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45년에 이르러 일본 제국의 연합군의 공세로 인해 태평양 해역에서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1944년 6월에 일어난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군은 이어서 사이판, 필리핀 등에 공세를 가하여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945년 태평양 전역에서는 일본 제국의 패색이 짙어졌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을 상대로 패퇴를 거듭했다고는 했지만, 일본 제국의 항복은 요원했다.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 제국은 '신주불멸(神主不滅)', '일억옥쇄(一億玉碎)' 등의 구호 하에 연합군에 대한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다. 1944년에 접어들이 전황이 기울었다는 사실은 이미 대본영을 비롯한 일본 제국 수뇌부들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연합국과의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종전 협상은 맺을 수 있을지언정 항복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연합군 함정을 격침시키기 위해, 가미카제(神風), 자살 공격용 유인 어뢰인 가이텐(回天), 자살 공격용 보트인 신요(震洋) 등을 활용한 자살 특공대까지 조직하여 실전에 투입할 정도였다.
연합군은 일본 제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을 계획하였다. 몰락 작전을 통해 일본 본토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도쿄 등의 대도시와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고, 이를 통해 일본 제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몰락 작전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가까우면서도 대규모 병력과 항공기, 함선 등을 수용할 수 있는 전진기지가 필요했다. 물론 미군은 1944년 후반에 필리핀뿐만 아니라 사이판과 괌을 탈환했고 이곳에서 B-29 폭격기를 출격시켜 일본 본토에 전략 폭격을 가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고 전쟁 지속 능력에 타격을 가해 오고 있었지만, 괌이나 사이판은 일본 본토와 2,000km 이상 이격 되어 있었다. 전략 폭격의 수준을 넘어 대규모 병력의 안전하고 효과적인 상륙을 준비 및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가까우면서도 작전 준비와 실시에 용이한 전진 기지 내지는 교두보와 같은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로 선정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1945년 4월 1일-6월 22일에 걸쳐 일어난 오키나와 전투는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이번 장에서는 오키나와 전투의 배경과 과정, 영향을 지리적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오늘날에는 일본 최남단의 현(縣)을 가리키는 지명(오키나와 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일본과는 차별화되는 역사와 종교, 민족 정체성을 가진 나라였다.
류큐 열도에는 10세기 무렵부터 아지(按司)라 불리는 족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 국가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의 역사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11-12세기에는 아지들이 구스쿠(城, ぐすく)라는 성채를 쌓고 할거하며 상호 대립 및 경쟁하는 구스쿠 시대가 열렸고, 1187년에는 슌텐(舜天) 왕이 구스쿠 시대를 통일하여 슌텐 왕조를 열었다. 슌텐 왕조는 5대 만에 멸망했고, 오키나와에는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조가 분립하는 삼산 시대가 도래했다. 삼산 시대는 1429년 중산의 왕이었던 쇼 하시(尚巴志, 1372-1439)가 남산과 북산을 멸망시키며 끝났고, 오키나와 섬을 통일한 쇼 하시가 명나라로부터 류큐 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으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쇼(尙)씨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조공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로부터 국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쇼씨 왕조는 쇼 신(尙眞, 1465-1526, 재위 1477-1526) 왕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쇼 신 왕은 왕권 강화에 성공하는 한편 조선, 일본, 중국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막대한 국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 섬들까지 군사적으로 정복하여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후 에스파냐 등 서구 세력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류큐 왕국이 가졌던 지리적 우위에 타격이 갔고, 명나라의 쇄국 정책이 약화되면서 류큐 왕국이 독점했던 명나라와의 무역 구도도 깨지고 말았다. 서구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통해 명나라, 일본 등과 활발하게 무역 활동을 함에 따라, 류큐 왕국의 중계 무역은 쇠퇴했고 이는 류큐 왕국의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 내분, 기근 등으로 인해 혼란상에 빠지고 국력이 약해지면서, 명나라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던 류큐 왕국의 안전 보장 문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구의 준동은 류큐 왕국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결정적으로 17세기 초반 일본의 사쓰마(薩摩)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하면서, 류큐 왕국은 사실상 사쓰마 번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마미() 군도와 같은 류큐 번 영토의 일부도 이때 사쓰마 번으로 편입되었고, 이들 지역은 오늘날에도 사쓰마 번의 후신인 가고시마() 현에 속해 있다.