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공영권, 오족 협화를 주제로 태평양 전쟁의 지정학적 맥락 살펴보기
1941년 12월 일어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은, 유럽 전역과 더불어 2차대전의 두 축이었던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 제국은 이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며 태평양 일대에서 침략 전쟁을 통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였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태평양 전쟁은 개전 후 3년 9개월 가까이 지난 1945년 8월 15일에 종식되었다.
이번 장은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을 비롯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이해 사용한 프로파간다인 오족 협화와 대동아공영권의 지정학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서 태평양 전쟁의 지리적ㆍ지정학적 원인과 맥락을 고찰하고자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에도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서구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9세기 후반의 국제 질서의 흐름이었던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결과로 대만과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칼끝은 이어서 중국으로 향했다. 러일전쟁을 통해 랴오둥(遼東) 반도를 '관동주(關東州)'라는 이름의 조계지-일본 제국의 관동군은 바로 이를 계기로 창설된 군대이다-로 얻는 데 성공한 일본 제국은, 청나라 멸망(1912) 이후 중국이 군벌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일본은 장쭤린(張作霖, 1873-1928) 등 만주 지역의 군벌 세력을 포섭하며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해 갔다. 이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북벌을 통해 군벌 세력을 토벌 또는 흡수해 가며 중국 통일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일본 제국에 대한 협력을 철회했다가 관동군에게 암살당한 장쭤린의 후계자 장쉐량(張學良, 1898-2001)마저도 일본 제국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자, 관동군은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슬로건은 '오족 협화(五族協和)'였다. 일본인, 조선인, 한족, 몽골인, 만주족의 5개 민족이 협력하며 화합한다는 이 슬로건은, 사실상 조선인과 한족, 몽골인, 만주족의 영역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를 일본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표방하는 이념은 다섯 민족의 '협화'였지만, 실제로는 조선, 만주 등의 영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확고하게 영역화한다는 의도를 가진 슬로건이었다. 이는 소수의 일본인이 다수의 만주국 내 중국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국이라는 국가ㆍ민족 정체성의 영역으로부터 단절시켜 궁극적으로는 만주를 일본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이념적 장치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만주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국가원수로 하였지만, 실권은 관동군과 일본인 관료들의 손에 있었다. 그들의 주도로 만주국의 종교가 국가 신토(國家神道)으로 통합되는 한편 황도(皇道) 사상이 확산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요컨대 오족 협화 개념은 겉으로는 아시아인의 연대를 통하여 서구에 대항하고 아시아를 발전시킨다는 아시아주의를 표명하는 이념이었지만, 실제로는 '선진적'인 서구 문명이 '후진적'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 지배하여 계몽하고 근대화시킨다는 서구 제국주의의 논리를 아시아의 일본 제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변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국은 이 같은 제국주의 이념인 오족 협화의 영역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은 만주국의 건국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본토의 지배까지 노렸다. 이는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 전쟁으로 표면화되었다. 국민당 정부군의 병력 규모는 일본군보다 우세했지만, 장비의 수준과 전술교리 측면에서는 열세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가 신뢰할 수 있고 전투력도 우수했던 중앙군은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이외에는 군기, 사기, 장비 수준 등이 크게 열악한 데다 신뢰하기도 어려운 군벌군 병력이었다. 비록 1930년 무렵에 국민당 정부가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고는 하나 내부적인 사정은 여전히 군벌 세력이 각 지방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형편이었고, 군사력의 정비와 혁신 또한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형편이었다. 중국 공산당 역시 프로파간다와 달리 일본군과의 교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전과 역시 전략적 의미는 크지 않았다. 공산당 휘하의 홍군(紅軍)은 제2차 국공협정에 따라 형식상 국민당 정부군 휘하의 부대들로 재편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일본군은 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던 중국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고, 1937년 12월 1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이자 전략 거점이었던 우한(武漢)까지 함락시키면서 일본은 중국 서부의 평야 지대를 석권하였고, 국민당 정부는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인 쓰촨 성(四川省)의 충칭(重慶)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충칭의 국민당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충칭에서는 다수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에 맞서 중국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제휴하여 대일 무역 봉쇄 및 자산 동결 조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 제재를 단행하였다. 