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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Feb 17. 2021

초한전쟁(楚漢戰爭)의 지리학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를 세웠던 역사의 지리학


이 글은 2022년 발간된 도서 “초한전쟁: 역사적 대전환으로의 지리적 접근”(흠영)의 바탕임을 밝혀 둡니다.

  () 멸망   고조 유방이  패왕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6-202)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개 건달에 불과했던 유방이  고조가   있었던 뛰어난 용인술, 다른 사람의 조언을 경청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유연한 리더십, 대국을 읽고 민심을 살필  알았던 지도자로서의 자질 등은, 역사적으로는 물론 자기 계발서 등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민심과 대국을 읽는 능력이 부족했다고는 하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수사로 널리 알려진 무용과 군사적 자질, 그리고 우미인과의 로맨스라는 극적이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진 항우 역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다루어지고 있다. 한신, 장량, 범증  초한전쟁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장수들과 책사들 또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초한전쟁의 영향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금의환향(錦衣還鄕)', '다다익선(多多益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항우장사', '파부침주(破釜沈舟)', '사면초가(四面楚歌)', '배수진' 등의 고사성어나 관용구들은 초한전쟁에 그 어원을 둔다. 초한전쟁을 다룬 중국의 고전 소설 '초한지'는 중국은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오랫동안 애독되어 왔다. '초한지(楚漢志)'는 20세기 이후에도 이문열, 정비석, 김용(金庸, 1924-2018) 등의 작가들에 의해 각색되어 출판, 애독되고 있다. 일본의 국민작가라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96) 또한 '항우와 유방'이라는 제목의 초한전쟁을 다룬 소설을 출간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장기 역시 '한(漢)'과 '초(楚)'가 새겨진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초한전쟁을 소재로 한다. 동명의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중국의 경극(京劇) '패왕별희(覇王別姬)' 또한 초한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초패왕(西楚覇王, 1994년작 영화)', '초한전기(楚漢傳奇, 2012-2013년 방영 중국  TV  드라마)' 등 초한전쟁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들도 개봉 및 방영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초한전쟁사를 살펴보면 지리적ㆍ지정학적 측면도 다분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항우가 진나라 3세 황제였던 자영을 참살한 뒤 금의환향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팽성을 도읍을 삼았던 일은 항우의 지리적 안목이 크게 낮았음을 시사한다고 해석된다. 팽성(彭城: 오늘날 중국 장쑤(江蘇) 성 쉬저우(徐州) 시 일대)은 진나라의 뒤를 이을 중국 통일 왕조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입지 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고조 유방 세력이 옛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민심을 추스르고 촉(蜀: 오늘날 중국 쓰촨(四川) 성 일대)과 한중(漢中: 오늘날 중국 산시(陝西) 성 한중(漢中) 시)을 기반으로 항우에 대항할 세력을 키웠던 사례 역시, 쓰촨의 위치와 지형 등과 같은 지리적 요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애초부터 군사력이 항우에 비해 약했고 팽성대전에서 항우에게 괴멸적인 손실을 입었던 유방 세력이 전세를 역전하여 결국 항우 세력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방의 관중(關中) 지역 장악이라는 지정학적 요인도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초한전쟁은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차이, 한신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나 장량, 소하 등의 정치적 안목 등과 같은 기존의 관점은 물론, 지리적인 측면에서 접근될 필요성 또한 적지 않다.

  본 연구에서는 지리적인 관점을 토대로, 초한전쟁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초한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국시대의 영역. 전국7웅의 일원이었던 진나라는 나머지 6국을 정벌하고 진 왕조를 세웠다.(출처: http://www.subkorea.com/)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전국7웅 가운데 자국을 제외한 위(魏), 한(韓), 조(趙), 연(燕), 제(濟), 초(楚)의 6국(이하 6국)을 정벌한 뒤, 주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동양사상 최초로 황제국을 선언하며 통일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법가 사상을 앞세운 시황제의 가혹한 공포정치와 과중한 부역, 기존의 관습법을 무시한 무리한 법치주의 시행, 그리고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강압적인 사상 탄압 등은 중국 민중과 지식인들의 반감과 저항 의식에 오히려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나라는 이미 전국시대에 등장했던 군현제(郡縣制)에 기초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시도하였다. 종법(宗法)이라는 혈연적 질서와 토지(식읍)에 기반한 분권적 통치 체제였던 주나라의 봉건제와 비교했을 때, 군현제는 중앙정부에 의해 임용되어 봉록을 받는 관료들이 각 지방을 통치하는 한층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였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영역을 36개 군으로 분할하여, 옛 6국의 영역을 통일 진 왕조의 중앙집권적 영역으로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엄격하고 체계적인 법령 체계의 도입 및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역시, 옛 6국의 상호 이질적인 영역을 통일 진 왕조의 균질적인 영역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황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을 위한 시도와 노력이, 옛 6국의 영역을 통일 진 왕조의 영역으로 완전히 재편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시황제 재위기부터 6국의 유민이나 잔존 세력에 의한 진 타도 운동, 6국 복원 운동이 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황제 사망 직후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기원전 209년)은 진나라 멸망의 신호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6국 복원 운동이 가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시황제의 뒤를 이은 2세 황제 호해(胡亥, 기원전 229년?-기원전 207년)의 실정, 권신 조고(趙高, ?-기원전 207년)의 전횡 등은 진나라의 분열과 약체화, 그리고 6국 복원 운동을 비롯한 봉기와 무장 세력의 대두를 가속화시켰다. 통일 진 왕조의 영역이 군현제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영역으로 급격하게 재편되면서, 통치 권력이 중앙 정부와 황제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했던 시황제가 재위했을 때에는 어떻게든 지방 세력의 대두와 6국 복원 운동 등을 정치권력과 군사력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능한 2세 황제 치하에서 내분과 권신의 국정 농단이 벌어지자, 진나라의 지방 통치 능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갔다.