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에 과도한 인두세를 부과하는가 하면 사탕수수 등의 상품 작물 재배를 강요하여 막대한 이익을 착취했고, 류큐인들은 이로 인해 극심한 기아와 빈곤에 시달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9년, 일본 정부는 류큐 처분을 통해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으며 류큐 왕국의 마지막 왕 쇼 타이(尙泰)를 일본의 화족(華族)으로 강등시켰다. 오키나와가 일본의 현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인들을 일본 본토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했고, 동화(同化)라는 명목 하에 오키나와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사회적ㆍ문화적 탄압을 자행했다.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제해권 및 제공권을 장악하고 필리핀 탈환에까지 성공했지만, 일본 본토로의 공격 및 상륙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거리가 보다 가까운 군사 거점이 필요했다. 필리핀 북단에서 규슈 남단까지의 거리만 1,600㎞가 넘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괌, 사이판으로부터 일본 본토까지의 거리는 2,000km가 훨씬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령이었던 대만과 오키나와에 주목하였다. 이 중에서도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장소는 오키나와였다. 사실 연합군은 일본 침공을 위한 거점으로 오키나와가 아닌 대만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대만은 오키나와보다 수십 배 이상의 면적을 가진 큰 섬이었지만, 대만 섬 북단에서 규슈 남단까지의 거리가 1,000여 ㎞에 달했다. 오키나와 북단으로부터 규슈 남단까지의 거리가 500여 ㎞임을 감안하면, 두 배가 넘는 거리였다. 결정적으로 1944년 일본 제국 육군이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을 통해 중국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중국 남부를 장악하면서, 대만이라는 선택지는 연합군 수뇌부의 손에서 멀어져 갔다. 대만은 중국군과의 협조에 유리하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졌고 연합군 수뇌부가 대만에 주목한 이유도 이와 관계가 많았는데,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군이 수십만 명의 손실을 기록하며 광대한 영역을 상실하는 등 졸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중국군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 본토의 공격에 앞서, 그 전초기지가 될 오키나와 점령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는 항만 시설과 비행장 설치는 물론 대규모 병력의 장기간 주둔에도 유리한 섬이었고, 실제로 오키나와에는 항만, 비행장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 본토와의 거리도 가까웠다. 때문에 오키나와를 점령한다면 미군은 폭격기를 출격시켜 일본 본토를 직접 공습할 수 있는 거점은 물론, 다운폴 작전의 실시를 위한 지리적 거점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 합참은 1944년 10월부터 오키나와를 비롯한 류큐 제도 점령을 위한 작전을 구상 및 계획하기 시작했다.
대본영 역시 상기한 조건을 갖춘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리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1943-44년에 일본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대본영은 오키나와 방어를 위해 육군 제32군을 편성했다. 육군 병력 약 7만 명으로 구성된 제32군 사령관에는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 1887-1945) 중장이 임명되었다. 우시지마는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 제국군이 미군 등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해안에서의 미군 섬멸 작전이 아닌, 오키나와 내륙으로 미군을 유인한 다음 내륙으로 진격한 미군을 섬멸한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미군이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해안에서 미군의 상륙부대를 섬멸한다는 계획은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해안에서 미군을 격파하려는 시도는 미 해군의 함포사격과 항공기의 폭격에 무력화되기 쉬웠고, 실제로 1943년 이후 일본 제국군의 미군에 대한 상륙 거부 시도가 일본 제국군의 피해만 누적시킨 채 실패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우시지마는 석회암 지형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섬의 지형을 활용하여,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을 함포나 항공기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내륙으로 유인한 다음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석회암은 화강암이나 편마암 등에 비해 내구성이 약하지만, 그 특성상 지하 요새나 기지를 급조하기에는 오히려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석회암이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약하다고는 하나, 미군의 포격이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를 구축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구스쿠 시대에 설립된 오키나와의 구스쿠 석성들, 그리고 류큐 왕국의 왕궁이었던 슈리(首里) 성도 석회암을 활용하여 축성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역시 노르망디 해안이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는 하지만 비행장이나 숙영지를 신속하게 건설하는 데는 오히려 효과적인 석회암 지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 지점으로 선정하였다. 우시지마는 석회암 지형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그중에서도 인구 밀집지대이고 도시가 발달해 있으면서도 석회암 산지로 이루어진 섬 남동부 일대를 요새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오키나와, 특히 남동부 일대는 미군의 상륙 거부를 위한 거대한 요새로 탈바꿈했다. 오키나와 섬의 요소마다 일본 제국군의 지하 동굴 요새와 벙커가 건설되었고, 화포와 대전차포 등이 동굴 요새 속에 배치되었다. 오키나와의 방어선과 요새는 인구가 밀집하고 도시가 발달해 있던 섬 남부에 주로 구축되었다.
