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의 영역 확장을 저지한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
1942년 4월에 동남아시아를 석권한 일본 제국군의 다음 칼끝은, 호주를 향했다. 호주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한 데다 남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호주군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1ㆍ2차 대전에 영국과 참전하여 연합군 내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전투력과 감투 정신을 인정받는 강군이었다. 이러한 호주를 점령하거나 무력화한다면, 일본 제국은 호주의 자원과 인력을 흡수함은 물론 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연결 고리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은 호주를 무력화하고 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연결을 차단한 다음,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궁극적으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한편으로 진주만 공습을 피한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 전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일본 제국은 이를 중대한 위협으로 인지했다. 4월 18일에 이루어진 미군의 도쿄 공습은 이러한 위기감을 극대화하였다.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1896-1993) 중령이 지휘하는 B-25 폭격기 편대가 미 항모 호넷(Hornet) 호에서 발진하여 도쿄를 공습한 다음, 중국에 불시착하여 중국인들과 중국군의 도움을 받으며 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둘리틀 편대의 도쿄 공습은 피해 규모는 경미했지만, 미 해군이 건재한 데다 일본 본토를 공격할 역량을 여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일본 제국 군부는 물론 일본인들까지 경악시켰다. 일본 제국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점령지를 유지하고 인도양 방면까지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잔존한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 전력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제국은 이에 따라 일본 제국은 호주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아직 연합군의 수중에 있었던 호주 남부의 항구도시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 그리고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Tulagi)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이름은 MO 작전이었다.
아울러 하와이에서 북서쪽으로 2,100여 km 떨어진 미드웨이(Midway)의 점령 계획 또한 세웠다. 미드웨이는 하와이 제도 북서쪽 끝에 위치한 면적 66.3㎢의 환초(環礁)로, 지명 그대로 북아메리카와 동아시아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드웨이는 하와이와 달리 작은 산호섬이지만, 그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하와이를 직접 위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 동부와 미국 서부 해안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였다. 때문에 미군은 이미 미드웨이에 비행장과 군사기지를 설치ㆍ운용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침공 계획 또한 수립했는데, 그 목표는 단순히 미드웨이를 점령하는데만 있지는 않았다. 일본 제국 해군은 미드웨이를 점령하여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 전력을 유인한 다음, 이를 섬멸할 계획까지 세웠다.
미 태평양 함대는 이 무렵까지도 해군 전력의 보강이나 충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서양 함대는 태평양 함대와 달리 진주만 공습과 같은 치명타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신예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급 전함 등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나치 독일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예하 함선들을 태평양 방면으로 전출시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태평양 전역에서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정보전에서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해군의 암호 체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1942년 4-5월에 이르러 미군 정보부는 일본 제국의 군용 암호 체계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 공습 때와는 달리, 산호해, 미드웨이 등을 침공하려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계획을 미리 탐지하고 파악할 수 있었다.
MO 작전의 수행을 위해, 일본 제국 해군은 정규 항모 2척과 경항모 1척으로 구성된 항모전단(사령관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1889-1975) 증징)의 호위 하에 포트모르즈비와 툴라기 점령을 위한 육군 병력 수송 선단을 출동시켰다. 이 계획을 미리 간파한 미 해군은 MO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항모 2척으로 구성된 항모전단(사령관 프랭크 잭 플레처(Frank Jack Fletcher, 1885-1973) 소장)을 포트모르즈비 방면으로 출동시켰다.
5월 3일, 일본 제국군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툴라기 섬에 상륙하여 이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일본 제국 해군 정찰기들을 격추하고, 구축함 1척을 격침하는 한편 수 척의 함선에 피해를 입혔다. 미 해군의 손실은 뇌격기 1기 격추에 그쳤다.