  진나라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승·오광의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옛 전국시대 6국의 영역에서는 유력자들이 구 왕족의 후예를 왕으로 옹립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왕 등을 칭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진말의 분열과 혼란상 속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군벌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거야(鉅野澤: 오늘날 중국 산둥성 쥐예(巨野) 현 일대)에서 도적들을 모아 봉기한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항우와 유방은 이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 속에서 거대 군벌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항우는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 군대와 싸웠던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기원전 223년)의 손자이다. 항우 세력은 본래 그의 숙부였던 항량(項梁,?-기원전 208년)이 초나라의 부흥을 기치로 거병했던 군사집단이었다. 진나라 말기 초나라의 영역에서는 크고 작은 무장 세력들이 난립해 있었다. 항연의 후손인 데다 초 왕실의 후손인 웅심(熊心, ?-기원전 206년)을 회왕(懷王)으로 옹립하여 명분을 얻는 데 성공한 항연은, 이들 중 상당수를 흡수하여 강력한 군사 집단을 구축할 수 있었다.이 같은 사실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항우의 용명과 군사적 자질은 그 개인의 자질뿐만 아니라 진나라 말기-초한전쟁기 초나라 일대의 지정학적 상황과도 관계 깊음을 시사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항우는 항연이 기원전 208년 진나라 군대와의 교전 중 전사한 뒤, 항연의 동지였던 상장군 송의(宋義, ?-기원전 207년)를 암살하고 초나라의 병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항우는 기원전 207년 거록(오늘날 중국 허베이 성 싱타이 시 쥐루 현 일대)에서 조(趙)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러 온 진나라 군대를 괴멸시켰다(거록대전). 『사기』의 「항우본기」는 거록대전에서 오직 항우가 지휘하는 초나라 군사들이 분전하여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였고, 이를 통해서 항우가 여타 제후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MOIM 역, 2009). 사실 거록대전 이전까지 진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명장 장한(章邯, ?-기원전 205년)이 지휘하는 진나라 군대는 진승·오광의 난을 진압함은 물론 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조, 제, 위 등 6국 연합체의 군대를 상대로도 연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록대전은 이 같은 진나라와 6국 연합체 간에 일어났던 전쟁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였다. 거록대전의 패배와 조고의 국정농단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장한은 결국 항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장한의 항복은 진나라 군사력의 사실상 와해를 뜻했고, 이는 항우의 군사적 역량과 업적에 기인하는 부분이 다분했다. 그리고 이 같은 항우의 강력한 군사력은 본인의 뛰어난 군사적 자질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진말-초한전쟁기 초나라 일대의 지정학적 상황에 기인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초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특징은 항우 집단을 강력한 무력과 군사력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어 주었고, 이를 통해 진나라 멸망 직후 항우가 제후들의 주도권을 가지며 멸망한 진의 영토를 18제후왕들에게 분봉시켜 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출신으로, 건달 노릇을 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배포가 크고 주변 사람들의 인망이 두터웠던 덕에, 고향에서 정장(亭長)이라는 말단 관리직을 얻는 데 성공했다. 진나라의 토목공사에 동원될 죄수들을 인솔하던 중 죄수들이 탈주하자, 유방은 자신이 그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끝에 관직을 버리고 산적이 되었다. 이후 진승·오광의 난으로 인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유방은 동향 출신인 소하(蕭何, 기원전 257년-기원전 193년), 조참(曹參, ?-기원전 190년) 등의 추대로 패공(沛公)을 자칭하며 거병하였다. 유방 세력은 거병 초기 옹치(雍齒, ?-기원전 192년)의 배신으로 근거지였던 풍읍을 잃고 와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마침 항량이 풍읍 인근의 설(薛: 오늘날 중국 쉬저우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부족 국가, 또는 그 나라가 위치했던 지역의 지명)에 주둔하자 유방은 그의 휘하에 들어간 뒤 풍읍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후 유방은 항량 항우 세력의 일원으로  강리(杠里), 창읍(昌邑, 오늘날 중국 산둥 성 창이(昌邑) 시), 완성() 등을 공략하며 전공을 쌓아 갔다. 그 과정에서 유학자였던 역이기(酈食其, 기원전 268년-204년), 한(韓)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 타도와 한나라 부흥을 꾀하던 인물이었던 장량(張良, ?-기원전 186년)  등을 포섭하는 등, 훗날 항우와 대적할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할 기반을 닦아 갔다.


