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지리적 접근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이 보유한 항모 전력의 절반인 4척의 항모를 격침시키고, 일본 제국군의 미드웨이 상륙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 해군 전력은 여전히 강대했고, 미 해군의 전력 증강은 아직은 요원한 수준이었다. 이 두 해전은 미군이 연승을 거듭하던 일본 제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거나 전력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지만, 일본 제국의 영역을 탈환하거나 본격적인 역습이 가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 제국은 산호해 해전으로 인해 연기된 포트모르즈비 점령 및 호주 방면으로의 공세를 재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제국은 산호해 해전으로 인해 포트모르즈비 점령은 포기해야 했지만,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 섬의 점령에는 성공했다. 툴라기 섬을 점령한 일본 제국군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과달카날(Guadalcanal) 섬에 비행장과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면적 2.08㎢의 툴라기 섬은 대규모 군사시설을 건설하기에는 면적이 너무 작았지만, 과달카날 섬은 면적 5,302㎢인 데다 섬 북부에 하천이 흐르는 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수용할 수 있는 군사기지 및 비행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본 제국군이 과달카날 섬을 군사기지화한 이유는 바로 포트모르즈비와 호주를 겨냥하기 위함이었다.
1942년 6월 나치 독일 아프리카기갑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일본 제국은 전쟁의 또 다른 가능성에 주목했다.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나치 독일군이 중동, 이란 등을 넘어 인도 방면으로 동진하는 한편으로 일본 제국군이 뉴기니 섬과 호주 북부를 장악하여 인도양으로 안전하게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두 추축국의 온전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이를 통해서 전세를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일본 제국은, 잠수함대를 파견하여 인도양의 영국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를 하는 한편으로 나치 독일에게 1942년 하반기에는 인도양 일대에서 공세를 개시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이러한 일본 제국에게 솔로몬 제도는 포기할 수 없는 요지였고, 그중에서도 비행장과 군사 기지 건설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과달카날 섬은 특히 중요성이 높았다.
일본 제국이 과달카날 섬을 발판 삼아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포트모르즈비를 비롯한 뉴기니 섬 전역을 점령하고 호주 북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연합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과 인도양이 일본 제국에 의해 분단되어 영국과 미국 간의 연결 고리가 차단된다면, 태평양 전역은 물론 종국에는 2차대전 전체의 승패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과달카날 섬에 일본 제국군이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첩보는, 미군 수뇌부를 크게 긴장시켰다. 하루라도 빨리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을 무력화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달카날 섬을 일본 제국군의 손에서 탈환하지 못한다면, 전쟁은 일본 제국의 승리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미군 수뇌부는 물론 대통령 루스벨트에게까지 퍼져 갔다. 이에 따라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시 체제에 다른 본격적인 전력 증강이 완비될 때까지 전력을 축적하며 소규모 공세 정도만 지속한다는 기존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1942년 중반의 시점에서도 미군은 병력의 훈련 수준과 실전 경험, 무기와 장비의 성능과 수량, 보급 수준 등 여러 여건에서 일본 제국군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루스벨트와 니미츠, 그리고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 대장 등은 불비한 상황 속에서도 과달카날을 선제공격하여 점령해야 한다는 계획에 동의했다. 만일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이 완성되고 병력과 장비의 증원 및 요새화가 완료된다면 미군으로서는 더 많은 전력과 자원을 소모하더라도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고, 그 이전에 자칫하면 과달카날로 인해 일본 제국군이 뉴기니 섬과 호주, 나아가 태평양과 인도양의 제해권까지 손에 넣으며 전쟁의 승기를 확실히 잡아버릴 위험성도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달카날 전투를 앞둔 미군과 일본 제국군은 공히 중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확보를 위해서는 육해군 간의 긴밀한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육해군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과달카날을 담당하는 미 남서태평양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이었다. 맥아더는 우리나라에서 인천 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고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결코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정치군인 성격도 다분한 인물이었다.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 파이프를 문 그의 초상화 역시, 정치군인 성격이 강한 데다 과시욕과 출세욕이 유난히 강했던 그가 자신의 과시와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훗날 미국령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Manuel Luis Quezon y Molina, 1878-1944)과의 친분을 활용하여 자치령 필리핀군의 조직에 관여했고, 이 공적으로 필리핀 자치령군 원수 계급을 얻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라이프(Life)』 지는 그를 '두 개의 조국을 가진 사나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1941년 초반 일본 제국군이 필리핀을 침략했을 때 예하 병력을 조나단 웨인라이트(Jonathan Mayhew Wainwright IV, 1883-1953) 중장에게 인계한 채 호주로 탈출하는 행보를 보였다. 