이후 5월 7일에는, 미 해군 항모와 일본 제국 항모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산호해 해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 해전은 순양함 등 수상함의 포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에서 출격한 함재기 위주의 전투가 주를 이루는 양상을 띄었다. 양국 함대가 수십 km 이상 이격된 상태에서 교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함포는 사거리를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 적함을 향해 사격을 할 수 없었지만, 함포의 사거리보다 훨씬 작전반경이 컸던 함재기는 함포 사거리라는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적함과 적기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산호해 해전은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항모 간 해전이라고도 평가된다. 한편 포트모르즈비를 둘러싼 이 해전은 호주 북동부의 산호해(Coral Sea)를 배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호해 해전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5월 9일까지 이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해군은 항모 렉싱턴(Lexington) 호를 상실했다. 또 다른 항모 요크타운(Yorktown)은 수개월의 수리를 요할 정도로 대파되었다. 함재기 손실은 약 70대였다. 반면 일본 해군은 경항모 쇼호(祥鳳) 호를 상실했고, 정규 항모 쇼가쿠(祥鶴) 호가 대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또 다른 정규 항모 즈이가쿠(瑞鶴) 호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함재기 손실은 약 70-100대였다. 이외에 쌍방 공히 소수의 수상함이 격침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비록 경항모 1척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미 해군 정규 항모 1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점에서 산호해 해전은 전술적으로는 일본 제국 해군의 판정승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전략적ㆍ지정학적 측면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산호해 해전으로 인해 포트모르즈비 상륙은 결국 연기되었고, 이로 인해 인도양 진출 역시 연기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산호해 해전은 연합군이 일본 제국군의 진격을 처음으로 저지시킨 전투였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넘어 호주와 인도양까지 진출하려던 일본 제국군의 계획 또한 저지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산호해 해전은 '욱일승천'의 기세처럼 빠르게 이루어지던 일본 제국의 영역, 즉 '대동아공영권'의 영역 확장에 쐐기를 박은 계기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일본 제국군의 포트모르즈비 상륙 및 인도양 진출 계획은 산호해 해전의 결과로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연기되었을 뿐이었지만, 이어진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의 결과로 인해 결국 재개되지 못했다.
둘리틀 편대의 도쿄 공습에 이어 산호해 해전에서도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 전력을 제거하기 위해,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드웨이 공격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우선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항모 4척을 포함하는 제1항공함대로 하여금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제1항공함대는 나구모의 직접 지휘를 받는 제1항공전대(항모 아카기(赤城) 및 가가(加賀) 호 보유)와 야마구치 다몬(山口多聞, 1892-1942) 소장이 지휘하는 제2항공전대(항모 소류(蒼龍) 및 히류(飛龍) 호 보유)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서 미드웨이 점령은 물론, 미드웨이의 구원과 탈환을 위해 접근하는 태평양 함대의 항모 2척을 후방에 배치된 전함 및 순양함 위주의 연합함대 본대를 비롯한 수상함대들와 협격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뿐만 아니라, 야마모토는 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알래스카를 공습하고 알래스카 남서쪽에 위치한 알류샨 열도를 점령한다는 계획 또한 세웠다.
하지만 이 같은 일본 해군의 작전과 계획은, 미 해군의 첩보 활동을 통해 이미 간파되어 있었다.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비밀 통신망을 감청하는 가운데 AF라는 암호의 출현 빈도가 유난히 잦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분석 끝에 AF가 미드웨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을 검증하기 위해 미드웨이 기지의 급수 시설이 고장 났다는 전문을 고의로 평문 발송하는 역 첩보를 실시한 결과, 일본 해군의 통신망에 AF의 급수 시설이 고장 났다는 전문이 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의 요격을 위해 미드웨이 방면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6월 초 알류샨 열도에 상륙한 일본 제국 육해군 부대들은 사실상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던 이곳을 손쉽게 점령했고 일본 제국은 이를 일본 제국군의 승리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 제국 측의 기대를 뛰어넘는 전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태평양 함대가 보유했던 4척의 항모 가운데 산호해 해전에서 렉싱턴 호가 격침당했고 요크타운 호가 수개월에 걸친 수리를 요하는 중대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미드웨이에 미 태평양 함대가 동원할 수 있는 항모는 2척에 불과하리라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하와이로 예인된 요크타운 호는 불과 3일 만에 수리를 마치고 전선에 복귀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하였다. 비록 일본 제국 제1항공함대의 4척에 비하면 여전히 숫적으로 불리했지만,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 전력은 제1항공함대의 항모 전력과 2:1이 아닌 4:3의 비율로 싸울 수 있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1885-1966) 대장은 3척의 항공모함 및 이들을 호위할 수상함과 잠수함을 총동원하여, 미드웨이를 역습의 거점으로 삼아 일본 제국 항모 전력에게 중대한 손실을 강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산호해 해전의 지휘관 플레처가 제17기동부대(Task Force 17, 보유 항모 요크타운 호)를 지휘하였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Raymond Ames Spruence, 1886-1969) 소장이 제16기동부대(Task Force 16, 보유 항모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및 호넷 호)를 지휘하였다.