  거록대전에서의 승리와 장한의 항복 이후, 항우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던 진나라를 대체할 패자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함양이 함락되고 진나라가 완전히 멸망한다면, 중국을 통치할 권력은 항우에게 돌아갈 것처럼 보일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형식상 항우의 상관이었던 초 회왕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제후를 관중왕으로 삼는다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함양에 먼저 입성한 제후는 거록에서 진나라 군사력을 사실상 와해시켰던 항우가 아니라, 풍읍으로부터 창읍, 완성 등을 함락시키며 서쪽으로 진격하던 유방이었다. 이 덕분에 유방은 관중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기』의 「고조본기」에 따르면, 난폭한 항우가 아닌 덕망 있는 관중왕을 원했던 초 회왕 휘하의 원로 장수들의 의견으로 인해 항우가 아닌 유방이 함양에 먼저 입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기』 등에 기록된 항우의 행적을 살펴보면, 비록 역사적 패자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잔혹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거록대전 직후 장한이 항복했을 때, 항우는 장한, 그리고 그와 함께 귀순한 장군 사마흔(司馬欣, ?-기원전 203년)과 동예(董翳, ?-기원전 203년)를 포용함은 물론 옛 진나라(전국시대 기준) 영토를 다스릴 삼진왕으로까지 봉했지만, 그가 인솔했던 20만 명의 장병들은 신안(新安: 오늘날 중국 허난성 뤄양시 신안현 일대)에서 생매장해 버렸다(신안대학살). 이외에도 항우가 전쟁포로를 학살하고 인질이나 민간인을 잔혹하게 처형했다는 기록은 『사기』에만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항우는 초나라의 병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한 인물도 아니었다. 비록 항연의 조카였다고는 했지만, 항연 사후 초나라의 병권은 상장군 송의가 갖고 있었다. 항우가 송의를 암살한 뒤 초나라의 병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일종의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柴田昇(2015)는, 함양에 먼저 도착하는 제후를 관중왕으로 삼겠다는 회왕의 명령을 항우에 대한 견제 시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진말-초한전쟁기 관중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면, 그리고 이후 초한전쟁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상술한 초 회왕의 명령은 지정학적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관중은 황허 문명의 태동 이래 중국 문명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관중은 오늘날 중국 산시(陕西) 성 중부와 허난(河南) 성 서부에 걸쳐 있는 관중분지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 관중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 여겨지는 중원의 전체 영역에서 수리적 위치상으로는 서쪽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북동쪽-동쪽의 타이항(太行) 산맥, 남쪽의 친링(秦岭) 산맥 등에 둘러싸여 있고 위수(渭水. 황허의 지류)가 흐르는 황투 고원(黃土高原) 상의 분지인 관중은 그 지형적 특성상 외적으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동쪽의 한구관(函谷關), 서쪽의 대산관(), 남쪽의 우관(武關) 등을 통하여 중원 동부의 평야 지대와 쓰촨 분지, 그리고 서역 등과도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위수가 흐르는 황투 고원 상의 비옥한 토지 덕택에 관중에서는 높은 농업 생산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관중은 고대 중국의 중심지였다. 관중의 중심지인 장안은 고대 주나라의 도읍이었으며, 진나라의 도읍 함양은 위수를  경계로 장안에 서쪽으로 인접하였다. 이후 전한, 수, 당 등의 통일왕조는 물론, 후진, 서위, 북주 등 5호 16국 시대-남북조 시대의 왕조들도 장안 등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다.

관중의 위치(출처: https://kknews.cc/zh-mo/news/52o5ovl.html)