아울러 대본영은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미군의 상륙을 지원할 해군 함정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규슈에서도 가미카제, 가이텐 등을 발진시키는 자살 특공을 계획 및 실시하였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이었기 때문에, 전투함뿐만 아니라 물자와 보충 병력을 수송할 수송선 및 보급함까지도 자살 특공을 통해 격침시킴으로써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의 전투력을 최대한 약화시킨다는 계산이었다.
오키나와에는 제32군 외에 9천 명 정도의 해군 병력도 배치되어 있었다. 오키나와에는 약 8-9만 명의 일본 제국군 병력이 배치된 셈이었다. 게다가 오키나와의 민간인들 역시 의용군이라는 허울 아래 일본 제국군의 노무부대 및 전투부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의 수는 2-3만 명에 달했다. 심지어 일본 제국은 미성년자인 오키나와의 학생들마저도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 남학생), 히메유리 학도대(ひめゆり学徒隊: 여학생) 등과 같은 소년병 부대로 편성하여 전투에 동원하였다. 1,800명에 가까운 남학생들이 철혈근황대에 지원병이라는 명목 하에 배치되었고, 200명이 넘는 여학생들이 히메유리 학도대에 소속되어 부상병 간호 등 후방 업무 등에 동원되었다. 이로서 우시지마는 오키나와의 일본 제국군 병력이 7만 명 전후일 것이라는 미군의 예측과 달리, 12-3만 명에 달하는 병력-물론 그중 상당수는 정규군에 비해 전투력이 부족한 징발된 오키나와인 병력 및 전투력 문제에 앞서 윤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소년병이었지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군은 오키나와 점령을 위해, 육군과 해병대 병력 약 18만여 명으로으로 구성된 제10군을 편성했다. 제10군 사령관에는 알래스카 방어를 지휘하며 알류샨 열도 탈환 작전 등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던 사이먼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Jr., 1886-1945) 중장이 임명되었다. 3개의 해병 사단들은 제3상륙군단으로, 4개의 육군 사단들은 제24군단으로 편성되었다. 오키나와 점령 작전인 빙산 작전(Operation Iceberg)에 따라 제3상륙군단은 오키나와 북부를, 제24군단이 오키나와 남부를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일본 제국군을 효과적으로 제압 및 격파하고 조기에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 제10군에는 전력 강화를 목적으로 수백 대의 전차와 화포 등의 중화기, 중장비들이 배치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제국군 예하 제32군과 달리, 미 제10군은 강력한 화력을 갖춘 정예 부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합군은 오키나와 전투에 상륙할 미 제10군을 엄호하고 함포 사격 및 항공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 및 항공 전력 또한 편성하였다. 연합군은 상륙부대를 상륙시키기 위한 상륙함과 물자 보급을 위한 보급함은 물론, 함포 사격과 항공 지원, 그리고 일본 제국군의 공격으로부터 육해군 전력을 호위하기 위한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등으로 이루어진 9개의 기동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들 기동부대는 미 해군 함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영국군 역시 5척의 항모와 2척의 전함을 비롯한 다수의 함정을 투입하였으며 이외에 호주 해군 함정들도 참여하였다. 항모 77척(경항모 및 호위항모 포함), 전함 9척을 비롯한 무려 1,500척에 가까운 함정을 보유한 연합군 해군 기동부대의 총사령관으로는, 미 해군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대장이 임명되었다.
미 제10군의 선발대는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오키나와 인근의 게라마 섬에 상륙했다. 오키나와 상륙 및 전투를 위한 거점 확보가 목적이었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게라마 제도 점령에 성공한 미군은 이 섬에 방치되어 있던 약 300척의 신요를 폐기한 뒤, 오키나와 상륙을 위한 전진기지를 설치했다. 이어서 4월 1일에는 미군 상륙부대가 오키나와에 서부 해안에 상륙했고, 4월 5일에는 후속 부대가 오키나와 섬에 상륙해서 오키나와 섬의 남북을 분단시켰다. 일본 제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4월 초까지 미 제10군 병력은 일본 제국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섬의 남북을 분단한다는 작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제3상륙군단의 해병대 병력은 섬 북쪽으로, 제24군단의 육군 병력은 섬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참혹했던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진,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와도 같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오키나와 상륙이었다.
