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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Apr 08. 2021

소련군의 민주 진격과 한반도 분단의 지리학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한반도의 분단을 불러온 소련군의 만주 진격의 지리학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2차대전의 유럽 전역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은 오키나와에 이어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200㎞ 떨어진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의 이오지마(硫黃島)까지 점령하였고, 도쿄에 연일 전략 폭격을 감행하였다. 일본 제국의 패망은 사실상 눈앞에 왔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일억총옥쇄'를 외치며 항복 대신 결사 항전의 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여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죽창술을 훈련시킬 정도였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조차 자살 공격에 나서는 일본군의 행태를 수도 없이 겪어왔던 미군이 다운폴 작전을 통한 일본 본토 상륙 대신 원자폭탄 투하를 선택한 까닭에는, 다운폴 작전을 실시할 경우 미군의 인명 피해만 100만 명을 초과한다는 예측도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소련 중립 조약은 1945년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상태였다. 일본-소련 중립 조약 덕분에 일본 제국은 중국과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소련은 극동군 병력까지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키며 국가적 존망이 걸린 위기였던 독-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국제 정세와 지정학적 관계는 급변했고, 동부전선의 위협이 완전히 소멸한 상황에서 일-소 중립 조약은 소련에게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 전쟁의 조기 종전을 위해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요구했다. 한편으로 대본영을 비롯한 일본 제국 군부 내에는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이용하여 미국에 대한 항전을 지속하자는 주장을 하는 장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차대전 종전 후 국제 질서와 지정학적 질서의 기초는 이미 얄타 회담에서 결정되었고, 이미 승전국의 지위와 권리를 확보한 스탈린이 일본 제국 군부 내의 항전파 장교들이 가졌던 희망사항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를 침공했고, 이미 일본 본토가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데다 그전에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된 관동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순식간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 결과 관동군과 만주국은 소멸했고, 소련군의 만주 침공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더불어 일본이 패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까지 진주하면서, 소련군의 만주 침공은 한반도가 분단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관동군은 '무적의 관동군'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 제국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였다. 만주는 일본 제국의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1920-30년대 일본 제국은 관동군에 많은 투자를 하여 정예 부대로 육성했다. 관동군은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축적하며 중국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관동군은 중국뿐만 아니라 소련 방면으로의 영토 확장까지 꾀하며 소련-만주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과 수 차례의 교전(노몽한 사건, 장고봉 전투 등)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1930년대의 관동군은 말 그대로 '무적의 관동군'이라 불릴 만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주의 전략적ㆍ지정학적 가치로 인하여, 관동군은 막강한 정치적 권력까지도 손에 넣고 있었다. 관동군 사령관은 일왕의 명령을 직접 받는 위치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일본 육군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정도였다. 특히 만주국 건국 이후 관동군이 만주국의 권력을 사실상 장악함에 따라, 권력을 얻은 관동군의 독단과 전횡은 더욱 심해져 갔다. 애초에 만주 사변, 그리고 중일 전쟁의 단초가 된 루거우챠오 사건은 관동군 장교들의 독단에 의해 일어났다. 그리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관동군 장교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며 진급하기까지 하였다. 한편으로 관동군은 전쟁범죄 집단이기도 하였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부터 관동군 소속이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간도 특설대 역시 관동군에 속했다. 관동군은 중국 북부와 만주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와 중국군 포로들은 물론, 민간인들 상대로도 무수한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하지만 1945년의 관동군은 전성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약체화되어 있었다.