, 핀란드 공화국은 순식간에 붕괴하고 쿠시넨의 친소 공산정부가 들어서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겨울전쟁 당시 불려졌던 소련 군가 ‘아름다운 수오미여, 우리를 맞이하라(Пгинимай нас, Суоми-красвица)’의 아래와 같은 가사는, 소련군의 조기 승전에 대한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잘 나타나 있다.

굽이쳐 우거진 솔숲 산비탈 위의 솔숲 너머로 국경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네. 아름다운 수오미여, 대지 위에 목걸이를 수놓은 영롱한 호수들로 우리를 맞이하라! 전차부대는 광대한 수풀을 개척하고, 전투기는 창공을 뒤덮네. 병사들의 총검은 저무는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네.

  하지만 소련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1939년 11월-1940년 1월에 걸쳐 핀란드군의 저항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주공이었던 소련군 제7군은 카렐리야 지협 방면으로 구축된,  핀란드 독립의 영웅이자 1939년 당시 핀란드군 총사령관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1867-1951)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방어선인 만네르헤임 라인(Mannerheim Line)에 가로막혀 1940년 2월이 다 가도록 수만명의 사상자만 기록한 채 전선 돌파는커녕 제대로된 진격조차 하지 못했다. 만네르하임 원수는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핀란드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소련과의 접경지대에 정교하게 위장된데다 요소요소마다 긴밀하게 연계된 콘크리트 벙커 체계인 만네르하임 라인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한 동원령을 통해 병력을 최대한 신속히 확보하였다. 병력 뿐만 아니라 특히 장비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처해 있던 핀란드군은, 혹한의 기후와 삼림, 구릉이 펼쳐진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모티(Motti) 전술이라 알려진 핀란드군의 전술은, 횡대로 진형을 이루며 진격하는 소련군을 핀란드 영내로 유인한 다음 기습 공격을 가하여 제대 간의 연계와 통신을 두절시켜 각개격파한다는 전법이었다. 군사적 우세를 과신한 나머지 핀란드군의 전술과 방어 계획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커녕 월동 준비조차 충분히 하지 않았던 소련군은, 모티 전술을 구사하는 핀란드군의 역습에 휘말려 전투다운 전투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모티 전술의 사례: 수오미살미 전투에서 소련군 제44사단은 핀란드군 소부대들에게 분리, 각개격파당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출처: Graphic Finding Table)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주공을 맡았던 제7군은 만네르하임 라인에서 핀란드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1939년 카렐리야 지협으로 진격한 제7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채 만네르하임 라인에서 돈좌되었다가, 소련군의 증원이 이루어진 1940년 2월 하순에야 간신히 진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종전 시점에는 비푸리 인근에 간신히 도달하는 등, 졸전을 치루었다. 상대적으로 핀란드군의 저항이 약했던 다른 전선의 소련군 역시 제7군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졸전을 이어 나갔다. 소련군 제8군은 3개월 가까이 고작 수 ㎞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겨울전쟁이 끝날 때까지 라도가 호수 북쪽 해안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제9군 역시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현격한 열세에 처해 있던 핀란드군을 상대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1939년 12월 7일-1940년 1월 8일간 이어진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2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9군 예하 약 5만명의 소련군은, 햘마르 실라스부오(Hjalmar Siilasvuo, 1892-1947) 대령이 지휘하는 2-3개 연대 규모의 핀란드군 1만여명에게 각개격파당하여 2만명 전후의 사망자를 내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더욱 심각했던 사실은, 소련군 사상자들 중 상당수가 미비한 월동 준비와 부실한 혹한기 대책에 따른 동사자 및 동상 환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설상 위장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소련군 장병들은 핀란드군 저격수의 희생양으로 전락했으며, 동상으로 인한 사상자의 수만 10만명이 넘을 정도였다. 핀란드군의 선전과 소련군의 졸전은 서방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소련군은 규모만 큰 오합지졸 군대마냥 해외 언론으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국제적인 망신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겨울전쟁 기간동안 소련군은 총병력 90여만명 가운데 사망 13만여명, 부상 약 40만명, 포로 5천여명이라는 막심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하루 평균 5천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셈이었다. 반면 핀란드군의 인명 피해는 약 22,000-23,000여명, 부상자 43,000여명, 포로 800여명 수준이었다.