오키나와 북부로 진격한 미 해병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북진을 계속했다. 4월 13일에 이르러 미 해병대는 일본 제국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대부분 격퇴하고, 섬 북부를 대부분 장악하였다. 하지만 오키나와 북부는 애초에 인구 밀집지역이 아니라 도시 등이 발달하지 않았고, 일본 제국 제32군의 병력이나 방어 시설의 배치 역시 섬 북부에는 중점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제32군이 오키나와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에도 고르게 배치되어 있었다면 미 제3상륙군단과 제24군이 북부와 남부의 제32군 병력을 각개격파함으로써 전투가 보다 적은 희생으로 일찍 끝났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 제10군의 오키나와 상륙 이후 기동 과정은, 결과적으로 전력의 공간적ㆍ지리적 분산을 초래한 부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미 제24군단의 육군 병력은 해병대와 달리, 상륙 이후 일본 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적지 않은 손실을 강요당해야 했다. 4월 초 미군은 오키나와 서부 마치나토(まちなと)에서 오키나와 최대 도시이자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나하(那覇) 사이에 형성된 마치나토 방어선에서 일본 제국 제32군 병력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구릉과 산악 지형을 따라 축성된 지하 요새와 방어 시설을 활용한 일본 제국군의 저항에, 미군 병력은 무려 3주 가까이 마치나토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항공기의 공습과 화포 및 전차, 함포의 포격은 지하의 동굴 요새에 숨어서 저항하는 일본 제국군을 소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미군 보병들은 화염방사기를 동원하여 일본 제국군 병력이 숨어 있던 지하 요새를 파괴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 장병들도 적지 않았다. 미군은 특히 옛 류큐 왕국의 왕성이자 일본 제국 제32군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던 슈리 성 북쪽 약 3-4km에 위치한 가카즈(嘉数) 능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마치나토 방어선, 특히 가카즈 능선 전투에서 미군이 고전하는 모습을 지켜본 우시지마는, 4월 12일 미군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였다. 마치나토 방어선에서 손실이 누적된 데다 사기까지 떨어진 미군에게 기습과 역습을 가한다면, 이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사실상 고립된 상태였던 일본 제국군과 달리, 미군은 예상외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해상 보급로를 통해 병력과 장비를 보충받을 수 있었다. 해병대 병력도 섬 남쪽에서 전투를 벌이던 육군 병력과 합세했다. 화포, 전차 등의 중장비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 제국 제32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무엇보다 해군 함정과 항공 전력의 지원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우시지마는 지형의 이점과 동굴 진지 등을 활용하여 방어전에서 미군을 상대로 상당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미군을 상대로 한 공격에서는 이 같은 이점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다. 결국 우시지마는 항공기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던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적지 않은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채, 역습에 실패하고 말았다. 4월 25일 우시지마는 마치나토 방어선을 포기하고, 슈리 성 일대로 휘하 병력을 퇴각시켰다. 이어서 미 제10군은 슈리 성 인근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우시지마는 5월 4일 미군이 슈리 성 인근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크게 누적되었으리라고 판단하고 전황의 타개를 위해 대규모의 2차 역습을 감행했지만, 오판이었다. 마치나토 방어선에서의 역습과 마찬가지로, 미군은 누적되는 손실을 보충해 가며 강력한 화력과 장비를 앞세워 우시지마의 역습을 격퇴하였다. 미군과 달리 병력과 물자를 제때 보충할 수 없었던 우시지마 휘하의 제32군 병력은 이미 기존의 전투로 인해 약체화되어 있었고, 미군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약체화되어 격파할 수 있으리라는 우시지마의 오판에 따른 공세는 제32군의 전력을 크게 소진시키고 말았다. 슈리 성과 인근의 진지에서도 제32군 장병들은 동굴 요새에 숨어 저항하며 미군들에게 중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누적되는 손실 속에서도 미군은 항공 지원과 중화기를 앞세워 진격하며 일본 제국군 진지를 하나하나 점거 또는 파괴해 갔다. 이 와중에서도 미군이 화염방사기를 동원해서 일본 제국군의 동굴 진지를 불태우고, 진지 속의 일본 제국군이 전진하는 미군을 사살하는 참극은 되풀이되었다. 우시지마의 역습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미군은 함포 사격 및 항공기의 공중 지원을 받아가며 슈리 성으로 진격을 계속했고, 우시지마는 5월 21일 연합군의 공습과 함포 사격에 노출된 슈리 성을 포기하고 오키나와 남서쪽에 위치한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슈리 성을 수비하던 제32군의 잔존 병력이 5월 말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미 해병대원들이 5월 30일에 슈리 성에 성조기를 게양하면서 슈리 성은 미군의 손에 들어갔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석성만 남긴 채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슈리 성은 2차대전이 끝난 지 50년 가까이 지난 1992년에야 복원되었지만, 2019년의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슈리 성 함락이 오키나와 전투의 종결로 직결되지는 못했다. 