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습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대한 지리적 접근
아시아와 태평양을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일본 제국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바로 미국이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항복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들은 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서부 평야 지대를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채 충칭으로 퇴각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건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경제 규모와 군사력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일본 제국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에게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함은 물론, 대일 경제 제재까지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제국의 아시아ㆍ태평양 침략을 미국이 묵인하거나 방조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심지어 미국은 비록 자치를 보장하며 1946년에 완전 독립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필리핀을 식민지로 두고 있기까지 하였다. 일본 제국으로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손에 넣기 위해서, 미국을 반드시 무력화하거나 미국과 유리한 협상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ㆍ태평양으로의 침략을 방해할 미국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본 제국과 일본군 수뇌부가 선택한 전략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파괴였다. 일본 제국은 이미 러일 전쟁에서 무리한 전쟁 끝에 제정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섬멸하고 러시아 육군에게 중대한 손실을 강요하는 데 성공하여, 러시아와의 강화를 통한 전쟁의 승리를 이끌어낸 전례가 있었다. 일본 제국은 러일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태평양 함대를 섬멸하고 미국의 군사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강요할 수 있다면 미국과의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비록 잘못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어쨌든 진주만 공습을 비롯해서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은 이러한 기조 아래 연합군과의 전쟁을 이어 갔다.
미국은 전통적인 해양대국 영국을 제치고 이미 세계 제1위의 대규모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태평양 방면을 담당하는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해군에게도 크나큰 위협을 주었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을 통해 파괴할 수 있다면, 태평양에서 자국 해군을 실질적으로 위협할 세력은 없다고 보았다. 미국 태평양 함대 외에도 영국,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 보호를 위해 해군을 배치했지만, 항공모함이나 전함과 같은 주력함들은 유럽 본토에 있었고 순양함급 이하의 함선들 또한 그 숫자가 적었다. 유럽 식민제국들이 식민지에 배치한 해군은 어디까지나 식민지의 치안 유지와 보호였고, 1930년대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개전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해군력이 일본을 앞섰다고는 하나, 본국과 지중해의 사수가 우선이었던 영국 해군에게 아시아의 식민지에까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할 여력도 부족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제국과 일본군 수뇌부는 진주만 공습을 계획했다. 미국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자 기지인 하와이에 기습을 단행하여 정박해 있는 함대를 파괴한다면,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해군력을 무력화함으로써 일본 제국 해군을 견제할 세력을 제거하고 나아가 미국과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태평양에 위치한 열도인 하와이는 본래 폴리네시아계 민족집단의 영역으로 독립 왕국이 존재했으며, 서구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19세기 후반에는 독자적인 근대화까지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와이 왕국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1893년에는 결국 미국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하와이는 태평양의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섬의 규모도 크고 대규모 병력과 함대의 주둔에도 적합한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태평양 함대와 같은 대규모 해군 전력의 기지로서 지리적 적합성이 매우 크다. 미국은 태평양의 해상권 장악에 있어 하와이가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였고, 이에 따라 태평양 함대의 본무와 모항을 하와이의 진주만에 건설해 두었다. 오늘날에도 태평양 및 인도양 방면의 군사전략을 총괄하는 미국 인도-태평양 사령부(United States Indo-Pacific Command (USINDOPACOM))가 하와이에 소재한다는 사실은, 하와이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 반대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해군 함대의 지휘를 총괄했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대장이었다. 미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며 유학까지 했던 경험이 있던 그는, 일본 제국이 압도적인 국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견해를 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실시는 결정되었고, 야마모토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자신이 반대했던 진주만 공습을 총괄 지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에 정박한 미 태평양 함대를 항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을 동원한 기습을 통해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항공기와 항모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주목했던 그는, 일본 제국 해군 내부에서 항모 건조와 함재기 개발 및 항공전 교리 정립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함, 순양함 등의 함포를 활용한 기습은 거대하고 속도가 느린 함선을 함포의 사거리 안으로까지 접근시켜야 하는 반면, 함재기를 활용한 공습은 함포의 사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빠르고 크기도 작은 함재기를 출격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기습의 효과를 한층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41년 11월 26일, 항모 6척과 전함 2척, 이 외에 다수의 순양함 및 구축함들로 구성된 대규모 항모전단이 쿠릴 열도를 출항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항모전단의 지휘는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 중장이 맡았다. 나구모는 야마모토와 달리 항모 전술에 조예가 깊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신중하면서도 용맹한 지휘관으로 일본 제국 해군 내부에서도 인정받고 있던 지휘관이었다. 6척의 일본 제국 항모는 400대가 넘는 함재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나구모의 항모전단은 진주만 공습을 개시했다. 진주만의 미군은 선전 포고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일어난 이 기습을 예측하지 못했다. 사실 진주만의 미군은 일본 함재기의 접근을 포착하고 이에 대응할 수도 있었다. 공습 개시 약 1시간 전, 진주만 기지의 레이더에 다수의 미확인 항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진주만의 당직 장교는 이를 레이더 이상이나 아군 항공기의 포착 정도로 간주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서영득, 2005). 덕분에 일본 제국 해군 함재기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기습할 수 있었다. 2차에 걸친 공습으로 인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전함 4척이 격침 및 착저했고, 또 다른 4척의 전함은 수개월-수년에 걸친 수리를 요할 정도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 외에도 다수의 구축함, 순양함이 손실을 입었다. 180대가 넘는 항공기들이 격추당하거나 지상 기지에서 파괴되었고, 사상자는 3,500명이 넘었다. 반면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기 29대 및 잠수정 5척 손실, 사망자 64명, 포로 1명에 불과했다. 일본 제국 해군의 전술적인 대승이었다. 다만 일본 제국은 미 해군 항모에게는 아무런 손실도 입히지 못했다. 