비록 상부의 명령에 따른 탈출이었다지만, 맥아더는 이러한 행보로 인해 미군 장병들에게 '더그아웃 더그(Dugout Doug)'라는 모멸적인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문제는 남서태평양 사령부의 관할 구역이 육지보다 바다의 비중이 컸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군 제독들은 육군 출신 사령관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고 과시적인 성격이 강한 데다 필리핀에서의 행보로 평판까지 떨어져 있던 맥아더는, 육군 장성들과 해군 제독들의 의견을 조율해 가며 통합 작전을 주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결국 워싱턴의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육군 중심의 남서태평양 사령부 외에 태평양 함대가 관할하는 태평양 해역군 사령부를 신설함으로써, 육해군 간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 육해군 간의 갈등은 미 육해군 갈등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애초에 일본 제국 육군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이었던 조슈(長州) 번 지벌(地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해군은 또 다른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쓰마(薩摩) 번 지벌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상호 협력 관계였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한 나라의 군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호 견제와 갈등이 심각했다. 일본 제국 육해군은 상대를 견제하느라 의사소통은 커녕 심지어 중요 정보의 공유조차 꺼릴 정도였고, 육군과 해군은 정보 획득을 위해 상대측에 첩자를 파견할 정도였다. 육군 장성들과 해군 제독들의 불만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 성공했던 미군과는 달리, 일본 제국군은 육해군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전쟁 준비 상태 역시 양자 공히 부족했다. 미국은 아직 전시 체제가 궤도에 올라 있지 않았고, 태평양 함대는 여전히 소수의 항모 전력만으로 일본 제국 해군을 상대해야 했다. 항공기와 수상함정 전력 역시 여전히 부족했다. 육군과 해병대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함은 물론, 훈련 수준마저 불충분했다. 비록 진주만 공습 이후 수많은 미국 청년들의 자원입대 행렬이 줄을 이었다지만, 전쟁은 적개심이나 사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일례로 과달카날 섬에 맨 처음 상륙했던 미 해병 제1사단은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과달카날 상륙을 '신발끈 작전(Operation Shoestring)'이라 부르며 자조할 정도였다.
일본 제국군의 사정 역시 문제가 많았다. 1942년 상반기에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일본 제국이었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국력 및 전쟁 지속 능력의 한계까지 몰아세운 결과였다. 과달카날이 비록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였다지만, 뉴기니 섬과 호주를 장악하고 인도양까지 진출할 계획을 세웠던 일본 제국군에게 과달카날 섬까지 점령한다는 계획은 자칫 전력의 분산을 강요할 위험도 컸다. 일례로 Gerhard L. Weinberg(홍희범 역, 2016)는 일본 제국은 과달카날을 포기하더라도 뉴기니 섬 점령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게다가 일본 제국의 핵심 목표는 동남아시아나 태평양이 아닌 중국이었다. 길어지는 중국에서의 전쟁에 투입할 여력조차 충분치 못했던 대본영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방면을 담당하는 남방총군에게 충분한 병력과 장비, 자원을 지원해 주지 못했다. 과달카날 방면의 일본 제국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42년 8월 7일,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Alexander Archer Vandegrift, 1887-1973) 소장이 인솔하는 미 해병 제1사단 병력이 태평양 함대 소속 함정들의 호위를 받으며 툴라기 섬, 과달카날 섬 등지에 기습적인 상륙을 개시했다. 무려 6개월이나 이어진 과달카날 전투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대 병력은 툴라기 섬의 일본 제국군 수비 병력을 격파하고 섬을 탈환하였고, 과달카날 섬에서도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과달카날 섬의 미 해병대 병력은 이윽고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이들을 엄호할 해군 전력에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플레처는 3척에 불과한 가용 항모 전력을 상실할 경우 태평양 일대에서 미군의 제해권에 중대한 타격을 우려하여 상륙 당시 해병대를 엄호했던 항모들을 조기 철수시켰다. 때마침 미카와 군이치(三河軍一, 1888-1981)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순양함대가 미 해병대를 엄호하던 연합군 순양함대를 기습하여 미 해군 순양함 3척과 호주군 순양함 1척을 격침시켰다(사보 섬 해전). 미카와 함대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미 항모의 전선 이탈을 파악하지 못했던 미카와는 미 항모의 역습을 우려하여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고 조기에 전선을 이탈했지만, 이로 인해 과달카날 일대에서 미 해군이 제해권을 상실함으로써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섬에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급선마저 일본 해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일본 제국군, 특히 육군의 적절하지 못한 대처는 이들에게 호기로 다가왔다. 