슈리 성을 버리고 오키나와 남쪽 산악 지대로 퇴각한 일본 제국 제32군의 잔존 병력은 저항을 지속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협박하여 전투에 강제 동원하거나 이들을 대상으로 약탈, 방화, 강간, 살인 등의 전쟁 범죄를 일삼았다. 제32군의 잔존 병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도 미군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6월 8일에는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이 일본 제국군 잔존병의 포격에 의해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1개월 여에 가까운 미군의 소탕전 끝에,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7월 2일에야 완전히 종료되었다. 미군은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75,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장성급 장교인 버크너 중장, 그리고 육군 제96사단장 클로디어스 이즐리(Claudius Miller Easley, 1891-1945) 준장도 전사하고 말았다. 이 두 장성급 장교는 공히 일본 제국 제32군 잔존 병력 소탕 작전이 이루어지던 6월에 전사하였다. 슈리 성 함락 이후에도 일본 제국군이 오키나와 남부의 산악 지대에서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미군이 이들의 소탕에서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제32군은 전멸했고, 우시지마를 비롯한 장성급 장교들은 자살했다. 제32군 장병들 외에 수만 명의 오키나와인들 역시 목숨을 잃었고, 그중 상당수는 일본 제국군이 저지른 각종 전쟁 범죄의 희생자들이었다.
한편 오키나와 인근의 해상에서도 연합군과 일본 제국군 간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대본영은 오키나와에서 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천1호(天1號) 작전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의 상징이자 자랑거리였던 세계 최대 규모의 전함 야마토(大和) 호를 비롯한 다수의 전함과 순양함 및 호위함들로 구성된 함대를 출격시켰다. 이미 1944년에 사실상 전력이 와해되고 항모전력을 상실한 일본 제국 해군으로서는 사력을 쥐어짠 최후의 공세에 나선 셈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함대로 수십 척이 넘는 항모를 포함하여 1,5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한 연합군 해군과 의미 있는 전투를 벌이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본 제국 함대는 항모를 완전히 상실하여, 연합군 함재기들의 공습에 대처할 수단이 사실상 없는 상태였다. 항모와 항공기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전함이 함재기의 공습에 얼마나 취약한가는, 1942년 초반 영국 동양 함대 소속의 신예 전함 2척이 일본 제국군 항공기의 공습을 당해 무력하게 침몰되었던 사례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역으로 일본 제국 함대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였다. 일본 제국 함대는 오키나와 근해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4월 7일 미 해군 제58기동부대의 공격을 받아 야마토 호를 비롯한 전함들이 격침당하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일본 제국 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伊藤整一, 1890-1945) 중장 역시 작전 중지를 명령한 뒤, 침몰하는 야마토 호에 끝까지 남아 전사하였다. 이미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 제국 해군 함대는, 오키나와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지신들의 앞마당이라고 할 만한 규슈 앞바다에서 오히려 미 해군의 역습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미 해군 제58기동부대는 일본 제국 해군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인해 몇 척의 함정들이 손상되기는 했으나, 일본 제국 함대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데 비하면 그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일본 제국군의 자살 공격은 천1호 작전보다 훨씬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오키나와의 미 해군을 격퇴하기 위해 규슈 등지로부터 1,800대가 넘는 가미카제를 출격시켰다. 가이텐, 신요 등은 느린 기동성, 운용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전에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측면도 많았고 이로 인해 우시지마는 게라마 섬에 300척이나 되는 신요를 방치했지만, 빠른 속도로 기동하며 연합군의 함정에 돌진하는 가미카제는 달랐다. 폭탄과 연료를 실은 항공기가 빠른 속도로 함정에 충돌한다면, 그 함정은 중대한 손실을 입기 쉬웠다. 비록 정규항모가 아닌 소규모의 호위항모였다지만,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가미카제 공격을 받아 수 척의 항모를 상실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오키나와 해역에서 미 해군은 일본 제국 전투기와 폭격기, 뇌격기의 엄호를 받으며 함정으로 돌진하는 가미카제를 미리 격추시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제해권뿐만 아니라 제공권까지 연합군이 장악한 데다 연합군 함정의 방공 요원들이 필사적으로 가미카제의 격추를 위해 노력한 덕에 가미카제로 인해 격침당한 연합군 함정은 20여 척에 그쳤고, 항모나 전함 등 주력 함선의 격침은 없었다. 일본 제국군이 1,800대가 넘는 가미카제 항공기를 출격시켰음을 감안하면, 이 비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자살 공격은 일본 제국의 항공기와 고급 인력인 조종사들만 희생시켰을 뿐 연합군 해군에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도 못한 셈이었다. 