1942년 6월 4일 아침, 나구모는 미드웨이 공습을 개시하였다. 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의 암호 감청ㆍ분석뿐만 아니라 항모 및 미드웨이 기지에서 발진한 정찰기 자원을 총동원하여 첩보 및 수색 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일본 제1항공함대의 위치 정도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 미 해군만큼 첩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나구모는, 미 해군 제16ㆍ17기동부대의 위치와 의도는 물론 요크타운이 3일간의 수리를 마치고 복귀하여 항모를 2척이 아닌 3척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 제1항공함대의 공습으로 미드웨이의 미군 기지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미리 준비를 해 둔 덕에 나구모의 1차 공습만으로 미드웨이를 무력화하거나 미드웨이 상륙이 가능한 상황을 조성하지는 못했다. 그런 한편으로 미드웨이 기지의 폭격기와 뇌격기들 또한 일본 해군 항모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고, 그 중 상당수는 일본 항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에게 요격당하고 말았다. 미 해군 항모전단에서도 뇌격기와 폭격기들이 출격했지만, 이들 역시 일본 항모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미 해군 함재기들의 폭격과 뇌격은 일본 제국 항모들에게 명중하지 못했고, 이들 역시 상당수가 일본 제국 함재기들에게 요격당하고 말았다. 미 해군이 뛰어난 첩보전과 정보전을 통해 일본 제국 해군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도 철저히 했지만, 이 시점까지는 제1항공함대가 미드웨이 기지 및 미 제16ㆍ17기동부대를 압도하며 우세를 점하고 있는 양상을 보였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나구모의 행보였다. 나구모는 참모들에게 휘둘리다시피 하며 공격 목표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미 항모와 해군 함정의 공격을 위해 함재기들에게 어뢰 장착을 명령했던 그는, 돌연 해당 명령을 번복하고 함재기들에게 미드웨이 폭격을 위해 폭탄으로 무장 변경을 명했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명령 탓에 함재기의 무장을 급하게 변경하느라, 제1항공함대 소속 항모들의 갑판에는 폭탄과 어뢰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이 때 미 해군의 급강하폭격기들이 고공에서 급강하를 개시하여 폭탄을 명중시켰고, 인화 물질이 갑판에 널려 있던 일본 제국 해군 항모들에서 순식간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히류 호를 제외한 3척의 일본 제국 항모들이 미 해군 뇌격기에 피격된 직후 완전한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고, 이 3척은 6월 4일-5일 사이에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야마구치 다몬 휘하의 히류 호는 미군의 공습에 휘말리지 않고 요크타운 호에 손상을 가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3척의 미 항모들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의 공습을 이기지 못하고 격침되고 말았다. 나구모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야마구치는 침몰하는 히류 호에서 생존한 부하들을 퇴함시킨 뒤 함선에 잔류하여 히류 호와 운명을 같이 했다. 제1항공함대가 섬멸당한 상황에서 상륙부대의 상륙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편 손상을 입은 요크타운 호 또한 일본 제국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폭발로 승조원 및 함재기 조종사들의 대다수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일본 제국 항모들과 달리, 요크타운 호의 승조원과 조종사들은 함장의 침착한 지시를 따르며 무사히 퇴함한 다음 아군 함정의 구조를 받는 데 성공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은 항모 1척과 구축함 1척, 그리고 약 150대의 항공기와 30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을 상실했다. 반면 일본 제국 제1항공함대는 항모 4척을 모두 상실했고, 중순양함 1척도 미 해군의 잠수함에 의해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한 항모에 탑재되어 있던 약 300대에 달하는 항공기와 파일럿 또한 상실했다. 전사자는 3,000명이 넘었다. 일본 제국 해군의 참패였다. 일본 제국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상실한 항모 4척 외에도 4척의 항모를 추가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 등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드웨이 방면으로 신속하게 합류하여 미 해군에게 역습을 가할 수 없었다. 항모 전력이 소멸된 상황에서 연합함대 본대 등 후방의 수상함대 전력만으로 16ㆍ17기동부대를 상대하기도 위험했다. 미 해군 역시 더 이상의 교전으로 인해 남은 2척의 항모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전투 종료 직후 신속하게 전장을 이탈하였다. 우리나라의 현충일이기도 한 6월 6일에, 미드웨이 해전은 미 해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진다. 일본 제국군에 연패를 거듭하던 연합군이, 일본 제국의 확장을 저지하고(산호해 해전) 일본 제국 해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기(미드웨이 해전) 때문이었다. 