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 제국군이 수세에 몰린 데다 중국 본토에서의 전쟁 또한 장기화되면서, 우수한 병력과 장비들이 관동군이 아닌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대로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관동군은 만주의 치안을 유지하며 소련군을 견제한다는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일-소 중립 조약으로 인해 소련과의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격전을 치르고 있던 태평양이나 중국 전역과 달리 병력과 장비의 수준은 약체화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몰락 작전이 임박하자, 대본영은 관동군 병력 일부를 한반도와 일본 본토로 차출하여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하도록 조치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동남아시아나 중국 등지에서 전투에 패하거나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장교가 보복성 인사로 관동군에 배치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때 일본 제국의 자랑이었던 최강의 정예부대가, 시간이 흐르고 태평양 전쟁 및 중일 전쟁의 전역과 전장 공간이 바뀌면서 무능하거나 중대한 실책을 범한 장교들의 좌천지로까지 전락한 셈이었다. 비록 1945년 8월 초반의 시점에서도 관동군은 만주국 등 괴뢰국 병력을 합쳐 1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고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과 샤오싱안링(小興安嶺) 산맥, 쑹화(松花) 강 등의 자연 장애물과 만주국의 깊은 종심을 활용하여 소련군을 방어할 계획도 세워둔 상태였지만, 나치 독일군과의 숱한 전투로 단련된 데다 장비의 양적ㆍ질적 수준까지 압도적인 소련군의 대공세를 감당하기에는 이미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관동군 자체도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되었지만, 만주군을 비롯한 괴뢰국 군대의 전력은 치안 유지나 게릴라,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을 소탕할 정도에 그쳤고 소련군과 본격적인 교전을 벌이기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만주국의 지형도. 소련과의 국경 지대에는 북서쪽의 다싱안링 산맥 험준한 산맥이 분포했고, 내륙에도 호소, 하천, 삼림 등의 천연 장애물이 다수 분포했다.(Leventhalmaps)

  일-소 중립 조약은 소련과 일본 두 나라에게 절실하게 필요했고, 실제로도 지정학적으로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소련은 일본과의 중립 조약 덕택에 독-소 전쟁이라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서 동아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고,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고 역습을 가하여 종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주코프, 바실렙스키 등이 동아시아에 배치된 극동군 병력까지 동원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렸던 스탈린그라드의 전황을 극적으로 역전시키고 나치 독일 제6군을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일본 제국 역시 일-소 중립 조약을 체결한 덕에 태평양과 중국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며 태평양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소련과 일본은 각각 동방(동부전선)과 남방(태평양 전역)에서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맞댄 상대국의 위협을 어떻게든 방지해야 한다는 두 나라의 지정학적 절박함 때문에 독-소 불가침 조약과 달리 일-소 중립 조약이 대전 말기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에서 추축국의 패망이 기정 사실화되자, 일-소 중립 조약의 가치는 크게 저하되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성기 때에야 이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던 소련에게 일-소 중립 조약은 당연히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나라가 패색이 짙어지다 못해 패망이 기정 사실화된 상황에서, 굳이 소련이 일본 제국과 중립 조약을 유지할 필요성은 희박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소 중립 조약의 유지는, 소련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아시아 방면에서도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소지조차 다분했다. 게다가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소련에게 일-소 중립 조약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단순히 필요가 없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이 이미 무조건 항복했고 일본 제국도 제해권을 상실한 채 미군 폭격기들이 연일 본토의 주요 도시와 산업 시설들에 전략 폭격을 가하던 이 무렵의 상황은, 종전이 기정 사실화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독-소 전쟁에서 다른 2차대전 참전국들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덕분에 연합군 내부에서도 큰 발언권을 얻는 데 성공한 소련의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서의 전후 처리 문제는 절대로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얄타 회담을 통해서 연합국은 일본 본토를 제외한 만주국 등 1차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무력으로 획득한 영토를 해방하고 쿠릴 열도를 소련령으로 귀속시킨다는 결의를 도출했지만, 스탈린은 이 정도의 합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런 필요도 가치도 없어진 일-소 중립 조약에 얽매이는 대신, 대일 전쟁에 참전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최대한 확보한다는 것이 스탈린의 의도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와 달리 태평양 전쟁은 미국이 주도했고 영연방군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소련군이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까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과 발언권은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943년 하반기에 열렸던 카이로 회담 및 이어진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한반도와 만주국을 비롯한 일본 본토를 제외한 영역의 해방, 만주의 중국 반환과 한반도의 독립 및 일정 기간 동안의 신탁 통치 등을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영역이나 역할 분담까지 합의되지는 않았다. 더욱이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지역을 지배하고 통제할 권한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분할 통치의 대상도 아니었고, 만주, 중국, 한반도 등지에서 확실한 권리를 보장받지도 못했다.