  요컨대 관중은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주나라가 건국될 때부터 979년 카이펑(開封)에 도읍을 둔 송나라가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의 혼란기를 통일할 때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중국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초한전쟁기에 관중에 대한 권리의 확보는 단순히 한 지역에 대한 권리를 넘어, 중국 전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함양에 먼저 도착하는 제후를 관중왕으로 삼는다는 회왕의 명령은, 이 같은 관중의 지정학적 위치와 가치를 바탕으로 항우를 견제하려는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초한전쟁기 관중의 지정학적 의미를 살펴보면, 관중이라는 장소를 활용하여 항우를 견제하겠다는 초 회왕의 시도는 상상 이상의 정치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관중은 중국의 정치권력은 물론 경제, 인구, 교통 등이 집중된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초 회왕은 항우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의제)로 옹립된 직후 숙청당했지만, 회왕에 의해 관중왕이라는 관중에 대한 권리와 명분을 얻었던 유방은 결국 항우 세력을 격파하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한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반면 관중을 지배할 명분을 온전하게 얻지 못한 채 함양을 파괴하고 관중이 아닌 초나라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던 항우는, 결국 유방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초한전쟁의 과정과 이에 따른 항우 및 유방 세력의 흥망성쇠를, 관중, 파촉, 초, 팽성 등의 지정학적 위치와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항우보다 먼저 함양에 도착함으로써 유방은 관중왕으로 옹립될 수 있는 명분을 확실하게 얻었다. 더욱이 유방은 함양 입성 후 보였던 행동을 통해서, 관중의 백성들은 물론 제후들로부터도 굳건한 신뢰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유방은 장량, 역이기 등이 조언에 따라 진나라 군대의 장수들을 매수하는 한편 자기 휘하의 장병들에게 민간인에 대한 약탈, 살해, 강간 등의 범죄 행위를 엄금함으로써, 자기 세력의 손실을 최소화고 민중의 지지를 얻으면서도 다른 제후들보다 빠른 속도로 함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항복한 진왕 자영을 처형하는 대신 살려 주었다. 그리고 함양에 주둔한 자기 휘하의 병력에게도 약탈, 방화, 강간 등의 범죄 행위를 엄격하게 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아방궁의 금은보화를 봉인하고 궁 밖에 진영을 설치하는 모범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유방은 관중왕의 자격으로 법상장()이라는 새로운 법령을 공표하였다. 살인자, 상해, 절도 행위를 지방관이 죄질에 맞게 처벌한다는 규정만 남겨두고, 진나라가 정한 모든 법령은 폐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법치주의가 당연시되는 현대 사회와 달리 고대 중국에서는 복잡한 법률 체계에 토대한 통치의 경험도 부족했고 사람들의 교육 수준도 크게 낮았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법령 체계는 진나라에 의해 일방적, 강압적으로  수립 및 적용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법치는 체계적인 법률 체계에 토대했을지는 몰라도, 대다수의 민중, 특히 옛 6국 출신의 민중들에게는 일종의 학정이나 악정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었다. 때문에 유방의 법상장 공표는 유방에게 덕망 있는 지도자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이 같은 유방의 행동과 조치는 유방에게 덕망 있는 지도자라는 명성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관중에 대한 유방의 영향력 역시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의 승자가 패자를 상대로 살인, 납치, 인신매매, 약탈, 방화, 강간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고, 고대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항우 세력의 패자에 대한 학대와 가혹행위는 신안대학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 기준으로도 포악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정도가 극심했다. 게다가 진말 중국인들의 지역감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중국 서부에 위치했던 진나라는 황허 유역의 중원(中原)에 기반을 둔 고대 중국인, 즉 화하족(華夏族)이 오랑캐라 무시했던 이민족 집단 서융(西戎)의 영역과 인접했다.  서융과의 접촉, 분쟁, 교류가 잦았던 진나라의 문화는 서융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이는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에 중원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으며 경원시되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게다가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분열상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6국을 무력으로 정복한 데다,  통일 왕조 수립 후 6국 출신자들을 각족 노역에 동원하고 중과세를 매기는 등 착취하고 차별했다. 진말 일어난 6국의 부흥운동은 진에 대한 복수심에 기인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고, 때문에 진의 멸망이 가시화되자 진나라 사람들은 옛 6국의 보복과 복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러한 점에서 함양 입성 후 유방이 보여주었던 행동은 유방을 함양과 관중을 무력으로 점령한 점령군의 수장이 아니라, 관중의 백성을 보호하고 포용할 진정한 ‘관중왕’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관중 입성 및 관중에서 펼쳤던 선정을 통해 관중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충분히 확보했지만, 그가 바로 관중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  정치적, 군사적 패권은 그가 아닌 항우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 회왕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지도자였고, 실권을 쥐고 있었던 항우는 기원전 207년 12월 함양 인근의 홍문에서 열린 연회(홍문연)를 통해 유방의 제거를 도모했다. 유방은 장량, 번쾌 등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암살을 모면했고, 이후 당시 오지였던 파촉왕으로 임명되면서 왕이 되는데 충분한 명분과 민심을 확보했던 관중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유방은 이후 관중의 수복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관중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유방은, 관중을 바탕으로 항우의 공세에 잘 대처하며 결국 항우 세력을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에 성공했다. 상세한 내용은 이후의 절에서 다루기로 한다.


  함양에 먼저 입성했을 뿐만 아니라 함양 입성 후 보여 주었던 행적을 통해 관중왕으로서의 명분과 명성을 확고히 얻을 수 있었던 유방과 비교해 보면, 항우는 정치적 안목은 물론 지정학적 식견 또한 부족한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진왕과 함양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 법상장까지 발표했던 유방과 달리, 관중에 입성한 항우는 약탈과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이미 한구관 인근의 신안에서 진군 포로들을 학살했던 항우는, 함양에 입성한 직후 아방궁을 불태우고 각종 보화를 약탈하는 한편 궁녀, 후궁 등을 납치하였다. 민가에 대해서도 약탈과 방화 등의 파괴 및 범죄 행위를 일삼았다. 유방에게 용서받았던 진왕 자영 또한 항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사기』의 「항우본기」에는 항우가 아방궁에 지른 불이 무려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항우가 함양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될 정도로 약탈하고 파괴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항우의 폭군이라는 악명은 더한층 심해졌고, 특히 관중 지역에 대한 명분과 민중의 지지는 더한층 악화되었다.