항모들이 훈련 일정 때문에 진주만에 정박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구모의 일부 참모들은 3차 공습을 감행하여 진주만의 잔존 함정들은 물론 연료 저장고까지도 완전히 파괴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나구모는 혹시 모를 미 해군 항모의 역습을 우려하여 더 이상의 공습을 중지하고 진주만으로부터 철퇴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 외무성은 진주만 공습에 앞서 대미 선전 포고를 준비했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외교적 명분도 잃지 않기 위해서,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 직전에 대미 선전 포고문이 미국 측에 전달되게끔 시도하였다. 문제는 일본 제국 외무성이 대미 선전 포고문을 제때 미국 측에 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제국 외무성은 모호한 수사적 표현이 과도하게 들어간 장문의 대미 선전 포고문 번역에 필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해 버렸고, 결국 대미 선전 포고문은 진주만 공습이 끝난 뒤에야 미국 측에 전달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진주만 공습은 '선전 포고 없는 기습'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도 없이 미국 영토를 기습했다는 오명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는 부작용까지 불러왔다. 이 같은 미국인들의 적개심은, 태평양 전쟁기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가혹 행위와 겹쳐지면서 더욱 커져갔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대미 선전 포고 이전에 이루어진 진주만 공습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제국을 기본적인 외교 절차조차 지키지 않는 야만적인 침략자로 여기게 만들었고, 이는 진주만 공습 자체에는 일정 부분 유리하게 작용한 측면이 있었을지 몰라도 태평양 전쟁 전개 전체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진주만 공습은, 일본 제국의 선전 포고 없는 기습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일본 제국은 진주만에서 기록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미 태평양 함대는 보유하고 있던 전함을 대부분 상실했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는 거대한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미 태평양 함대가 사실상 무력화됨으로 인하여,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군을 견제할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성공이 미국과의 유리한 협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 제국의 계산과는 달리 진주만 공습 이튿날인 1941년 12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만 공습 직후 나치 독일은 이전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은 물론,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점에서, 2차대전의 향방은 물론 이후의 국제정세와 지정학적 질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태평양 전역은 물론 유럽 전역에도 힘의 균형과 지정학적 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나치 독일의 공세로 인해 중대한 위기에 몰려 있던 소련과 영국은,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강력한 동맹국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은 영국과 소련에 막대한 물자와 장비를 지원하였고, 대서양에서 미 해군은 나치 독일의 잠수함 소탕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2년 말에는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횃불 작전)함으로써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선에도 큰 변화가 야기되었다. 물론 야마모토가 우려했던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결국 일본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저지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일본 제국에게 패망을 안겼다.
뿐만 아니라, 진주만 공습은 이전까지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던 미국의 대외 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미국은 먼로주의로 대변되는 고립주의를 고수하면서 유럽 세계와 거리를 두고, 유럽 문제에 대한 불간섭을 천명하는 한편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불간섭을 요구하였다. 19세기 남미 국가들이 에스파냐,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영향을 준 부분도 적지 않다. 물론 1차대전 말기에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였고 이는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군이 패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도 작용했지만, 종전 후 미국은 또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했다. 1차대전 이후에도 승전국들이 식민지를 유지하며 제국주의 질서를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은 태평양 및 유럽 전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는 미국의 고립주의 노선이 폐기되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는 2차대전 이후 기존의 유럽 열강이 주도하던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 및 지정학적 질서로 재편되는 효시이기도 하였다.
진주만 공습과 더불어 일본 제국 육해군은 동남아시아 침공을 단행했다. 애초부터 식민모국의 병력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했던 데다 모국과의 연결고리마저 끊어진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 그리고 제해권을 상실한 데다 전쟁 준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미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연패를 거듭했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군을 견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세력이었던 미 태평양 함대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일본 제국은 빠른 속도로 영역을 확장해 갔다.
독립국 태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 제국은 1941년 12월-1942년 4월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 버마(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일대, 뉴기니 섬 대부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불과 3-4개월 사이에 동남아시아 일대를 사실상 장악한 셈이었다. 영국 동양함대 지원을 위해 본국에서 파견된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호와 순양전함 리펄스(Repulse) 호는 항공기나 방공 능력을 갖춘 함선의 호위 없이 항해하던 중 일본 제국 해군의 함재기에게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고,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의 잔존 함대가 미국, 호주 해군의 지원을 받아 편성한 ABDA(America, British, Dutch, Australia) 함대 역시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일본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동남아시아를 석권한 일본 제국은 실론(스리랑카)의 영국 해군 기지와 호주 북부의 항구도시 다윈(Darwin)에까지 공습을 감행하여, 병력과 함선, 군사 시설 등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다.
동남아시아를 석권한 일본 제국군의 다음 칼끝은, 호주를 향했다. 호주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한 데다 남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호주군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1ㆍ2차 대전에 영국과 참전하여 연합군 내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전투력과 감투 정신을 인정받는 강군이었다. 이러한 호주를 점령하거나 무력화한다면, 일본 제국은 호주의 자원과 인력을 흡수함은 물론 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연결 고리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은 호주를 무력화하고 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연결을 차단한 다음,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궁극적으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1942년 5-6월에 접어들어 일본 제국의 프로파간다였던 대동아공영권은, 오족 협화를 내세운 만주국이 건국된 것처럼 아시아ㆍ태평양 일대에서 거대한 영역으로의 실현을 마치 눈앞에 둔 듯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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