  따라서 소련이 전후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및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일전쟁에 참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발언권을 충분히 확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아시아에 친소 국가 등을 수립하여 소련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태평양 전쟁의 조기 종전을 위해 얄타 회담 등을 통해 소련에게 대일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는 사실은, 스탈린에게는 더없는 호재였다. 대일 참전의 명분을 미국이 스스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45년 4월 5일,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을 통해 일-소 중립 조약의 연장 불가 의사를 통지했다. 이로써 일-소 중립 조약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이와 동시에 스타프카는 만주 침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스타프카는 소련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독-소 전쟁에서 소련군을 지도했던 바실렙스키 원수를 만주 침공을 지휘할 극동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독-소 전쟁 기간 동안 비교적 약체화되어 있던 극동군의 전력 증강을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 등을 통하여 대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극동군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따라 극동군 사령부 예하에는 5개 야전군과 1개 항공 야전군으로 구성된 자바이칼전선군(사령관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1898-1967) 원수), 4개 야전군과 1개 항공 야전군으로 구성된 제1극동전선군(사령관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1968) 원수), 그리고 3개 야전군과 1개 항공 야전군을 거느린 제2극동전선군(사령관 막심 알렉세예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1894-1953) 대장)의 3개 전선군이 편성되었다. 총병력은 150만 명을 넘었다. 28,000문이 넘는 화포와  5,000대 이상의 전차, 3,700대가 넘는 항공기가 배치된 강력한 대군이 만주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외에 1-2만 명 규모의 몽골 인민공화국군 병력도 자바이칼군을 지원하며 만주 침공에 참전하였다.

소련 극동사령부의 만주 침공 계획(위키피디아)

  1944년에 접어들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패색은 완연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한때 태평양을 석권하다시피 했던 일본 제국 해군은 1944년 중-후반에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고, 육군 역시 필리핀, 사이판, 괌, 버마 등지에서 연패하며 1942년에 확보했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영역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미 전시 체제 전환을 완료한 미국은 막대한 경제 및 산업 능력을 동원하여, 전쟁 초기 일본 제국군에게 상실한 전력을 복구하는 수준을 넘어  개전 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 증강에 성공했다. 반면 일본 제국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복구하지 못했다. 1942-3년을 거치면서 약화되기 시작한 일본 제국 해군의 항모 전력은, 1944년에는 사실상 소멸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1944년에 후반기에 접어들면 대본영도 일본 제국군의 승산이 없음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때문에 종전을 위한 시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대본영, 그리고 일본 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종전의 필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이라는 선택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미군과의 전력이 어느 정도 대등에 가깝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전력의 격차가 확연해진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제국은 종전은 고려했지만 항복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위대한 ‘신주(神州)’가 항복한다는 치욕은 감내할 수 없었고, 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했던 일왕이 항복하거나 퇴위하는 일은 더더욱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황이  현저하게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제국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연합군에게 ‘옥쇄’할 각오로 항전을 지속한다면, 일본 제국이 항복의 치욕 대신 연합군과의 강화를 통한 ‘명예로운’ 종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대전 말기 일본 본토에서는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신주'와 일왕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민간인은 물론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총검술과 