  비록 항우가 신안, 함양 등 각지에서 학살, 방화 등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고는 하나, 거록대전의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진 멸망의 일등 공신은 항우와 초나라 군대였다. 그리고 항우는 초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때문에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켰던 제후들의 맹주가 될 명분을 얻었다. 그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을 칭했다. 그리고 기존 6국의 왕족이나 실력자 18명을 왕으로 분봉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서 진 멸망 후 중국의 영역은 초 일대를 지배하는 항우를 맹주로 하는, 19개의 봉건 제후국들이 지배하는 형태로 재편되었다.

항우에 의해 분봉된 18제후왕의 영역(출처: http://magneo.egloos.com/m/1199447)

  그런데 이러한 18왕 분봉 체제는, 항우 체제의 공고화와 영속이라는 측면에서 지정학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초’패왕이라는 항우의 칭호에서 볼 수 있듯이, 함양을 파괴한 항우는 ‘금의환향(錦衣還鄕)’과 '금의야행(錦衣夜行)'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초나라로 돌아가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런데 초나라와 팽성은 통일 중국 왕조의 기틀을 다질 중심지로서는 적절한 위치가 아니었다. 사실 초나라는 오늘날 중국 후베이(湖北) 성 일대에서 유래한 나라로, 산둥(山東) 반도 남단에서 양자강 유역 일대를 강역으로 하였으며 전국시대에는 진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국력이 강했다. 그런데 초나라는 사실 초한전쟁 무렵까지는 황허 유역의 중원에 기반을 둔 고대 중국인, 즉 화하족(華夏族)에게는 동이(東夷), 묘만(苗蠻) 등 이민족 집단의 영역 취급을 받았다(김영진, 2011; 김인희, 2002). 그리고 팽성은 동주(東周)의 도읍지였던 낙양과 직선거리로 약 450㎞, 서주의 도읍이었던 장안과는 약 750㎞나 이격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서초패왕을 칭하며 팽성으로 근거지를 옮긴 항우의 결정은, 초나라 일대만을 지배하는 군주로서는 적절했을지 몰라도 통일 중국 왕조를 개국할 지도자로서의 지정학적 안목은 크게 부족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풀이된다. 실제로 항우의 이러한 결정은 당대에조차 현명하지 못한 조치로 여겨졌던 듯하다. 관중을 떠나 초나라 팽성으로 돌아간 항우를 일컬어, '초나라 사람은 마치 관을 쓴 원숭이 같다(楚人沐猴而冠)'라며 조롱했던 사람의 일화가  『사기』의 「항우본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은, 서초라는 강력한 지리적ㆍ군사적 기반을 가진 항우 세력이 18개의 봉건 영주들이 다스리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제후국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성격을 지닌다(松島隆真, 2014; 柴田昇, 2015). 그런데 비록 항우 세력의 군사력이 강력했다고는 하나, 초나라와 팽성의 위치는 18개나 되는 제후국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중심지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항우가 육국 연맹체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기본적으로 거록대전 등에서 보여준 항우 세력의 강력한 군사력이었고, 그는 제후들의 공고한 충성을 받을 수 있는 확고한 정통성을 갖추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도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초나라의 장군이었지 왕이나 왕족도 아니었고, 신안대학살이나 함양에서의 파괴와 약탈 행위 등으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적지 않게 실추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18제후왕 분봉 직후 의제를 숙청 후 암살하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그런 만큼 항우가 18제후왕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충성심을 최대한 확보하고 군사력이 항우에게 집중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은 항우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선 초한전쟁 당시는 혼란기였고, 각 지역의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시대의 7국 체제도 아닌 19개 제후왕 체제는 항우는 물론 각 제후들의 군사력 분산을 초래했고, 이는 항우 집단의 군사적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18제후왕들은 자신의 영지를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반란이나 내분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항우에 의해 독단적으로 진행된 18제후왕 분봉 역시, 각 지역 유력자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항우는 어디까지나 왕족이 아닌 초나라의 장수일뿐이었기 때문에, 통일 중국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정통성은 부족했다(松島隆真, 2014). 18제후왕 분봉 직후 이루어진 의제 암살은 그의 정통성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18제후왕 분봉 이후 각지에서는 반란과 내분이 이어졌고, 각지에 분산된 제후왕들은 상대적으로 약체화된 군사력으로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그리고 팽성에 자리 잡은 항우는 이 같은 혼란상과 분쟁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18제후왕들의 항우에 대한 충성심은 약화되어 갔다.