하지만 가미카제를 상대했던 연합군 해군 장병들, 특히 가미카제의 공격을 받은 함정의 승무원들은 심각한 공포와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렸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가미카제 공격에 직면했던 연합군 장병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문제는, 정신과 의학계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질 정도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 제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오키나와 섬을 요새화한 우시지마의 방어에 직면하여,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손실을 입었다.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을 비롯한 장성급 장교들마저 다수 전사했다는 사실은 미군의 손실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75,000명에 달하는 미군 사상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로 미군과 정부를 경악시킬 정도였고, 200대가 넘는 미군 전차도 일본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파괴당했다.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일본 제국군을 상대로 투입된 지상군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리고 일본 제국군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물론 그 대가로 일본 제국 제32군은 전멸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역에서 사실상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고, 오키나와를 상실한 일본 제국이 직면한 운명은 미군의 전략 폭격 강화와 본토 상륙 실시였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투의 진정한 피해자는, 미군도 일본 제국군도 아닌 오키나와인들이었다. 일본 제국군은 오키나와인들에게 미군에게 생포당하면 극심한 고문, 집단 강간 등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 종국에는 살해당한다는 식의 세뇌 교육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제국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군에 의한 가혹 행위와 전쟁 범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집단 자살하는 오키나와인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제국군은 오키나와 원주민들을 상대로 살해, 약탈, 방화,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심지어 ‘황군의 명예’와 ‘옥쇄’라는 허울 하에 오키나와 원주민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군대의 지휘관이 패전의 책임을 지거나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살하는 일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결’이라 미화할 소지가 있을는지는 몰라도, 아무런 죄도 없는 오키나와인들에게까지 ‘옥쇄’라는 허울로 자살을 강요한 일본 제국군의 행태는 누가 보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전쟁범죄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게다가 오키나와에는 식민지 조선 출신의 징용 노동자들과 종군위안부들까지도 다수 끌려와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인들, 특히 종군위안부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 성노리개로만 바라보았던 일본 제국 제32군 장병들이 저지른 극심한 학대와 폭력, 성범죄에 시달려야 했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이 벌인 전투 때문에 오키나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미군의 행보는 오키나와인들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하기까지 한 일본 제국군의 행보보다는 당연히 나았다. 적어도 미군은 오키나와인들을 민간인으로 대했고, 오키나와 전투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던 그들에게 식량과 의약품 등을 제공했다. 전쟁을 이유로 공공연하게 오키나와인들의 인신이나 재산을 무단으로 갈취하거나 착취하는 일도 없었다. 일본 제국군의 세뇌로 인한 오키나와인들의 집단 자살 시도를 막고 이들의 목숨, 그리고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들의 목숨을 구한 미군 장병들의 미담 사례도 적지많은 않다. 하지만 미군 또한 오키나와 원주민들에 대한 폭행, 성범죄 등의 전쟁범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만은 않다. 일부 미군 장병들 역시 오키나와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비록 조직적으로 오키나와인,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를 학대하고 살해했던 일본군과 달리 미군의 전쟁범죄는 일부 장병들의 일탈 행위였고 그 규모도 훨씬 작았다고는 하나, 그리고 미군은 일본 제국군과 달리 일부 장병들의 전쟁 범죄 행위를 중범죄로 엄히 다스렸다고 하나, 이 역시 오키나와인들에게는 씻기 힘든 상처를 주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오키나와인들이 한국의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협력하는 모습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어났던 극심한 전쟁범죄와 결코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태평양에서 오키나와가 갖는 전략적,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지한 미국은 오키나와를 1972년까지 신탁 통치하면서 오키나와를 미국의 태평양 방면 군사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신탁 통치를 주관한 미 군정에 대한 오키나와인들의 반발 끝에 오키나와는 미국의 신탁 통치령에서 벗어나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지만,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는 여전히 일본에 반환되지 않고 있으며, 미군은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 유사시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에 스텔스 폭격기 등의 전략 자원을 우선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오키나와의 주일 미군에 의한 대민 범죄는, 오늘날까지도 오키나와는 물론 일본 사회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제국군이 보여준 극심한 저항과 예상을 뛰어넘는 미군의 인명 피해는, 2차대전 말기에 급서한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 정부를 경악시켰다. 