죽창술 훈련을 시키는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전쟁 준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정치지도자들과 대본영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소련, 그리고 일-소 중립 조약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태평양 방면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대본영과 일본 제국 정치지도자들은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통해 미군의 일본 본토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고까지 믿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관동군 등 소련-만주 방면의 병력까지 활용하여 미군과의 결전을 치른다는 식의 믿음이었다. 심지어 소련과 양보하여 만주를 내주고, 대신 소련과 미국 간의 전쟁을 유도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안위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까지도 일본 제국 군부와 정계의 수뇌부들 사이에 퍼져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얄타 회담을 통해 이미 전후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를 구상해 둔 연합국 수뇌부의 의도, 그리고 전후 유럽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노렸던 스탈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소련이 일-소 중립 조약 파기를 통지하자, 대본영과 일본 정계의 지도자들은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소련을 이용하여 미국의 본토 상륙과 침공을 막아낸다는 대본영의 전략이 완전히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소련의 만주 침공이 기정 사실화된 이상, 관동군은 약체화된 전력을 동원해서라도 방어 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관동군은 1930년대에 이미 소련-만주 국경 지대의 다싱안링 산맥, 소싱안링 산맥과 같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소련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 호소, 습지, 삼림, 사막 등이 발달한 만주 내륙으로 종심 깊이 유인하여 격파하고, 이후 역습을 가하여 바이칼 호 일대까지 진격한다는 대소 작전 계획을 세워둔 바 있었다. 이에 따라 다싱안링 산맥 등지에는 소련군을 격퇴하기 위한 요새 시설도 구축되어 있었다. 관동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운 소련군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 등을 보강하고 새로운 요새와 참호, 토치카 등을 축성하는 작업도 시작했다.


  극동사령부는 예하 3개 야전군을 세 방면에서 진격시켜 만주의 주요 도시와 거점을 장악하고, 관동군의 항복과 소멸을 강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주공인 자바이칼전선군은 몽골 방면에서 진격하여 다싱안링 산맥을 돌파한 뒤,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 오늘날의 창춘(長春))까지 진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1극동전선군은 만주국의 후방이라 할 수 있었던 연해주 방면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감행한 뒤, 자바이칼전선군과 창춘을 협격하여 함락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제2극동전선군은 만주국의 북동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샤오싱안링 산맥을 돌파하고, 헤이룽(黑龍) 강 인근의 치치하얼(齊齊哈爾)과 하얼빈을 함락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해서 만주국과 만주군의 통치 및 지휘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킨 다음, 만주 전역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소련군의 만주 침공 개시는 본래 8월 중-하순 이후에나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스탈린은 만주 침공 일정을 서둘러 앞당겼다. 만주 침공 이전에 일본 제국이 항복하기라도 한다면, 소련으로서는 동아시아에서 발언권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이튿날 만주 침공을 개시하였다-이 날은 때마침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진 날이기도 하였다. 일본 제국의 예상보다도 훨씬 앞서 이루어진 소련군의 참전은, 원자폭탄 투하와 더불어 일본 제국을 경악시켰다. 이는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크게 마비시켜, 결사 항전 대신 항복을 선택하도록 하는데도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소련군의 만주 침공 경로

  소련군은 작전 계획에 따라 기갑부대를 앞세우며 만주의 관동군을 향해 종심 전술에 따른 대공세를 실시하였다. 비록 광대한 만주의 호소, 구릉, 삼림 등을 활용하여 종심 깊은 방어 계획을 나름대로 준비했던 관동군이었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를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물론 일부 부대는 선전하며 소련군에게 무시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히기도 했지만,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되었던 관동군은 소련군의 만주 침공 개시 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사실상 붕괴되었다.

