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가져온 폴란드의 지리적, 지정학적 변화
폴란드는 나치독일과 소련의 침공에 의해 전 국토가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입었고, 전쟁기간동안 나치독일과 소련의 가혹한 지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의 영토와 인구, 민족집단의 구성은 전쟁 전에 비해 눈에 띌 정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같은 결과는 물론 폴란드인들의 의사가 아닌, 전후 처리와 관련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압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 글에서는 2차대전으로 인해 폴란드의 인구지리, 민족집단의 지리, 지정학적 위치 등에 어떤 변화가 초래되었는가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폴란드는 본래 동유럽의 강자였으며, 17세기까지 폴란드의 국력은 러시아를 상회하였다. 폴란드는 1569년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同君聯合)을 결성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를 결성했으며, 전성기에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다민족 국가였다. 하지만 내부 분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진 끝에, 1795년에는 프로이센, 러시아,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국토가 3등분되어 흡수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망하고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면서, 폴란드는 1918년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연합군과 항복한 독일 제국 사이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폴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차대전 종전후 연합군은 신생 폴란드의 서쪽 국경선을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서쪽 국경선을 형성하는 지형이었던 오데르 강(Oder River)을 기준으로, 동쪽 국경선은 폴란드 분할 당시의 국경선을 토대로 만들어진 커즌 라인(Curzon Line, 영국의 외무장관 조지 커즌(George Nathaniel Curzon, 1859-1925)이 제안한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을 기준으로 폴란드의 영토를 제안하였다.
그런데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던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영토의 획득을 추구하였다. 이로 인해 벌어진 소련과의 영토 분쟁(소련-폴란드 전쟁, 1919-1921)에서 폴란드는 커즌 라인 동쪽의 영토-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로, 이 두 나라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속령이기도 했다-를 추가 확보했고, 독일로부터도 폴란드 회랑을 비롯한 영토를 추가 확보하였다. 이는 폴란드의 외교적, 군사적 승리처럼 비쳐질수도 있겠지만, 이후 폴란드의 지정학에 많은 논란과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우선 독일과 소련은 이로 인해 폴란드에 대한 적개심, 폴란드에게 빼앗긴 영토의 수복이라는 지정학적 목표의식을 고취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새로 얻은 영토의 민족적 문제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특히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의 동화정책에 거부하였고, 이는 2차대전중 일어난 민족 분쟁, 인종 청소로 이어지게 된다. 정교회를 신봉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는 종교적으로 이질성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에는 이로 인해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로부터 러시아로 소속을 바꾼 전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은 영토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인구, 민족집단 구성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폴란드를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으로 여겼던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극단적인 강압통치를 통해 지배하였다. 무엇보다 슬라브계 폴란드인들은, 나치독일 입장에서는 레벤스라움으로부터 '지워버려야' 할 '열등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치독일은 폴란드인들에게 최소한의 식량 배급만을 허용한데다 교육 기회마저 박탈하는 등, 폴란드인들을 극단적으로 억압했다. 나아가 나치독일은 폴란드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에 수용하여, 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일삼았다. 나치독일이 폴란드인들에게 가한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적 범죄 행위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한 그것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덜 하지는 않을 정도였다. 나치즘 하면 흔히 유대인 학살을 연상하겠지만, 나치독일의 인종청소 대상은 유대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레벤스라움에서 제거해야 할 '열등한' 슬라브 민족 역시, 나치독일 수뇌부에게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제거 대상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가 폴란드에 주로 입지했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강제수용소에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계 민간인,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도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초창기에 나치독일에 점령된 폴란드 국민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목숨을 잃어야 했다. 1960년대에 빌리-브란트 독일 총리가 2차대전 폴란드 위령비에 무릎꿇고 사죄했던 배경은, 이처럼 폴란드 영토 내에서 나치독일이 저질렀던 극단적으로 가혹했던 지배정책, 전쟁범죄, 인종청소 범죄가 자리잡고 있다.
나치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우크라이나 민병대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이라는 또다른 비극, 범죄를 야기하였다. 폴란드 영내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계 폴란드인들은, 2차대전 발발 전부터 폴란드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다. 2차대전 초기 나치독일은 소련 침공을 감행하면서, 소련 점령하에 있던 폴란드 영토까지도 점령하였다. 그리고 나치독일은 극우 성향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선동하여, 이들로 하여금 폴란드인 학살에 나설 것을 선동하였다. 우크라이나 민병대원들은 나치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폴란드인 사냥'에 나섰고, 이는 폴란드인 학살로 이어졌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민족적, 정치적 앙금으로 남아 있다.