  심지어 항우조차도 자신의 세력 기반인 초나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나라의 영역은 전국시대의 초 외에도 춘추시대의 오(吳), 월(越)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이 활동했던 영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우는 서초패왕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 지역 기반이었던 초 영역 내부와 인접 영역조차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柴田昇, 2016). 18제후왕 분봉에서 배제된 후 유방에 포섭되어 항우 세력의 후방을 교란했던 팽월,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요청하는 항우에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결국 유방 측으로 전향한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기원전 195년) 등의 행적은 이 같은 항우 세력의 지정학적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홍문연에서 항우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피한 유방은, 항우에 의해 한왕(漢王)에 임명되어 파, 촉, 한중을 다스리게 되었다. 장안, 함양 등 관중 평야를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지만, 파, 촉, 한중 등은 관중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데다 당시에도 이러한 지역이 넓은 의미에서 관중의 영역에 포함된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한중왕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미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항우는 유방을 자신의 세력을 위협할 최대의 적대 세력으로 경계하고 있었지만, 아무 명분도 없이 유방 세력을 제거하거나 숙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촉과 한중은 초한전쟁 당시 교통이 불편한 데다 유배지로 쓰일 정도의 오지로 여겨졌다. 때문에 항우는 유방 세력을 이곳에 분봉하여 고립 및 약체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연고가 없는 이역에 배치된 군사들이 대거 이탈하는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력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파촉 지방은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그런데 쓰촨 성은 양쯔 강 상류 지류들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침식 분지이다. 침식 분지는 대개 하천이 제공하는 용수, 하천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기름지면서도 범람을 피하기에 용이한 광대한 토양, 그리고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공을 막기에 유리한 산지 등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고대부터 취락과 도시가 발달해 왔다. 그리고 쓰촨 분지는 비록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다고는 하나, 이 같은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농업이 발달해 왔고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손꼽히는 농업 지대이다. 게다가 쓰촨 지역은 관중과 더불어 고대부터 서역과 중원 간의 문화 교류를 담당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상술한 바와 같이, 파촉과 한중은 관중 지방과도 지리적으로 인접했다는 이접을 가진다. 유방은 소하 등의 보좌를 받으며 파촉과 한중의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사실상 유배지였던 지역에서 세력을 재정비하여, 불과 1-2년 만에 동쪽으로의 원정을 개시할 수 있었다.

초한전쟁의 과정을 나타낸 지도(출처: https://kknews.cc/history/vpeb8by.html)

  기원전 205년, 한왕 유방은 대장군 한신(韓信, ?-기원전 196년)을 앞세워 관중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당시 항우는 옹왕(雍王) 장한, 새왕(塞王) 사마흔,  적왕(翟王) 동예의 세 제후왕을 삼진왕(三秦王)이라 하여 옛 진나라의 중심지였던 관중의 통치를 맡겼다. 진나라 출신인 세 사람에게 관중을 맡겨 옛 진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세 사람은 항우에게 항복하여 제후왕에까지 올랐지만 그들이 인솔했던 장병들은 신안대학살에서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항우의 의도와 달리, 삼진왕은 오히려 관중 지방의 민심을 장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항우가 관중과 멀리 떨어진 팽성에 도읍을 정한 데다,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직면하면서 관중 지방은 항우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어려운 형편에까지 처했다.

  유방은 장량, 한신 등의 조언에 따라 입촉 직후 파촉과 외부 지역을 잇는 잔도(棧道)를 파괴하여, 부하들의 탈주를 막는 한편 삼진왕과 항우의 자기 세력에 대한 경계와 견제를 약화시켰다. 이후 현지 주민들만이 알고 있는 샛길을 따라 병력을 우회시켜 옹왕의 영토를 기습하여, 장한을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이어서 사마흔, 동예, 하남왕(河南王. 하남은 한구관을 경계로 관중과 인접한 낙양 일대였음) 신양(申陽) 등의 항복을 받아내며 관중을 장악했다. 기원전 206-205년에 걸쳐 유방은 자신에게 투항한 세력을 포용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으로, 옛 진나라 황실의 토지와 재산을 백성들에게 분배하고 농지와 행정구역을 재편함으로써 관중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하게 굳혔다. 그리고 206년에는 옛 진의 사직을 없애고, 한의 사직을 새로이 세웠다. 의제에 의해 관중왕의 명분을 얻었던 그는, 이제 관중을 회복한 뒤 한의 사직까지 세움으로써 관중을 통일 한 왕조의 장소적 근거로 만들어 갔다.