몰락 작전에서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리라는 예측도 있었거니와, 슈리 성이 함락된 뒤에도 1달 이상 저항을 지속하며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을 비롯한 장성급 장교들까지도 전사시켰던 일본 제국군의 행태는 트루먼에게 막대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점에서 오키나와 전투는 트루먼 정부가 몰락 작전 대신, 일본 본토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라는 선택지를 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오키나와 전투가 몰락 작전의 연기/취소 및 원자폭탄 투하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그리고 몰락 작전이 완전히 취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군의 극단적이고 격렬한, 그러면서도 무의미했던 저항이 이들의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터져 나온 장소였던 오키나와는, 이로 인해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장소가 되었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오키나와는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많은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오키나와를 찾고 있다. 그런 오키나와는 한편으로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 전투라는 전쟁의 참상을 재현한 전쟁 기억의 장소,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도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이다. 이 공원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로, 공원 내부에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오키나와 곳곳에는 일본 제국군에 의해 오키나와인들이 학살당한 장소, 오키나와 전투에서 격전이 이루어진 장소 등이 전쟁의 참상을 보존하고 기억하기 위한 장소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장소를 방문함으로써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참혹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다크투어리즘 역시, 오키나와 관광 산업에서 적지만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 제국군의 격전이 벌어진 수준을 넘어,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전쟁범죄의 피해를 당하고 학살당했던 전투이기도 하였다. 이는 사쓰마 번의 오키나와 침공 이후 일본 본토로부터 막심한 차별과 착취는 물론 문화 말살 정책의 피해까지 입었던 오키나와의 역사 및 정체성과 겹쳐지면서, 오키나와라는 장소에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갈망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였다.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 전투가 미국과 일본 제국 간에 일어난 전투에 그치거나 '대일본제국 황군의 애국심과 희생'으로 변질되는 일을 막고 그들의 희생과 억압, 차별이 온당하게 기억 및 보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1975년 개관 당시 일본 제국군의 '천황을 위한' 희생을 찬미하는 성격, 오키나와인을 배제하는 측면이 강했던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이 일본 제국군의 전쟁 범죄와 오키나와인들의 비극, 희생을 재현하는 평화교육의 장소로 변모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 같은 오키나와인들의 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조성윤, 2011). 일본군 종군 위안부 문제, 제주 4.3 민주항쟁 등에 대한 공감을 토대로 한국인들과의 연대를 시도하고 실천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모습, 그리고 전쟁의 참상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문학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맥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둘러싼 오키나와라는 장소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일부 극우 세력과 정치인들은 오키나와에 재현된 전쟁의 참상과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를 탈색 및 은폐하고, 오키나와를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ㆍ미화하는 장소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설치된 주일미군 기지를 둘러싼 갈등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가 한일 간의 과거사를 치유하기 위한 협력과 화해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고는 하나 오키나와 문학에 재현된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타자화된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도 다분하다는 비판 또한 제기되고 있다(소명선, 2016). 이러한 점에서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지 7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오키나와 전투가 오키나와라는 장소에 남긴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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