폴란드인 탄압은 나치독일, 그리고 그들의 조종을 받은 우크라이나 민병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소련군은, 폴란드의 재기를 막기 위해서 폴란드군 장교단, 대학 교수, 정치인, 경찰, 공무원, 가톨릭 성직자 등 엘리트 집단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1940년 일어난 카틴 숲 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에서 소련군은 2만명 이상의 폴란드 지도층을 학살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나치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나치독일군이 카틴 숲 학살 현장을 발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나치독일과 달리 소련은 2차대전의 승전국이었던데다 전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폴란드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보니,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이나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련은 체제 붕괴 직전이었던 1990년에서야,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에 의해 카틴 숲 학살을 인정하였다.
나치독일의 가혹한 지배에 견디다 못한 폴란드인들은, 1944년에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에서 나치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던 폴란드 국민군은, 1944월 8일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다. 소련군이 나치독일군을 동부전선에서 몰아내던 시기에 맞추어, 폴란드를 나치독일의 지배에서 해방하려던 목적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국내군의 기대와 달리,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저 일부 물자 투하만 시도했을 뿐이었다. 결국 폴란드 국내군은 같은 해 10월, 20만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기록한 채 나치독일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나치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던 시기였지만, 이들의 전투력은 폴란드 국내군을 진압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말 폴란드 분할 이후 150여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2차대전 중에도 폴란드 국내에서(국내군), 그리고 망명정부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과 부흥을 꾀했던 폴란드인들의 열망은, 소련군의 방조 하에 나치독일군의 군홧발에 결국 짖밟히고 말았다.
2차대전의 종전으로 폴란드는 해방을 맞이했지만, 진정한 해방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폴란드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야 했고, 2천만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으며 나치독일군과 싸워왔던 소련의 영향력에 대해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폴란드 망명정부와 자유 폴란드군의 분전과 노력도 무색하게, 2차대전 종전후 폴란드에는 공산 정부가 들어섰다. 아울러 폴란드의 영토도 크게 변화하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이 획득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해 연안의 영토는 소련에게 귀속되었고, 대신 슐레지엔을 비롯한 독일-폴란드 접경지대의 영토는 폴란드령으로 귀속되었다. 종전 후 독일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연합군, 그리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폴란드를 서방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일종의 완충지대, 전략적 거점으로 삼으려던 소련의 의도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의 민족 구성 또한 크게 변화하였다. 유대계,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러시아계 등 다양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었던 폴란드는, 2차대전을 기점으로 폴란드계 인구로 구성되는 '단일 민족' 국가로 변화하였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1990년 해산할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의 처지는,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묘사한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의 소재로까지 쓰일 정도였다.
미국의 지리학자 리처드 핫숀(Richard Heartshorne, 1899-1992)은 국경을 비롯한 국가 간의 경계를 선행적 경계(antecedent boundary), 종행적 경계(subsequent boundary), 전횡적 경계(superimpsed boundary), 잔존 경계(relic boundary)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에서 선행적 경계는 하천, 산맥 등 지형과 자연물에 의한 경계를 말하고, 종행적 경계는 민족집단이나 국가 등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말한다. 잔존 경계는 베를린 장벽 등, 지금은 소멸했지만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그리고 전횡적 경계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강제로 획정된 경계를 말한다. 38선이나 휴전선이 바로 전횡적 경계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2차대전 후 폴란드의 영토 변화는, 이 같은 전횡적 경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자유 프랑스 정부와 자유 프랑스군의 활약을 인정받고 2차대전 종전후 전쟁 이전의 영토와 영향력을 되찾은 프랑스와 달리, 폴란드는 2차대전 후 강대국-특히 소련-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영토도 민족구성도 대폭적인 변화를 강제당해야만 했다. 빌리-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의 2차대전 위령비에서 무릎꿇고 사죄했던 것과는 달리, 구소련의 폴란드에 대한 압제와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성있는 사죄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남북 분단과 동족 상잔의 비극을 강제당해야 했던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