만네르하임 라인의 위치(출처: 위키피디아)
만네르하임 라인의 참호에서 임무수행을 하는 핀란드군 장병들(출처: 위키피디아)
겨울전쟁 당시 동사한 소련군 시체를 수습하는 핀란드군 장병의 모습. 소련군은 동상으로 인해 10만명 이상의 인명을 손실했다.(출처: The National WWII Museum)

  스탈린은 결국 대 핀란드 전략의 수정을 결심했다. 우선 1939년 12월 말에는, 메레츠코프가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센코(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1895-1970) 원수로 교체되는 등 핀란드 전선의 지휘부 인사에 대폭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핀란드 전역을 점령한다는 기존의 작전 계획을, 병력을 카렐리야 지협에 집중하여 만네르하임 라인을 무력화하고 비푸리를 공략한다는 계획으로 수정하였다. 이와 더불어, 핀란드 전선에 50만명 이상의 병력과 대규모의 중장비가 증원되었다. 핀란드군의 방어전쟁에 유리한 고지로 작용했던 겨울철의 혹한 역시, 봄이 다가오면서 점차 누그러지고 있었다. 1940년 3월 무렵에는 핀란드군의 물자와 탄약, 그리고 전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1940년 2-3월에는 티모센코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공세가 본격화되었고,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라인을 넘어 핀란드 영토 내부로의 진격을 개시하는 한편 비푸리 공략을 개시했다. 뿐만 아니라, 언론과 민간 창구를 통해서 찬사와 응원을 보냈던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 국가들은,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핀란드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에게 50만 병력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타진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실제 계획은 노르웨이 북부의 요충지이자 항만도시인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을 장악하는데 있었고 핀란드에 실질적으로 지원될 병력은 5-6천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제안은 자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기를 꺼렸던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인접국 가운데 노르웨이는 핀란드에게 의미있는 도움이 될 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나마 어느 정도의 국력과 군사력을 갖추었던 인접국 스웨덴조차도 소련과의 전쟁이라는 부담을 짊어지기를 거부한 채 스웨덴에게 소련과의 강화를 종용하였다.

  결국 핀란드는 나치 독일, 스웨덴 등의 중재를 통해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과 강화 협약을 맺었다. 겨울전쟁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적지않은 영토의 상실을 강요당했다. 우선 카렐리야 지협과 공업도시 비푸리를 비롯한 핀란드령 카렐리야의 대부분을 소련에게 할양해야 했고, 이외에도 핀란드 동부의 살라(Salla) 지방과 리바치 반도 일대 등의 영토를 상실했다. 항만도시 항코 역시 소련에게 30년간 임대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따른 핀란드의 영토 상실은, 1938-39년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시도되었던 영토 협상에서 나왔던 안보다 훨씬 핀란드에게 많은 손실을 가져왔다.