  유방은 관중을 지리적 근거로 삼아 동쪽으로의 군사적 정복 활동을 지속했다. 이를 통해 위왕 위표(魏豹, ?-기원전 204년), 조왕 장이(張耳, ?-기원전 202년) 등의 항복과 귀순을 받아내고, 한왕(韓王) 정창(鄭昌), 은왕(殷王) 등을 격파하며 중원의 상당 부분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파촉과 한중을 넘어 관중과 중원을 장악한 유방은, 항우의 의제 암살을 명분으로 삼아 제후들에게 항우 토벌의 격문을 돌렸다. 유방의 격문은 여러 제후들의 호응을 얻었다. 기원전 205년 봄 유방은 '5제후'(그 구체적 대상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음) 등과 56만 명 규모의 연합군을 결성한 뒤, 초나라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유방이 초나라 공세를 실시할 당시, 항우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북쪽의 제나라 공략을 위해 팽성을 비워둔 상태였다. 항우는 제왕 전영(田榮, ?-기원전 205년)을 격파하여 패사시켰지만, 제나라에서도 신안대학살, 함양 파괴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파괴, 약탈, 방화 등의 행각을 되풀이한 탓에 제나라 잔존 세력과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고전하는 중이었다. 이 틈을 타 한군은 기원전 205년 4월에는 팽성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유방은 함양과 파촉, 관중을 장악했을 때와는 달리, 팽성에서는 휘하 제후들과 병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팽성에 입성한 한군은 약탈과 노략질, 주연(酒宴)을 일삼는 등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항우는 제나라 원정군 가운데 정예병 3만 명을 추려 팽성의 한군을 요격하였고, 56만 명에 달하는 한군은 괴멸당하고 말았다(팽성대전). 유방은 마차를 타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두 자녀를 도주에 방해가 된다며 수레 밖으로 던지는 소동-이들은 마차를 몰던 유방의 측근 하후영(夏侯嬰, ?-기원전 172년)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까지 벌이며 간신히 항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심지어 유방의 아버지와 정실부인 여치(기원전 241년-기원전 180년)까지 항우 세력의 포로로 잡혔다.

  팽성대전의 참패로 한나라는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새왕, 적왕, 제왕, 조왕, 위왕 등의 제후왕들도 항우 측으로 전향하고 말았다. 승기를 잡은 항우는 한군의 잔존 병력을 추격했지만, 한군은 낙양에서 동쪽으로 약 50-80㎞ 떨어진 성고(成皋, 오늘날 중국 허난(河南) 성 궁이(鞏義) 시 일대)와 형양(滎陽, 오늘날 중국 허난(河南) 성 싱양(滎陽) 시 일대) 일대에서 큰 손실을 감내해 가며 초군의 추격을 결국 격퇴했다. 이는 한나라가 관중이라는 당시 중국에서 정치적 명분과 경제력, 인구가 집중해 있던 지역을 장악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고와 형양에서 항우의 추격군을 격퇴한 유방 세력은, 관중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팽성 대전은 한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한나라는 관중을 근거로 팽성대전 참패의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관중을 자국의 확실한 지리적 기반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柴田昇, 2016, 2018). 한나라는 관중이라는 지리적 기반을 바탕으로, 향후 더욱 공세적인 군사적 확장에 나설 수 있었다. ‘유방이 항우에게 백 번 패배하는 고초를 견딘 끝에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승리하여 천하를 거머쥐었다’와 같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인식과 달리, 팽성대전 이후 한나라는 관중을 지리적 기반으로 삼아 초나라와 사실상 대등한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 갔다.

  성고ㆍ형양 전투에 즈음하여 이루어진 유방의 영포, 팽월 포섭 또한 초나라의 공세를 저지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효과를 발휘했던 지정학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구강왕 영포의 영지, 그리고 팽월의 세력 범위는 서초의 영역과 인접해 있었다. 때문에 영포, 팽월 등이 한에 귀순하여 서초의 후방을 견제함에 따라, 서초는 군사적 행동에 무시하기 어려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관중 장악에 성공한 유방과 달리, 중원과 이격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통일되지 못했던 서초를 지리적 기반으로 삼았던 항우는 영포, 팽월 등의 군사적 활동으로 인해 자신의 지리적 기반이 더욱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유방이 팽성대전의 참패를 수습하고 관중을 한나라의 지리적 기반으로 다지는 가운데, 관중의 북쪽에서는 초나라의 패망을 앞당길 또 다른 군사적 정복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신의 북벌이었다. 한신은 유방이 지휘하는 한의 본군과는 별도로 북벌을 개시하여, 우선 팽성대전 이후 초나라 측으로  전향한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 위표를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 다음 중국 북부의 대(代), 연(燕), 조 등을 연이어 정벌하였다. 이어서 한신은 항우 휘하의 대장이었던 용저(龍且, ?-기원전 204?)가 지휘하던 서초의 20만 대군을 수공을 통해 섬멸(유수(濰水)전투)하고, 초나라에 북쪽으로 인접했던 제나라까지 정복하였다. 이로서 한나라는 팽성대전의 참패를 극복하고, 관중은 물론 중원 일대를 석권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한신은 유방에게 제왕으로 봉해질 수 있었다.