일본이 ABCD(A: 미국(America), B: 영국(Britain), C: 중국(China), D: 네덜란드(Dutch)) 봉쇄라 이름 붙인 이 경제 제재에 참여한 나라들은 석유, 철 등과 같은 자원의 대일 수출을 제한 또는 금지시켰고, 이로 인해 일본 제국은 경제와 산업에 심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미국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ㆍ경제적 지원까지 실시하였다. 일본 군부는 개전 수개월 내에 중국 전역을 장악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ABCD 봉쇄라는 태평양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지정학적 전략으로 인해 일본은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ABCD 봉쇄에 맞서 일본 제국이 제시한 정치적ㆍ영역적 프로파간다가 바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었다. 1940년 8월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용어는, 같은 해 7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 내각이 일본 제국의 국시로 내세운 또 다른 프로파간다인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 집이라는 뜻)와도 밀접하게 관계된다. 팔굉일우는 글자만 놓고 보면 세계의 공존공영이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연상시킬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이를 영역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바로 대동아공영권이다.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서 아시아가 공존공영하는 영역을 지칭했던 대동아공영권은, 사실상 일본 제국이 아시아 전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이었다. 즉, 표면상으로는 아시아에서 서구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아시아인이 공존공영하는 영역을 만든다는 사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의 아시아ㆍ태평양 침략 및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쓰일 이념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에 따라 일본 제국은 우선 일만지(日滿支)라 불리는 국토계획을 실시하여, ABCD 봉쇄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일본 제국 본토와 만주국, 중국(지나(支那)), 아울러 한반도까지도 일제의 병참 및 군수산업 기지로 재편성한다는 시도였다. 일제강점기 후기에 함흥, 흥남 등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입지 하였던 배경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940년 6월 25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면서, 태평양 일대의 지정학적 질서는 크게 변화하였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ABCD 봉쇄의 구성원이었던 네덜란드까지도 나치 독일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고,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나치 독일로부터 본국과 대서양ㆍ지중해의 해상 교역로를 지켜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들은 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유럽의 지정학적 변화가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까지 변화시키면서, 일본 제국 입장에서는 이 같은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들을 침공하기에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1941년 12월에 일어난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이루어진 태평양 전쟁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을 뒷받침한 정치적ㆍ이념적ㆍ지정학적 프로파간다가 바로 대동아공영권이었다. 일본 제국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손에서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명분 하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 대한 침략 전쟁을 실시했고, 태평양 전쟁 초반에 일본군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할 해방군처럼 환영받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자유 인도 임시정부와 인도 국민군의 지도자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독립운동가로 존경받고 있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1897-1945)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사상에 동조하여 2차대전 중 일본군과 적극 협력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실제 목적은 식량 및 자원 수탈과 영토 확대였지, 식민지와 아시아인들의 해방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은 그들이 점령한 서구 식민지들을 해방하거나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서구 식민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지배를 하였다. 동남아시아인들은 일본 제국의 지배 하에서 자원 수탈과 침략 전쟁에 동원되었다. 말레이, 필리핀, 싱가포르 등지에서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는 물론, 서구인이 아닌 현지 주민들까지 가혹하게 학대하고 학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삼아 성노예로 부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한 점에서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 제국 점령지는 서구 식민제국 이상으로 강압적인 식민지배와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이었지, 대동아'공영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기에 동남아시아의 현지인들이 사보타주, 저항군 결성 등의 방법을 통해 일본 제국에 대해서 저항하고, 연합군에게 적극 협조했던 사례도 적지 않다.
대동아공영권과 오족 협화는 아시아의 해방과 단결, 화합을 표방한 슬로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아시아를 일본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그리고 이 두 슬로건, 특히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ㆍ태평양 일대가 2차대전의 전화에 말려들어가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확보하겠다는 명분으로 감행한 진주만 공습은, 미국의 2차대전 참전과 3년 8개월 동안 이어진 태평양 전쟁의 발발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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