  이처럼 핀란드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기적이라고 묘사될 만큼의 선전을 하며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불평등 조약이라고 해야 할 수준의 평화 조약 결과 기존 국토의 약 10%에 가까운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 핀란드 국경선의 토대가 되었고, 카렐리야 지협 등 이 때 상실한 핀란드 국토는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소련 및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다. 적잖은 영토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침략을 사실상 방기하다시피 했던 서방 국가들에 대한 실망까지 겹쳤던 핀란드는, 자국의 영토 수복과 안전 보장을 위하여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그들과 동맹을 맺고 소련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보로실로프와 메레츠코프가 입안한 소련군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핀란드 침공 계획이 의도대로 이루어졌다면, 핀란드는 국토가 분단된 채 조기에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핀란드는 붕괴되지도 쿠시넨의 친소정권에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했던 소련군을 상대로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며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렸다. 그 이유를, 지리적인 요인과 관련지어 살펴 보도록 하자.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계획은 겉보기에는 핀란드를 사방에서 포위 섬멸한다는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핀란드의 전쟁 준비 태세는 물론, 지리적 환경조차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일종의 탁상공론 수준으로 이루어졌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선 핀란드는 이미 1920년대부터 만네르하임 라인 구축을 시작하는 등, 외세, 특히 소련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고 있었다. 비록 경제 문제 등으로 인해 첨단 무기의 도입 등 군의 현대화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핀란드군은 요새 구축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징집과 군사 훈련 등을 통한 군 인력의 정예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겨울전쟁기에 소련군 259명을 저격한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Simo Häyhä, 1905-2002) 등과 같은 전쟁영웅들의 활약은, 핀란드인들의 조국 수호를 위한 감투 정신과 더불어 이 같은 핀란드군의 치밀한 전쟁준비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던 산물이었다.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 기관총 진지의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게다가 핀란드는 호소가 다수 존재하는데다, 중부와 북부에는 산악지형도 발달해 있다. 더욱이 침공 시기가 겨울이었다는 점도 소련군에게는 패착이었다. 호소는 소련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자연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만네르하임 라인은 라도가 호수와 연해 있어 핀란드군은 좁은 방어선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반면,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라인의 우회를 시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핀란드는 발트 해 등의 영향으로 인해 위도(북위 60-70°)에 비하면 여름 날씨는 비교적 온난한 편이나, 고위도지대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등 대륙과의 인접성으로 인해 대륙성 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즉, 겨울에는 혹한이 몰아닥치는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헬싱키 등 대도시들이 인접한 남부 해안 지대는 냉대연중습윤기후(Dfb) 기후대에 속하지만, 대부분의 내륙지대 기후는 아극(亞極)기후(Dfc)에 속하며 북부 일부 지역은 툰드라 기후대에 속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후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혹한이 몰아치고 적설량도 많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처럼 혹한이 몰아치고 많은 눈이 내리는 핀란드의 겨울철에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했다.

핀란드의 지역별 기후(출처: 위키피디아)
핀란드의 지형. 호소가 발달한데다 중, 북부 러시아 접경지대에는 산지도 형성되어 있다.(https://maps-finland.com/finland-topographic-map)

  그런데 만네르하임 라인 구축 등 충실한 준비를 했던 핀란드군과 달리, 소련군은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핀란드군에 대한 과소평가와 이에 따른 자만심이었고, 그 근원은 1930년대의 대숙청에 따른 소련군의 질적 저하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스탈린은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1930년대 중-후반에 대숙청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소련군 장교단의 70%에 달하는 인원이 숙청당했고 그 빈 자리는 군사적 지식과 경륜이 부족한 공산당원이나 ‘당성이 강한’ 인원들이 채웠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핀란드 침공을 위한 효과적인 작전을 수립하고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겨울전쟁을 기획한 소련 국방장관 보로실로프부터가, 러시아 혁명의 원로이며 당시 소련 사회에서 스탈린의 오른팔처럼 숭배받던 인물이기는 했지만 군사적 재능은 부족한 전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핀란드에 침공한 소련군들은 심지어 설상 위장복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들은 핀란드의 설원과 삼림에 위장한 핀란드군 저격수와 유격대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의 전차와 화포 역시, 부족한 월동준비로 인해 무용지물로 전락해 노획당하거나 버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동상으로 인한 사상자만 10만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소련군이 핀란드 침공을 위한 준비, 그리고 적지 핀란드의 지리적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부실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좌)과 보로실로프(우)를 우상화한 소련 포스터(www.sovmusic.ru)