  사실 한신의 북벌은 유방이 성고와 형양에서 고전하는 가운데, 유방 휘하 부대와는 별개의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신은 유방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독자적인 역량으로 중국 북부와 중원 일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단기간에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즉, 한신은 북벌의 성공을 통해 유방, 항우와 더불어 중국을 3 분하는 대세력으로 독립할 가능성도 다분히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한신의 막료였던 괴철(蒯徹, ?-?)은 한신에게 유방을 배신하고 독립하여 중국을 3분하는 군주가 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리고 항우 역시 불리해져 가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신을 부추겨 그를 유방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포, 팽월이 한나라 측의 회유에 의해 항우를 배신하고 서초의 후방을 교란했던 것과는 달리, 유방은 그 경위야 어찌 되었든 한신을 끝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서 유방은 한신이 점령한 광대한 영토,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보하고 조련할 수 있었던 대규모의 정예 병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한신이 제나라를 점령한 기원전 204-203년 무렵에 이르러, 서초는 사실상 중국에서 지정학적으로 고립되고 말았다. 기원전 203년 광무(廣武, 오늘날 중국 허난 성 정저우 시 일대)에서 유방이 인솔하는 한군과 대치한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유방을 위협하는가 하면 유방의 암살까지 시도했던 까닭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항우가 직면했던 난국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보여 준다. 결국 항우는 홍구(鴻溝, 오늘날 허난 성 카이펑 인근에 있던 운하)를 기준으로 동쪽을 한, 서쪽을 서초의 영역으로 삼는다는 강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인질로 잡혔던 유방의 가족들도 한나라와 서초 사이의 강화 조약에 따라 한나라 측에 인도되었다. ‘역발산기개세’라 일컬어졌던 영웅 항우였지만, 지리적 기반을 잠식당하여 전쟁 수행 능력까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강화 조약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강화가 맺어진 후, 유방과 항우는 각각 한과 서초를 향해 병력을 회군하기 시작했다.


  홍구에서의 강화가 맺어진 뒤, 유방의 책사 장량과 진평(陳平, ?-기원전 178년)은 유방에게 강화를 파기하고 항우를 급습하여 서초를 무력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력이 약해진 서초를 한군의 본대뿐만 아니라 한신, 팽월 등의 병력까지 가세시켜 포위 섬멸한다면 서초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장량은 유방에게 서초를 멸망시킨 뒤 토지를 분배해 준다는 약조를 한다면 한신, 팽월 등이 확실하게 유방의 편을 들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고, 유방은 이러한 조언을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한나라는 여러 제후국들과 더불어 서초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항우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갔다. 심지어 서초 내부에서도 대사마 주은(周殷, ?-?)이 항우에게 반기를 들고 팽월 등에게 합류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항우는 202년 고릉(固陵, 오늘날 허난 성 타이캉 시 일대)에서 약 3만 명의 병력을 매복시켜, 10만에 달하는 한군을 상대로 유방이 간신히 도주하도록 할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다. 한군 각 부대의 포위망이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틈을 타서 거둔 승리였다. 하지만 항우가 고릉에서 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사이에, 관영(灌嬰, ?-176)이 지휘하는 서초 원정군이 팽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항우는 해하(垓下, 오늘날 중국 쑤저우 성 안후의 시 링비 현 일대)로 진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해하에서 포위당한 끝에 휘하 병력이 작전한계점을 넘어 와해 직전의 상황에까지 내몰렸고, 항우는 결국 기원전 202년 12월 한군과의 전투 끝에 자결로 삶을 마감했다. 이로서 서초는 멸망했다. 서초의 멸망은 한이라는 후대 중국사와 중국 문화의 전개 및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통일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사기』의 「항우본기」는 항우의 패망 원인을 의제 암살, 관중 지역 경영의 실패, 제후와 부하들에 대한 모진 대우의 세 가지로 꼽고 있다. ‘초인목후이관’의 고사, 그리고 「항우본기」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항우의 지정학적 안목 부재는 이미 당시에도 지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항우는 초나라라는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진-한 교체기에 항우가 6국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도 당시 중국의 중심지였던 관중이나 중원이 아닌 자신의 원래 근거지였던 서초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항우의 정치적, 지정학적 안목이 중국의 통일 왕조를 건국하기에는 충분치 못했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영포나 팽월이 반기를 든 데서 볼 수 있듯이, 항우는 애초부터 지정학적으로 통일 상태였다고 보기도 어려웠던 초나라의 영역조차 온전하게 통제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항우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해준 초나라라는 영역은, 항우의 지정학적 안목 및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인해 그의 패망을 초래한 장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유방은 처음부터 관중을 다스릴 명분과 인망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왕에 봉해져 파촉으로 간 뒤에도, 파촉을 잘 정비하는가 하면 교통이 불편한 파촉 지역의 지형을 역이용하여 삼진왕을 격파하거나 굴복시키고 관중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유방은 관중을 장소적 기반으로 삼아 팽성대전의 참패를 수습하고, 항우를 지정학적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한신의 북벌 역시 유방이 관중이라는 지정학적 요지, 중심지를 온전히 지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초한대전의 경과, 그리고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우와 유방의 정치적 리더십과 역량 차이뿐만 아니라 지리적, 지정학적 요인 또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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