   특히 다싱안링 산맥을 돌파하며 관동군의 허를 찔렀던 자바이칼전선군의 활약은 관동군의 조기 붕괴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관동군은 소련군 기갑부대가 평균 해발고도가 1,000m를 상회하는 거대하고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을 돌파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만주 침공에 앞서 만주국의 지형지물, 그리고 관동군의 방어계획과 야전 축성 등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조사하고 분석하였다. 이에 따라 자바이칼전선군 예하 제6근위전차군(사령관 안드레이 그리고르예비치 크랍첸코(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1899-1963) 상장)과 제39군(사령관 이반 일리치 류드니코프(Иван Ильич Людников, 1902-1976) 상장)은 다싱안링 산맥에 이어 아르샨(阿尔山)-카이루(開魯)를 잇는 만주국 서부의 방어선 방면을 종심깊게 돌파한다는 주공 임무를 맡았다. 자바이칼전선군 예하 항공전선군은 작전 개시와 더불어 아르샨-카이루 방어선 일대의 관동군 제44군 예하부대에 공습을 가해 방어선의 약화와 교란을 시도했다. 한편 제6근위전차군과 제39군은 관동군 병력에 대한 선제 포격을 자제하고 최대한 은밀하게 다싱안링 산맥 돌파를 진행해 나갔다. 이들은 고온건조한 8월에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을 급속 행군하며 연료와 식수 부족, 열피로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월 10-12일에는 아르샨-카이루 방어선을 우회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관동군 제107사단이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압도적인 소련군의 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제39군과 제6근위전차군이 돌파구 형성에 성공하자 제19군, 제53군 등의 후속부대들이 종심 전술교리에 따라 서쪽으로부터 만주국 영내로 종심 깊게 진격을 계속했다. 이와 더불어 제36군도 소련-만주 국경선의 북서쪽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8월 11-12일에는 만주국 서부의 관동군 방어 거점이었던 하이라얼(Hǎilār)에 육박했고, 이후 하이라얼을 우회하여 치치하얼(齊齊哈爾)과 하얼빈 방면으로의 종심 깊은 진격을 계속했다. 관동군은 기갑부대를 앞세워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을 통과하며 관동군의 주요 방어 거점을 우회하거나 격파하며 종심 깊게 진격하던 자바이칼전선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만주국 동부에서도 제1ㆍ2극동전선군이 연해주-하바롭스크 주 남부 방면(제1극동전선군) 및 하바롭스크 주-아무르스카야 주 방면(제2극동전선군)에서 종심 깊게 돌파 및 진격을 개시했다. 제1극동전선군은 한카(Ха́нка) 호-쑤이펀허(绥芬河) 구간에 펼쳐진 산악 지대를 돌파하여 신징 방향으로 진격하여 자바이칼전선군의 주력과 함께 신징을 협격 후 점령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한카 호-쑤이펀허 구간의 돌파는 제5군(사령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크릴로프(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рыло́в, 1903-1972) 상장)과 제1적기군(사령관 아파나시 파블란티예비치 벨로보로도프(Афанасий Павланть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1903-1990) 상장)이 맡았고, 제6근위전차군 및 제39군과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산악과 삼림 지대를 돌파하는데 성공한 이 두 집단군 역시 종심전투교리에 입각한 전술기동을 통해 관동군의 조직적인 저항을 분쇄하고 만주국 남동부로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8월 12일 무단장(牡丹江)에 육박한 제5군과 제1적기군은 관동군 제5군 및 제126ㆍ135사단의 조직적이면서도 격렬한 반격에 직면하여 1만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를 내고 수백 대의 전차를 상실하는 등 고전하기도 했으나, 8월 15-16일에는 관동군 병력을 섬멸하며 무단장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제1극동전선군은 만주국 남동부의 주요 축선을 장악하여 해당 지역에서 관동군의 저항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의 조공으로서 전선군의 부차적인 목표였던 한반도로의 진격 임무를 맡았다. 제25군은 광복절인 8월 15일이 되기도 전에 함경북도 나진 방면으로 진격하여 관동군 및 조선 주둔군을 격파하고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한반도 분단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제2극동전선군도 샤오싱안링 산맥을 돌파하여 치치하얼 및 하얼빈 방면으로 종심 깊은 공세를 개시했다. 주공인 제15군(사령관 스테판 마모노프(1901-1974) 중장)은 아이후이(愛琿) 방면의, 제2적기군(사령관 마카르 포미치 테료힌(Мака́р Фоми́ч Терёхин, 1896-1967) 중장)은 쑨우(孫吳) 방면의 공세를 맡았다. 이 일대는 관동군의 요새가 견고하게 축성된 데다 해당 방면을 맡은 부대들의 전투준비 태세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마모토프와 테료힌은 포격과 항공 공습을 강화하여 관동군의 요새와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 종심 공격을 지속하여 8월 17-18일에는 이들을 완전히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제2극동전선군이 자바이칼전선군과 합세하여 치치하얼과 하얼빈, 신징을 함락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관동군은 소련 극동사령부의 종심 전투 교리에 입각한 대공세를 적절히 방어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 자체가 이미 패망을 목전에 둔 데다 이미 오래전에 태평양 및 중국의 지정학적 질서 및 전장 공간의 변화로 인해 전력도 크게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되었던 관동군은, 동부전선에서의 풍부한 실전 경험과 소련의 뛰어난 공업 및 군수산업 능력의 결정체와도 같았던 종심 전투 교리에 절절히 대처할 역량은커녕 소련군 전차를 효과적으로 격파할 수 있는 우수한 전차나 대전차화기조차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개시된 지 3-4일 뒤인 8월 11-13일 무렵에는 관동군 진지들이 대부분 돌파당했고, 관동군의 전력과 전의는 크게 약화되었다. 