  겨울전쟁은 흔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소련군의 침략에 맞선 핀란드인들의 용기와 국토애, 감투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국방일보의 논조(2016년 11월 28일자 기사; 2020년 7월 1일자 기사)는 이 같은 관점을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압도적인 소련군의 침략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시 지휘로 겨울전쟁의 핀란드군 신화를 주도한 인물인 만네르하임 원수에 대한 찬사 또한 겨울전쟁에 관한 우리나라나 서방의 관점-적어도 대중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만네르하임 원수(출처: 위키피디아)

  핀란드군의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감투 정신, 그리고 만네르하임 원수가 국가 위기시에 보여주었던 리더십은 결코 평가절하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겨울전쟁에 대한 이해가 한층 심도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외에도 다양한 요인에 초점을 맞춘 다각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필요성 또한 있다.

  본고에서는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이 보여준 문자 그대로 눈부신 기적과도 같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왜 핀란드가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따라 상당 부분의 영토 상실을 강요당했는가의 문제를 지리학, 지정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물론 핀란드군의 분투와 선전 덕택에 핀란드가 폴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지와 달리 나라를 잃는 대신 영토 일부만 상실하는데 그쳤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겨울전쟁 당시의 국제정세와 지정학적 상황을 살펴보면, 이는 단순히 그렇게만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의 위치와 유럽의 정세 및 지정학적 상황을 살펴 보면, 핀란드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읽어낼 수 있다.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에서도 러시아와 인접한, 발트해 동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이 같은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핀란드는, 노르웨이해, 북해와 해안선이 인접한 노르웨이 및 북해와의 접점을 가진 스웨덴에 비해 서유럽 국가들과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되고 발트 3국마저 소련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상황은, 핀란드의 지정학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철광석과 석탄 자원이 풍부한 스웨덴과 달리, 핀란드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동유럽 일대가 나치 독일의 수중에 넘어간데다 나치 독일과 선전포고를 해 둔 상태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지원에 더욱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의 동쪽에서 독일군을 견제해야 할 연합국들-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은 이미 나치독일에 병합되어 사라졌고,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인해 나치독일은 소련의 견제에서까지도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핀란드보다도 전력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 동맹으로서의 가치 역시 더욱 컸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조차 나치 독일에게 병합되도록 사실상 방치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의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핀란드 구원에 적극적으로 나설 동기는 부족했으리라고 판단된다. 더욱이 나치 독일은 독일-소련 강화 조약에 따라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사실상 소련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의 국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스웨덴-사실상 2차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게 협조하는 태세를 취했다-또한 소련과의 전면전을 불러올 수 있는 모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이처럼 지정학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고립된 상태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에 내몰렸다. 그리고 핀란드군은 소련의 침공에 맞서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선전하며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한 덕분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등과는 달리 소련에 병합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지정학적,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핀란드는 서카렐리야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한 적지않은 국토를 상실해야만 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2차대전으로 인해 핀란드가 상실한 영토(붉은색)(출처: 위키피디아)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핀란드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소련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과거 소련군의 침략을 격퇴했던 카렐리야 지협을 넘어, 나치 독일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2차대전 종전 후 핀란드는 자국의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는 점을 인정받은데다 핀란드군의 전쟁범죄 역시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패전국으로서의 제재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전쟁으로 인해 상실한 영토의 회복 또한 이루어지지 못했고, 냉전기 핀란드는 공산화되지 않았고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가 부흥 및 경제 발전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울러 서카렐리야의 소련 편입으로 인해, 이곳에 살던 핀란드계 주민들의 핀란드 영내로의 이주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수십년간 핀란드인들과 소련인(러시아인)들은 카렐리야에 대해서 복합적인 인식과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Ansi Passi(1955- )를 비롯한 지리학자, 지정학자들은 이 사건을 주제로, 국경선과 영토의 제도적 변화가 주민, 국민들의 영토 인식 및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지리학 이론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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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2020년 7월 1일자, “굴복 대신 저항 약소국의 생존 전략 강소국 기틀 다지다,”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702/1/BBSMSTR_00000010010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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