과달카날 섬의 전략적 중요성을 매우 높게 판단했던 일본 제국 해군과 달리, 육군은 과달카날 섬을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대본영은 이러한 육해군의 의견차를 적절하게 조율하지 못했고, 육군과 해군의 갈등과 의사소통 실패는 일본 제국군이 적절한 전력 투입을 하지 못한 채 결국 패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일본 제국 육군은 미군을 물질적 풍요에 찌든, 일본군이 '황군의 감투 정신'으로 돌격과 백병전을 감행한다면 지리멸렬하게 흩어질 나약한 군대로 평가절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중일 전쟁에서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중국군을 상대로, 그리고 태평양 전쟁 초기에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본국의 지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동남아시아 식민지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던 일본 제국 육군은, 해군에 비해서도 적을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의 정신력으로 병력 및 장비 측면에서 우세한 적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특히 강했다. 이는 일본 제국 육군이 해군의 지원을 받는 유리한 상황 속에서도, 과달카날에 무의미한 축차 투입을 지속하여 전투의 패배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1942년 8월 하순에 일어난 이치키 지대(一木枝隊, 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一木淸直, 1892-1942) 대좌)의 전멸은 일본 제국 육군이 가졌던 이러한 문제점을 잘 보여 준다. 과달카날 섬의 비행장이 미 해병대에게 점령당하자, 일본 제국 육군은 이치키 대좌에게 1천 명도 채 안 되는 병력을 인솔케 하여 비행장 탈환을 명령하였다. 전차나 화포 등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미 해병대의 병력이 1개 사단 규모임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고작 1-2개 대대 규모의 경무장한 보병 전력으로 중장비로 무장한 1개 사단을 상대하라는 비현실적인 작전이었다. 결국 이치키 지대는 미 해병대에게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한 채 지대장 이치키를 비롯한 병력 대부분이 목숨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에 이루어진 일본 제국 육군의 공세도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되는 형국이었다. 일본 제국 육군은 대규모 부대를 집중하여 과달카날에 투입하는 대신, 소규모 부대를 과달카날에 축차 투입했다. 과달카날 섬에 축차 투입된 일본 제국 육군은 첩보 활동을 통해 미 해병대의 전력과 전술을 분석하는 시도를 게을리하고, 보병에 돌격에 의존하는 전술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본 제국 육군은 해군 함정의 함포 사격 지원까지 받는 유리한 상황 속에서도, 미 해병대를 제압하거나 무력화할 수 없었다. 축차 투입되는 일본 제국 육군 병력을 차례차례 격퇴하는 가운데, 미 해병 제1사단은 실전 경험을 축적해 가며 강군으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 제국 육군을 상대할 노하우 또한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미 해병대는 제해권이 상실된 와중에도 구축함을 통해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물자 보급을 성공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고, 일본 제국 육군의 무의미한 돌격을 격퇴해 가면서 핸더슨 비행장이라 명명된 비행장을 완공하는 데 성공했다. 미 육군이 항공기까지 보급하는 데 성공하면서, 핸더슨 비행장은 미 해병대의 전력을 한층 증강시켜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첩보 활동을 소홀히 했던 일본 제국군과 달리,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섬의 원주민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여 이들을 첩보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그 특성상 일본 제국군의 의심을 받지 않고 일본 제국 육해군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들을 통해 획득한 정보 덕택에 미군은 일본 제국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해상에서의 전황도 미 해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투 초기에는 미카와 함대의 기습으로 인해 미 해군이 과달카날 해역에서 제해권을 상실했으나, 머지않아 미 해군은 일본 제국 해군에게 중대한 손실을 강요하며 전황을 바꾸어갈 수 있었다. 우선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본 제국군과 달리 미군은 일본 제국군의 암호 체계를 이미 해독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 해군은 과달카날 섬에 대한 화력 및 물자 지원 임무를 수행하던 일본 제국 함정들의 진로와 기동 계획을 대부분 파악해 둔 터였다. 때문에 과달카날로의 병력과 물자 수송 및 화력 지원 임무를 맡았던 일본 제국 해군 함정들은 미군의 항공기, 수상함정, 잠수함으로부터 빈번히 공격을 받아야 했고, 이로 인해 과달카날로의 보급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과달카날의 일본 육군 또한 전력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군은 10월에 육군 병력을 충원하는 데 성공했다. 과달카날 해역에서 일본 제국 어뢰를 무기로 한 야간 기습을 통해 미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미 해군은 레이다를 활용하여 표적 획득 및 어뢰와 함포의 명중률을 제고하는 방식으로 야습에 능한 일본 제국 해군에게 대처하였다. 미 해군은 함정에 고성능 레이다를 장착하여, 구축함들이 일본제국 해군 구축함보다 신속ㆍ정확하게 어뢰를 발사하는 한편으로 어뢰의 사거리 밖에서 순양함이 함포사격으로 일본제국 구축함들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전법을 고안하여 일본 제국 해군과의 주간 전투는 물론 야간 전투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과달카날 해역에서 미 해군이 항모 호넷 호를 상실했지만, 일본 제국 해군 역시 쇼가쿠 호와 즈이호(瑞鳳) 호가 대파되어 전선을 이탈해 일본 본토로 회항해야 했다.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 해군 항모 전력에 공백이 발생한 셈이었다. 이어서 11월에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순양전함 히에이(比叡) 호와 기리시마(霧島) 호를 상실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과달카날 섬의 전력을 증강하며 제해권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한 미군과 달리, 일본 제국 육군은 물론 해군에서도 목표 달성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한 채 손실만 누적되어 가는 과달카날 섬의 확보가 의미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커져갔다. 