8월 15일에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관동군의 전투의지는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통신 및 의사소통의 문제로 관동군은 소련군과 8월 19-20일까지 교전을 지속되었지만,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인 산발적인 저항에 불과했다. 8월 20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1881-1965) 대장은 소련군에게 공식 항복하였다. 이로서 관동군과 만주국은 공식 소멸하였다.

  만주 사변으로 건국된 만주국은 일본 제국에 의해 자행된 아시아 침략 전쟁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물론 일본 제국은 이미 그전에 한반도, 대만 등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지만, 아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팽창주의와 침략 전쟁은 만주 사변, 그리고 만주국 건국이었다. 이후 일본 제국은 만주국을 발판 삼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1930년대에는 소련 침공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국의 실세였던 관동군은 이 같은 일본 제국의 아시아 침략 전쟁의 선봉 부대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소련의 만주 침공에 따른 만주국과 관동군의 소멸은, 대동아공영권의 허울을 내세워 아시아를 지배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소멸을 상징한다. 이러한 점에서 1945년의 만주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패망을 확정 지은 장소,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의 허상이 소멸된 장소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스탈린은 만주 침공을 통해서, 소련군이 태평양 전역에서도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한반도 북부에 소련 육군 대위 출신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 정부를 수립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자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지정학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어서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축출하고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도 냉전 체제의 지정학적 질서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소련군에게 패배한 관동군 장병들 중 일부는, 일본 본토나 한반도, 중국 등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야마다 오토 조를 비롯한 대다수의 관동군 장병들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소련 본토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소련 영내에서 전후 복구 사업 등을 위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1950년대에야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관동군 포로들이 소련에서 겪은 수난사는 이후 일본 사회에서 태평양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다난하고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지며, 영화로도 제작된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의 주제가 되는 등 문화예술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물론 731부대나 간도 특설대 등 관동군 소속 부대들이 자행했던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나 피해 배상 등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소련군의 만주 침공은 만주국과 관동군의 붕괴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분단까지 초래하고 말았다. 일본 제국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한반도에는 자체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 조직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이 여운형, 조만식,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였다. 건준은 해방 이후 귀국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한반도에 한민족의 정부를 수립하고 완전한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에는 한반도 각지에 건준 지부들이 설립되었다. 건준의 지도자 여운형은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원활한 건국을 위해,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무사 귀국을 대가로 정부 수립 및 국가 건설을 위한 각종 정보와 자료 등을 인수인계받기 위한 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건준 위원장 조만식도 한반도에 소련군이 진주한 직후 소련군 지휘관들과 한반도의 해방을 위해 소련군 지휘관들과 면담을 가진 바 있다.