두 전투 이후 일본 제국은 이전까지의 일방적으로 가져왔던 승기를 되찾지 못하고,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일어난 과달카날 전투 이후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산호해 및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거둔 승리는, 정보전 및 경제력과 산업 능력의 차이와도 연관된다. 미군이 일본 제국 해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이들의 작전 계획을 충분히 파악할 동안, 일본 제국군은 미군이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전시 체제를 정비하며 일본 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군수물자와 무기를 생산했고, 신무기를 개발했으며, 병력의 질적 수준 또한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입은 손실을 제대로 복구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 미국이 무려 100척이 조금 넘는 항모-이 중 상당수는 소수의 항공기만 운용 가능한 호위 항모이기는 했지만-를 취역시킨데 반해, 일본 제국은 경항모를 포함해서 14척의 항모만을 취역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지리적ㆍ지정학적 국면에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선 미 해군은 산호해 해전을 통해 일본 제국으로부터 호주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서 영국군과의 연계 또한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본 제국의 인도양 침공 계획 또한, 산호해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좌절시킬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군은 미군과 더불어 버마 전선 등지에서 맹활약했음을 감안하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이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 등지에 물자 및 병력 지원을 받으며 롬멜의 아프리카기갑군을 격퇴할 수 있었음을 생각하면, 아울러 나치 독일에 의해 고립되다시피 한 영국이 인도, 호주 등지로부터의 물자 보급을 통해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히 태평양 전쟁뿐만 아니라 2차대전 전체의 흐름에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지리적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제국 항모 전력에 치명타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이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차단한 계기였다. 미드웨이가 일본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면, 일본 제국은 하와이는 물론 미국 본토까지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일본 제국이 미드웨이의 지배에 실패하면서, 일본 제국은 미국 본토를 위협할 기회를 끝내 잃고 말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태평양 전쟁의 지리적ㆍ공간적 범위는 결국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 한정되고 말았다.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지리적ㆍ공간적 범위를 얻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일본 제국은 결국 자국의 세력을 갉아먹는 소모전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인도양 진출을 모색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위대한 황군'의 정신력과 투지로 미군에게 치명타를 가한다면 언젠가는 미국과 유리한 협상을 체결한 뒤 대동아공영권을 유지하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전략과 사고방식은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일본 제국 정부와 군부 수뇌부들을 지배했지만,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무기 체계와 경제 및 산업 능력, 군사 교리와 병력의 질적 수준은 물론 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은 미국 본토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었던 반면, 미군은 일본 제국의 영역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할 수 있었고 대전 말기에는 일본 본토까지도 폭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미드웨이 해전은 해전의 공간적 영역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이기도 하였다. 살라미스 해전, 한산도 대첩, 트라팔가 해전 등과 같은 전근대 시대의 해전은 물론, 유틀란트 해전과 같은 1차대전기의 해전조차도 그 공간적 범위는 연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통신기술, 선박 제조 기술, 항해 기술 등의 부족 등으로 인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양 한가운데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전투는커녕 대양에서 적 함대를 발견하고 조우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이 같은 전시대의 해전과 달리, 소규모의 산호초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대양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통신 기술, 함정 건조 및 운용 기술, 항공기 제작 및 운용 기술 등과 같은 기술의 발전이 해전의 공간적 범위를 연근해에서 대양 한가운데까지 넓힌 해전사의 지리적ㆍ공간적 변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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