결국 대본영은 1942년 12월 하순에 과달카날의 포기를 결정했다. 1943년 초에 일본 제국 육군은 과달카날의 병력 철수를 시작했고, 1943년 2월 7일 6개월에 걸친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 제국군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일본 제국은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로 인해 결국 솔로몬 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뉴기니 섬과 호주 북부를 장악하여 인도양으로 진출하고, 나치 독일군과 연결고리를 형성한다는 일본 제국군의 전략 또한 어그러뜨렸다. 실제로 1942년 중반 인도양으로 진출했던 일본 제국 해군 잠수함들은 결국 태평양 방면으로 철수했고,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실질적인 협력 및 합동 작전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덕분에 미국과 영국은 인도양을 통해서 소련, 그리고 지중해 방면으로의 물자 보급 및 지원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는 태평양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도 연합군이 추축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일본 제국 육해군은 과달카날 전투로 인해 손실이 누적되었고, 미드웨이 해전이 이어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해군 전력을 소모하며 미 해군에 대한 일본 제국 해군의 우위를 잃어 갔다.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는 미군에게 과달카날과 솔로몬 제도라는 전략적ㆍ지정학적 요지를 가져다준 데 그치지 않았다. 과달카날에서 6개월에 달하는 소모전이 이어지면서, 미군은 일본 제국군에게 전력의 소모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 체제 전환에 필요한 시간까지도 벌 수 있었다. 덕분에 전쟁 준비의 부족으로 일본 제국군과 불리한 전투에 임해야 했던 1942년과 달리, 1943년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은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력 면에서 확연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전시 체제 전환에 성공한 미군은 우수한 경제 및 산업 능력을 동원하여, 대전 기간 동안 100척이 넘는 항모를 취역시키는 등 태평양 전쟁 중ㆍ후반에 접어들어 일본 제국을 압도하는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제국은 과달카날 전투를 비롯한 1942년에 소모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보충하지 못했다. 대전 기간에 일본 제국은 총 13척의 항모를 취역시켰는데, 개전 시점에서 9척의 항모를 보유했음을 감안하면 고작 4척의 항모를 추가로 취역시키는데 그쳤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뛰어난 기동성으로 미군 전투기들을 압도하며 미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던 제로센(零戰)은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까지도 신예 기체로 교체되지 못한 채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지만, 미 해군은 제로센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가진 F-4U 콜세어, F6F 헬캣 등의 전투기를 취역시키면서 제로센을 압도해 갔다. 만일 일본 제국군이 과달카날 섬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미군을 상대로 보다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더라면, 일본 제국군은 아직 전쟁 준비가 불비하고 전시 체제로의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미군을 상대로 한층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으로 인해 일본 제국군은 전력 소모는 물론, 결과적으로 미군이 전력을 정비하고 증강할 시간까지 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미군은 과달카날 전투를 통해 일본 제국군에 대한 공포를 불식할 수 있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며, '천황 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면서 총검과 일본도를 휘두르며 죽음의 공포를 잊은 듯 돌격하던 일본 제국군은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개전 초 일본 제국군이 짧은 시간에 동남아시아를 석권하면서, 일본 제국군에 대한 미군의 공포는 한층 고조되었다. 하지만 과달카날 전투를 통해 미군 장병들은 일본 제국군을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무서운 군대가 아닌, 적절한 화력 투사와 전술을 통해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적군으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반면 일본 제국군은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진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대한 첩보 활동을 증강하거나 전훈을 분석하여 미군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보다는 '황군의 감투 정신'으로 미군에게 치명타를 가하여 미국과의 강화를 이끌어낸다는 기조를 고수했다.
요컨대 과달카날 전투는 미군이 일본 제국군의 솔로몬 제도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저지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전략적ㆍ지리적 의미를 가진다. 미군은 과달카날 전투를 통해 태평양을 넘어 인도양까지 진출한다는 일본 제국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로서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전체를 일본 제국의 영역으로 만든다는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뿐만 아니라, 미군은 과달카날에 일본 제국군의 전력을 6개월간 고착시킴으로써 전시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일본 제국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구축하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과달카날 섬이라는 장소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본격적인 역습이 시작된 장소의 의미뿐만 아니라,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 제국에 비해 전력이 열세하여 수세에 몰려 있던 미군이 전력을 보강하여 태평양 전쟁에서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장소라는 의미 또한 가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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