  하지만 소련군에게 한반도는 전후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점령지일 뿐이었고, 한국인들의 독립 정부 수립은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일이었다. 한반도 북부에서 남진을 계속하며 한반도 주둔 일본 제국군을 무장해제시켰던 소련군은, 평양에 군정을 설치하였다. 군정 장관에는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 사령관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챠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1900-1945) 대장이 임명되었고, 야전군인으로 정치감각이 떨어졌던 치스챠코프를 대신하여 제1극동전선군 정치장교였던 북조선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1907-1945) 중장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소련 군정의 실권을 맡았다. 한반도 북부를 점령지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던 소련군 장병들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약탈, 폭행, 강간 등의 전쟁범죄를 일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 군정은 군정 종식 이후 한반도 북부를 통치할 지도자로 소련 육군 대위였던 김일성을 추대하였다. 수십 년간 독립운동에 몸담아 오면서 한반도 북부의 주민들에게 깊은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조만식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소련군의 일개 육군 대위에 불과했던 김일성의 위상과 명망은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김무정, 김두봉, 허가이 등 김일성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독립운동에 많은 공적을 남겼던 명망 높은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한반도 북부의 지도자로 내세웠던 소련 군정의 의도는, 일개 소련군 소좌에 불과했고 독립운동가로서의 명망도 인맥도 부족했던 그를 내세워 한반도 북부를 자국의 괴뢰국 내지는 속국으로 만들려는 목적에 있었다. 김일성은 한반도 북부의 정치 무대에 등장한 직후 암살 시도까지 당하는 등 많은 반발을 샀지만, 소련군을 등에 업은 그는 결국 한반도 북부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군이 만주를 넘어 한반도까지 남하하면서, 미군 역시 한반도에 상륙하여 한반도 남부에 주둔했던 일본 제국군의 무장 해제를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방치했다가는, 자칫하면 한반도 전역이 소련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8-9월에 미국은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한반도 남부와 북부에 진주한다는 안을 제안하였고, 소련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로 인해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는 38선이 획정되었다.

  문제는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의 태도 역시 소련 군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군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자 언어학자, 문화인류학자 등을 동원하여 일본 문화를 분석하고 이해했던 미군은, 한반도에 대해서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데 소홀했다. 한반도 남부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은 미 군정의 이 같은 문제점을 잘 보여 준다. 하지는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던 용장이었지만, 정치적인 감각과 역량은 부족한 인물이었다. 한반도의 정세와 한국인들이 해방 직후 처했던 상황 등에 대해 무지했던 그는, 해방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 벌어졌던 이념 대립, 식량난 등의 갈등과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는 온갖 혼란상이 빚어졌다. 이 와중에 남한에서도 미국 박사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역임한 인물이었던 이승만이 미 군정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정치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까지 지냈던 만큼 미국에 대해 특히 우호적이었고, 미 군정과의 의사소통도 원활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과정 및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재임기의 행적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냈을뿐더러 건준에서도 대통령으로 염두에 두었을 정도의 명망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한 정계에서 권력을 얻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미 군정의 지지도 적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김일성이 실권을 잡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 출범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로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확실시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완전히 고착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 남한은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로 탈바꿈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국전쟁에서의 실패를 빌미로 박헌영, 김무정 등의 거물 정치가들을 숙청한 것을 효시로 1950-60년대에는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의 정파들을 숙청한 뒤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1990년대 초반 전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남북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냉전 체제가 여전히 지배하는 지정학적 장소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원인은, 바로 냉전 체제를 초래했던 2차대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2차대전은 수십 년 전에 끝난 전쟁이 아니라, 분단 체제라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정학적 질서와 맥락을 가져온 '현재 진행형'의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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